렘42:1-22 (6) 좋은 것은 위대한 것의 적이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좋은 것은 위대한 것의 적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상당히 쇼킹하고 신선한 면도 없지 않아 있는 그러한 말입니다. 어떻게 좋은 것이 위대한 것의 적이겠습니까? 좋은 것과 위대한 것은 동류 아닙니까? 위대한 것으로 나아가는 전단계가 좋은 것입니다. 좋은 것이 크고 점점 더 발전하면 위대한 것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좋은 것은 위대한 것의 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원제 GOOD TO GREAT 라고 번역된 제목을 갖고 있는 책입니다. 2002년도에 발간된 책인데 저자인 스텐포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경영자문가 짐 코린스는 세계적으로 기업경영의 구루로 통하는 석학입니다. GOOD TO GREAT 책명과 같이 좋은 기업에서 위대한 기업으로 전환하는 그러한 비법을 이 책에 적어놓은 것입니다.

5년 동안 연구를 했습니다. 위대한 기업으로 전환되어진 그러한 기업을 찾아내고 그렇지 못한 기업과 공통적인 면을 뽑아내서 비교 분석하여 좋은 기업에서 아니면 그저 그럭저럭 경영되던 그런 기업에서 위대한 기업으로 전환된 11개의 기업을 찾아내고 그 기업이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가를 그렇지 못한 기업이 그렇지 못하게 된 이유와 비교하면서 아주 명쾌하게 기업경영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주는 그런 책입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마는 그 책머리에 나오는 문장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 중심으로 한 설교의 제목입니다. ‘좋은 것이 위대한 것의 적이다’.

제가 인용을 한번 해보았습니다.

《위대한 학교가 되지 못하는 것은 좋은 학교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정부가 없는 것은 대개가 좋은 정부가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삶에 도달한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는 좋은 삶에 쉽게 정착하기 때문이다. 회사 대부분이 결코 위대해질 수 없는 정확한 원인은 아주 좋은 회사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정부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하면 좋은 정부의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은 좋은 사람인 상태에서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좋은 것이 위대한 것을 막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세미나 중에 어떤 학생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꼭 위대해져야 됩니까? 평범하게 이 상태로 좋으면 되는 거지요.”

이때 짐 코린스가 대답한 것이 “위대해진다고 하는 게 좋은 것을 유지하면서 평범하게 사는 것보다 특별이 더 어려울 것도 없는데 굳이 좋은 상태에 머물러 위대한 것을 거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여기서 물론 위대한 기업의 기준이 뭐냐하는 것일 겁니다. 어떤 기업을 연구할 때 기업이 갑자기 수익률이 높아진 전환점을 찾습니다. 그래서 그 기업 전환점 이전에 별 볼일 없이 다시 말해서 짐 코린스가 기준을 잡기를 주식시장의 평균 성장비율과 이 회사가 주식으로 수익을 낸 그 비율을 따져서 주식시장이 낸 것의 3배 이상의 수익률을 냈으면 위대한 기업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제너럴 일렉트릭이나 코카콜라나 이런 잘 알려진 회사들이 아니라 미국잡지 포춘Fortune이 정한 500개 기업 중에 주식시장에서의 누적 수익률보다 3배 이상의 수익률을 낸 위대하다고 임의로 만든 회사가 11개 회사 밖에 없습니다.

제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 말씀을 섬기는 사람이니까 그 하나님 말씀 속에 감추어진 가치관의 입장에서 보면 회사가 주식시장보다 3배의 주식 누적 수익률을 냈다고 해서 그게 위대하다는 단어를 사용해도 되겠느냐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마는 어쨌든 중요한 것은 좋은 것이 위대한 것의 적(Good is the enemy of great)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유다 땅에 남은 잔류민들의 좌충우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대로 이스마엘이 사람들을 강제로 데리고 암몬으로 넘어가려다가 장군 요하난에 의해서 제지되고 사람들이 요하난의 슬하로 다 회복이 됩니다.

요하난은 우리가 살펴본 41장에서는 사람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려고 마음에 결정을 한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오늘 42장에서는 예레미야에게 나와서 “당신의 하나님께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주세요.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든지 당신이 전하는 대로 그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순종하겠습니다.”

