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6:9-13 주기도문 강해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주기도문2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기독교의 기도는 뚜렷한 대상이 존재합니다. 다른 이방 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미지의 신이나 대답 없는 우상을 향한 기도가 아니라 분명한 인격을 가지신 절대자 하나님을 그 대상으로 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기도입니다. 또한 기도는 우리 양심을 향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를 향한 독백도 아닙니다. 소크라테스의 양심을 향한 기도나 내적인 광명을 찾기 위한 묵상을 하는 퀘이커 교도들의 기도, 내 안에 존재하는 신성을 찾고 일깨우기 위한 뉴에이지 명상가들의 그것과 기독교의 기도는 명백한 차이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명상과 참선이 큰 관심을 끌어 여기저기 명상과 참선이라는 플랭카드를 걸고 회원들을 모으는 것이 붐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일부 교회에서도 이러한 문화 조류에 발맞추어 명상과 참선을 기도와 접목시킨 영성훈련을 시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도는 결코 명상이나 참선과 그 시작부터 다른 전혀 별개의 존재라는 사실을 간과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기도라고 말하는 모든 것은 그 대상이 철저히 살아계시며 역사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 아버지에 집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분명한 대상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고정할 때 진정한 기도는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밀러라는 성경학자는 이 주기도문 초두에 나오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말씀을 기도의 황금문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하나님 앞에 다가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 황금문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께 내려 놓고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고 응답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도 예수님처럼 이 황금문을 통과해서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말씀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십니다.

사람에게 있어 ‘하늘’이라는 것은 미지와 초월의 세계입니다. 지금은 지구의 창공이 인간의 문명 앞에 정복당하여 그렇지 못하지만, 중세기까지만 해도 하늘은 성스러움의 대상이었으며, 숭배의 장소였습니다. 지금도 인간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능력을 얻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드넓은 우주공간과 무한한 하늘의 세계는 역시 인간의 경외심을 배우는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하늘에 계시다’라는 말씀은 이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늘의 개념은 헬라적인 사고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히브리적 개념의 하늘은 결코 천문학적으로나 물리학적인 하늘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쳐다보는 푸른 하늘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을 뜻하였습니다. 위, 아래라는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피조물의 세계와 구별되는 창조주의 세계를 뜻하는 질적 차이와 차원적 차이가 있는 용어입니다. 마태복음에서 34회나 하늘나라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 하늘도 결코 푸른 하늘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신적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차원 즉 비세상적, 빗물질적인 세속을 떠난 하나님의 세계에 속한 그곳을 가리키고 있는 용어입니다.

 

또한 이는 하나님의 존재의 초월성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헬라나 로마신화에는 신은 언제나 땅에 속하였고 인간과 섞여서 함께 사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적 사고에서 하나님은 세상에서 초월해 계시며 인간과는 전혀 별도로 높이 존재하시지만 인간을 향해 그 자신을 계시하시며 인간 역사 안에 친히 내재(內在)하셔서 세상을 주관하신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인간을 초월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셔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며 우리의 모든 간구에 응답하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시간을 초월하시며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은 우리의 찬양의 대상이 되시며 또한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능한 우상이나 제한적인 인간이 아닌 영원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아버지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대상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기도 당사자는 무엇이 되는 것입니까? 모든 기도자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이며 자녀의 신분과 특권을 가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그의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것이니 이것은 소중한 자녀 된 자의 특권임이 틀림없습니다. 신약 성서 학자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많은 유대 문헌을 검토해 본 결과 예수님 당시까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은 예수님 외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기도 시간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매달린 사람도 없었고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준 분도 없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호칭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쉬운 일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심으로 ‘본래 진노의 자녀였던’ 인간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고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주의 기도문에는 ‘하나님’이란 말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아버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식을 무척이나 사랑하여 무엇이나 해 주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우리를 죽도록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아버지가 자식에게 아까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이해와 논리와 경제적 개념을 넘어서는 무한한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헌신적인 사랑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요구할 아무런 근거가 없음에도 요구하면 그것을 들어주고자 하는 것이 아버지입니다. 그를 위해 하루 종일 일하여도 아깝지 않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어떤 왕이 나이 많은 노 재상(宰相)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가 더 슬펐습니까? 자식이 죽었을 때가 더 슬펐습니까?” 그러자 노 재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대답을 했습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어느 쪽이 더 슬펐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계속 어느쪽이 더 슬펐느냐고 차이를 물으신다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눈물의 안개 속에 가끔 뽀얗게 남산 끝머리가 보일락 말락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죽었을 때는 아무 것도 안보였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참 아버지로 생각지 않고 하나님을 아도나이라고 부르며 철저히 거리를 두고 멀리 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어려워하기만 했던 유대인과 같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는 부르면서도 그 안에는 아버지가 아닌 나와는 전혀 별개의 다른 존재요 무서운 존재요 어려운 존재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어떤 마음을 가집니까? 하나님에 대한 어떤 사랑과 애정도 없다면 성경을 펴십시오. 창세기를 시작으로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을 묵상하십시오. 이 말씀 한 장 한 장에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하나님의 피와 땀이 그대로 담겨져 있습니다. 당신의 외아들을 아낌없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활화산 같은 사랑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사랑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느끼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하되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것을 가르치십니다. 이 ‘우리’라는 말 속에는 우리 성도 각자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된 공동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이웃을 형제로, 자기를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 고백하며 그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우리가 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함께 고백한다면 이 고백을 한 두 사람은 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올림픽이나 월드컵과 같은 전 세계적인 스포츠 행사를 치르면서 스포츠가 인종과 이념과 사상을 넘어서 모든 인류를 하나 되게 하는 힘이 있음을 느끼곤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인종과 이념과 사상, 민족을 넘어 온 인류를 하나 되게 하는 가장 큰 존재는 스포츠가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그 순간 모든 성도는 인종과 이념과 사상, 민족을 뛰어 넘어 한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마치 자기들의 전매특허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개인 소유물처럼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라고 오만불손한 말들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인류의 아버지가 되셨고,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그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시 103:13).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내 아버지인 동시에 네 아버지이며, 결국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주 안에서 한 형제임을 고백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화목하고 화평하며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좇아 하나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 성, 즉 앗수르 나라의 수도에 가서 "외치라"할 때에 불평하며 다시스로 도망가려 한 것도 사실은 그의 협소한 신앙관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내게는 원수이지만, 저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우리 아버지’라는 고백을 통해 우리들의 형제 관계가 분명해져야 합니다. 두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면서 한 마음으로 형제의 사랑을 느끼면서 ‘우리 아버지’를 부른다면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윤리적 관계가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기도의 호칭에 대한 중요한 세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호칭은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의 임재속으로 이끌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되게 합니다. 무디는 이에 대하여 “기도는 아버지와 더불어 함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하는 순간 우리는 보다 담대하고 당당히 하나님께 설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보다 확신에 차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 되시는 그 하나님은 바로 전지전능하시며 부소부재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의 버리기까지 사랑하신 그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어떤 문제를 안고 있습니까? 어떤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풀 수 없는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하늘 아버지를 부르십시오. 주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https://m.blog.naver.com/noemisuh/221867851531


마6:9-13 주기도문 강해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마6:9-13 주기도문 강해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Reviewed by □□□ on January 18, 2024 Rating: 5
Powered by Blog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