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논지와 사단의 논지
예레미야 42장(설교 말씀)
8/31. 설교자: 박창운 목사
우리가 성경을 순서대로 읽다보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19-22절 말씀을 보면, 요하난과 유다의 남은 자들이 자신들의 갈 길과 할 일을 예레미야에게 묻자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대답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레미야는 뭐라고 대답합니까?
너희가 내게 처음 물었을 때부터 너희는 하나님께 순종할 맘이 없었고 너희는 애굽으로 내려가기로 이미 작정되어 있었다고 대답합니다.
우리가 내일 읽을 예레미야 43절 1절과 그 이하의 말씀을 읽다보면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과 그 순서가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먼저 43장 1,2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 곧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게 하신 이 모든 말씀을 다 말하매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및 모든 교만한 자가 예레미야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는 애굽에 거하려고 그리로 가지말라고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먼저 읽은 후에 오늘 본문인 42장 19절 이하의 말씀인,
“너희가 나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보내며 이르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고하라 우리가 이를 행하리라 하여 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는 말씀을 읽으면 그 순서가 맞는 것 같습니다.
성경 읽는 두 가지가 방법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방법 택하시나요? 성경은 순서대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 그들의 질문에 대해, 예레미야는 10일간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그들의 본심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묻고는 있지만 마음으로는 이미 애굽 행을 결정해 놓고 있는 그들에 대해, 너희 마음을 속였다고 직격탄을 날립니다.
어제는 예레미야 41장 말씀에 나오는 이스마엘을 통해 ‘사람이 이렇게 악해질 수 있는가?“를 살펴보았고 오늘은 42장 말씀에 나오는 ‘요하난’을 통해 ‘사람이 이렇게 변질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마엘’은 공동체의 리더십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악한 사람이며, 나아가, 예루살렘이 무너진 것을 아파하며 하나님께 나와 예배드리러 오는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였기에 악한 사람인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요하난’을 통해서 사람이 이렇게 변질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어제 본문 41장 11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군대 장관이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의 행한 모든 악을 듣고" 라는 말씀과 ”모든 사람을 데리고 이스마엘과 싸우러 가다가“라는 12절의 말씀을 보면 ‘요하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게 뭔지 알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미 무너져버린 세상과, 하나님의 기준대로 정의롭게 살지 못하는 이스마엘에 대한 분노가 일어남으로써 이스마엘과 싸우려는 정의의 사도로 나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하난의 처음 의도는 순수했다고 보입니다. 아니, 처음 볼 때는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이렇게 보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직분 없고 가진 것 없을 때는 겸손한 자처럼 보이고 사람 앞에 깍듯하며 겸손해 보이지만 세월이 흘러 위치가 높아지고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게 될 때 변질 되는 사람 많은 것을 봅니다. 어쩌면 예전의 그토록 겸손했던 것이 진실이었을까 싶어질 만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아름답게 섬기던 사람이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는 듯이 변질되면 저 사람의 처음 모습이 사실이었을까... 생각케 됩니다.
예전에 섬기던 어느 교회에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던 집사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목사인 제가 그 집에 심방을 갈 때면 그 집사님은 7층 아파트 베란다에 나와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가 제 차가 보이면 맨발로 달려나와 “목사님, 오셨습니까” 90도 각도로 인사를 하곤 했습니다. 제가 너무 황송해서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하면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종님이 오시는데... 하던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러던 분이 그 후에 직분과 책임이 높아지고 안수 받고나서는 순식간에 달라졌습니다.
“어이! 박 목사 이리 와봐” ...
저는 제가 부족해서 저한테만 그러는 줄 알았는데 누구한테나 그러는 것을 보고는, 저분이 옛날에 섬기던 그 모습이 진정한 모습이었을까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힘이 있을 때 힘을 조심해야 됩니다. 뻐기는 것은 비극입니다. 그런 사람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회사에 들어가면 회사를 어렵게 하며, 공동체에 들어가면 말썽을 일으켜, 공동체가 무너지고 삐걱거리고 흔들리며 어려워지기 시작합니다.
그 얘기가 오늘 본문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 19절에서 22절 말씀으로 다시 갑니다.
20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나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보내며 이르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고하라 우리가 이를 행하리라 하여 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랬는데... 요하난은 왜 이렇게 변질되었습니까?
41장 18절 말씀과 같이 그가 바벨론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동정론으로 그를 옹호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42장의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동정론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가 바벨론은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것을 핵심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순수했던 사람이 왜 변질되고 ... 하나님 나라 영광을 구하던 초심이 왜 늙은 노욕으로 바뀝니까?
본문 42장 14절 말씀은 그들의 내심을 명확히 뽑아냅니다. 그들은 물론 두려웠을 것입니다.
저도 아주 가끔 이런 마음 들 때가 있습니다. 나도 다른 교회 담임목사로 불러줄까 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입니다. 사람에겐 원초적인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왜 두려워합니까?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 ... 우리는 전쟁도 보이지 아니하며 나팔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며 식물의 핍절도 당치 아니하는 애굽 땅으로 결단코 들어가 거하리라” 는 그들의 말과 같이 나의 안일을 구하기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우리 최고의 관심이 하나님 나라를 섬기고 무너진 공동체를 세우려는 것 아니라, 나의 유익 챙기기 바쁜 사람으로 변질되는 데에 사람의 비극이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변질되는 어처구니없는 이유입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의 한국교회와 우리 안에 있지 않은지 살펴봐야 합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 나라와 그 영광이 섬김의 목적이 되어 자기 안일과 미래에 대한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가야하는데 술수 부리며 자기 뜻대로 살며 자기 안일을 최고로 삼는 자로 변질되는 이유가 뭡니까?
11절 말씀을 함께 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그 두려워하는 바벨론 왕을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여 너희를 구원하며 그의 손에서 너희를 건지리니 두려워 말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놓치고 그것을 망실했기 때문입니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권능을 잊었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보다 나의 술수에 빠져듭니다.
구약의 모세5경을 읽다보면 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보게 됩니다. 또한 여호수아서를 보면 여호수아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됩니다. 두려워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 하나님을 의지하라 말씀하십니다.
자기 방식대로 살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원초적인 이유는 믿음이 없어서 입니다. 믿음이 없기에 내 먹을 것, 내 입을 것, 내가 챙깁니다. 그러므로 이런 원초적 불안이 밀려올 때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이겨내야 됩니다.
출발은 아름다웠으나 초심 지키지 못하고 변질된 사람들과 대조되는 성경의 인물이 누굴까 생각해보니 ‘욥’입니다.
욥기의 주제는 신학적으로 깊이 공부해야 될 만큼, 욥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욥기의 1-3장까지의 두드러진 주제는 욥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겼나입니다. 하루는 ...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온 사단에게 하나님이 묻습니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마치 욥을 자랑하시는 듯한 그 질문을 통해, 하나님의 욥에 대한 자신감, 적어도 욥을 든든히 믿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습니다. 욥은 하나님 기쁨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단의 논지는 욥이 하나님께 받은 게 많아서 그렇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논지는 아니다. 욥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얻은 것과 상관없이 나를 섬기는 사람이다 입니다. 욥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주신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욥을 보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거두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창조주요 구속주십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내어놓으실 만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기에 나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백하며 초심이 바뀌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살 수 있다면 저는 행복하겠습니다 믿고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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