6절에 보면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어쩌면 이렇게 잘 아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나와서 기도를 해달라고 얘기하고 하나님이 기도의 응답으로 어떻게 말씀을 하시더라도 우리 마음에 좋게 여겨지든지 좋지 않게 여겨지든지 우리가 순종하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곧 우리에게 복이 될 테니까.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아니, 이 사람들이 갑자기 어디서 이러한 깨달음이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이 말을 하기 전에 이미 사람들 모두가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결정을 했을 때입니다. 쉽게 말하면 짐 코린스의 말대로만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이미 마음 속에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이 다 진행되는 가운데 20절에 보면「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전하라 우리가 그대로 행하리라 하여 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라고 예레미야가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상황에 지금 제일 좋은 것이 무엇이냐?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라고 마음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나와서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요청하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 그대로 순종하리라.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복이 되는 줄 안다 라는 말까지 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것을 너희가 마음을 속였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내일 살펴볼 43장에서는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예레미야의 말에 윽박지르고 모든 사람을 데리고 애굽으로 넘어갑니다.

이해가 안 가지 않습니까?

보세요. 우리 마음에 좋게 여겨지든지 좋지 않게 여겨지든지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에 순종하겠다. 왜냐하면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알고 있는데 왜 이 말씀대로 순종을 안 할까요?

전 세계 교회 문턱을 드나드는 사람 중에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복 받는다 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사람은 또 누가 있겠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냥 타고난 성향이 좀더 얌전하게 생겨먹으면 죄적인 행위를 덜 할뿐이지 사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게 아닙니다. 있다면 의인일 겁니다. 그런데 의인은 없나니 세상에 하나도 없다고 그랬는데 말이 안 맞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좋게 여겨지든지 좋지 않게 여겨지든지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에 순종하겠다. 그런데 순종하질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셔도 그 말씀을 충돌하고 그 말씀을 파쇄하고 그 말씀을 지우고 이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에 생각되는 좋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먼저 좋은 것이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좋은 것이니까 마음이 달라붙게 됩니다.

오늘도 14절에 보면 「너희가 말하기를 아니라 우리는 전쟁도 보이지 아니하며 나팔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며 양식의 궁핍도 당하지 아니하는 애굽 땅으로 들어가 살리라」라고 얘기한다는 것입니다.

애굽 땅에 들어가면 전쟁도 없고 상황이 다급해서 들려지는 나팔 소리도 없고 굶어죽을 염려도 없다. 지금 이 상황에서 애굽에 가서 정착만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치 우리가 어려운 60년대에 미국 이민가면 제일 좋은 줄로 알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처럼 좋은 것이라는 게 마음에 생각이 들기 때문에 그건 좋은 것이니까 마음이 달라붙게 되어 있습니다. 일단 내 마음에서 좋은 것이 생각이 나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셔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게 바로 끈질긴 인간의 죄입니다. 좋은 것을 미리 생각해내는 것 이게 바로 선악과 따먹은 상태 아닙니까?

전세계 지금 예수님 믿는 교회가 빠져 있는 가장 치명적 오류가 있다면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좋은 것을 먼저 마음에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것에 대한 적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이런 말씀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읽어본 예레미야 33장 3절에도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했습니다. 내게 부르짖으라는 것은 “나, 하나님 없으면 안 됩니다.” 라는 것입니다.

나, 돈 없으면 안 돼, 나, 내 자식 성공 못하면 안 돼. 라고 부르짖는 것처럼 나, 하나님이 제일 좋아요 라고 부르짖으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너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크고 비밀한 일을 알리고 크고 비밀한 일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보면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했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것들이다. 이게 위대한 것 아닙니까?

주식시장의 누적 수익률보다 3배의 누적 수익률을 내는 게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기업 경영인들이 할 얘기고, 인간이라면 보편적으로 해야 될 위대함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본적도 없는 일들을 우리의 삶 속에서 행하시는 것이 위대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위대한 것이 다 충격에 의해서 상실되고 맙니다. 그것을 분쇄하고 있는 것이 내 마음에서 좋은 것을 내가 먼저 생각해 내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는 겁니다.

오늘 이 유다 사람들이 이 상황에서는 애굽으로 가는 것이 전쟁도 없고 굶어 죽지 않고 최고로 좋은 상황이다 라고 마음으로 좋은 것을 결정해 놓습니다. 내 자식에게 이것이 좋다, 우리 가정에는 이것이 좋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이렇게 되는 것이 좋다 이런 식으로 좋은 것을 결정해 놓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 말씀 절대 안 듣습니다.

내가 좋다고 여기는 것을 고집하며 외치며 부르짖다가 끝나고 돌아옵니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부르짖는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내가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고 알 수도 없고 마음으로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위대한 것을 내 삶에서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계셨는데 그 위대한 모든 것들을 산산조각을 내고 돌아오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좋은 것은 위대한 것의 적입니다. 위대함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났으면 좋을 거라고 여기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우리에게 위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어느 아버지가 아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지 않겠느냐」 라는 말씀에서 그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 그러므로 우리에게 위대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죽으리라 라고 주님께서 예언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주여 그리마옵소서. 아니, 우리가 다 알고 있는데 십자가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데 주님께서 십자가로 가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자기 마음에 좋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베드로가 스승의 몸을 보존하기를 원하고 생명이 길기를 원한다는 것은 우리가 늘 생각하고 있는 삶에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좋은 것이 하나님이 인류 역사상 인류의 마지막까지 통틀어도 가장 위대한 일인 십자가 사건을 이루시려고 하는데 베드로가 좋은 것을 생각해내면서 그 좋은 것으로 부숴버리려고 작정하고 달려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좋은 것을 생각해낸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망가뜨리는 자여 물러가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짐 콜린스가 『GOOD TO GREAT』에서 경영인의 자질에 대해 버스 이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버스는 갈 방향을 표시해 놓고 그 방향으로 갈 사람을 태웁니다. 그런데 위대한 기업을 이룬 경영인들을 연구해보니까 갈 방향을 정해놓고 갈 사람을 태우는 게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먼저 같이 하기에 적합한 사람을 찾더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그 사람과 함께 어디로 갈 것인가 정한다는 겁니다. 이 버스 이론 정말 기가 막힌 지적입니다.

우리와 함께 할 자 누굽니까? 이 세상에서 나와 함께 하기에 가장 최선으로 우선적으로 적합한 분이 누굽니까?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이 제일 아내보다 남편보다 자식보다 직장 동료보다 동창보다 부모보다 그 누구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에 제일 적합한 분이십니다. 그게 우리 신앙 아닙니까?

먼저 하나님을 만나고 내 인생에 하나님을 모셔서 태워드리고 그리고 난 다음에 하나님과 함께 의논하면서 내 인생의 나갈 방향을 정해나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이미 인생의 방향은 정해져 있습니다.

좋은 것을 정했습니다. 애굽으로 가야지... 그 다음에 하나님께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내 인생의 위대한 계획들은 다 분쇄되고 파괴되어 버리고 맙니다. 내 마음에 좋은 것이 하나님이 내 삶에서 이루려는 위대한 것에 가장 치명적인 적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 짐 콜린스가 또 하나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고슴도치 컨셉. 그리스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짐 콜린스가 인용을 합니다.

여우가 고슴도치를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여우가 얼마나 민첩하고 영리하다 못해 교활합니다. 가지가지 방법을 동원합니다. 고슴도치가 다니는 길을 연구합니다. 그래서 갈림길에서 숨어 있다가 어느 순간에 고슴도치를 공격하면 되겠다는 치밀한 전략을 세웁니다. 그래서 여우가 그 영리함의 극치를 발동하여 계획을 세우고 고슴도치를 공격합니다. 그러면 그 느리고 멍청해 보이는 고슴도치는 오직 한 가지밖에 할 수 없습니다. 몸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온몸 사방에 가시가 돋치게 하고 그리고 가만히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 여우는 고슴도치 주변을 연구하고 파악하고 정보를 분석하고 가는 길 오는 길 언제 나오고 모든 지식을 다 갖고 있는데 백 가지 천 가지 고슴도치를 사냥할 수 있는 모든 계획을 세워도 고슴도치는 오직 하나밖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몸을 동그랗게 하고 몸에 가시만 돋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잡아먹을 수가 없습니다.

집에 와서 또 실패하고는 연구합니다. 또 공격합니다. 고슴도치는 또 한 가지 온몸을 동그랗게 가시를 사방으로 방어합니다. 내일도 온몸을 동그랗게 가시를 사방으로, 여우는 날마다 고슴도치에 대한 지식이 쌓여져 갑니다. 전문가가 됩니다. 그런데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계에서 최고가 되라! 경제적인 수익을 남겨라!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게 모든 기업인들의 염원 아닙니까? 위대한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의 염원을 뭉뚱그릴 수 있는 단 하나의 개념을 만들어내라는 것입니다.

여우처럼 수백 수천 가지의 전략과 정보 분석이 있어봐야 소용이 없으니까 그 모든 것을 뭉뚱그릴 수 있는 하나의 개념을 만들어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위대함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내려오셔서 움직인다는 자체가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밥 한 끼를 주셔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면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하루 아무 사고 없이 지낼 수 있게 하신 것이 하나님이 하신 거라고 분명히 마음에 전달이 되면 그게 위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위대함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마음속으로 느끼는 좋은 것을 꿈꾸고 살아갑니다. 자, 위대한 삶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고슴도치 컨셉. 단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 마음에서 떠오르는 이 세상에서 모든 좋은 것들을 다 제로로 만드는 것입니다.

제로원의 십자가 원리. 이것 하나 가지고 경제 문제, 자녀 문제, 부모 문제, 배우자 문제, 사업 문제, 친구 관계, 건강 문제 모든 문제들을 고슴도치 컨셉으로 오직 하나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 땅에 대해 내가 좋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을 다 십자가에서 제로로 만들어버리면 됩니다.

오늘 유다 사람들이 애굽으로 가야 된다. 이것을 제로로 만들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그 땅에 머물렀더라면 복이 터졌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좋다고 여겨지는 것 버리기 쉽지 않습니다. 마음에 좋다고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버립니까? 이게 바로 하나님이 내 삶에 내려오셔서 행하시려는 위대함에 대한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고슴도치 컨셉! 단 하나만 됩니다. 인생의 제 분야에 대해서 제로원 십자가의 원리를 통해 내 마음의 모든 좋은 것들을 십자가에서 제로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선악과로 인한 원죄의 기운을 묶어버리는 힘입니다. 원죄 때문에 에덴을 상실하지 않았습니까? 원죄만 묶이면 에덴은 회복됩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제로원의 원리로 내 마음에 생각되는 좋은 것들을 다 제로로 만들고 잊어버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위대하신 계획과 행동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예를 들면, 홍해를 가르신 것입니다. 그 위대하심을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아무도 생각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세조차도 생각을 못했습니다. 무조건 하나님과 함께 한 것뿐입니다.

짐 콜린스의 버스 이론! 하나님과 함께 하면 됩니다. 여러분 마음에 좋은 것을 없애십시오. 그러기 위해 고슴도치 컨셉처럼 오직 제로원의 원리 하나만 가지고 모든 인생의 분야를 정면 승부를 하십시오.

어떻게요? 내 마음에 좋게 여겨지는 그 분야 그 영역에 대해 무조건 십자가에 걸어 제로로 만들면 됩니다. 제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고 소원하는 것들 제로 되게 해주세요. 그리고 하나님 내게 임해주세요.”

좋은 것은 위대한 것의 적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정말 내 마음에 좋게 여겨지는 것들 때문에 우리가 마음을 다 뺏기고 정말 좋아하고 사랑해야 될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좋아하지도 못합니다. 이 땅의 내 삶에 대해 좋게 여겨지는 모든 것들이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혀 제로 되게 하여 주시옵시고 오직 유일하게 참되신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들만이 내 삶에 나타나는 복된 삶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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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42:1-22 (6) 좋은 것은 위대한 것의 적이다 렘42:1-22 (6) 좋은 것은 위대한 것의 적이다 Reviewed by □□□ on January 14, 2024 Rating: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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