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4-17 생명나무와 선악과 /송태근

(설교 요약)

선악과 생명나무 그리고 에덴 동산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많은 것에 대해 궁금해 한다. 오늘은 이들이 갖는 의미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두 개의 창조 기사

성경에 대해 보다 예민한 관심을 갖고 읽는 성도들 중에는 본문을 보면서 약간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한다. 4절을 보면 창조 기사가 1장에 이어 또 나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본문은 그래서 신학자 사이에도 논란이 많은 곳이다. 일부 신학자들은 이러한 것 때문에 성경이 믿을 만한 책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들은 성경을 모세가 혼자 지은 것이 아니고 여러 기사를 편집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극단적으로는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다른 종류의 창조 기사가 두 번 나오는 것이 아니다. 본문은 1장의 창조 기사 중 어떤 특정 부분을 보다 자세히 설명하려는 의도로 기록된 것이다. 같은 이야기를 초점만 달리해 기술한 것뿐이다.

 

땅의 내력

4절의 ‘내력’이란 말은 역사, 스토리, 기록, 기원이라는 뜻이다. 4절을 보면 처음에는 ‘하늘과 땅’이라고 했다가 후반에는 ‘땅과 하늘’이란 표현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이제부터의 이야기는 땅에 관한 이야기 즉 땅에 관한 내력이란 의미이다. 지금부터 성경에서 말하는 땅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 보자.

 

여호와 하나님

지난 주까지의 창조 기사 즉 1장에서의 창조 기사와 본문의 창조 기사 사이에 하나님에 대한 표현에 변화가 생겼다. 1장에서는 모두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본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차이의 의미가 무엇일까?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사물 즉 일반 물질을 만들 때 성경 기자에 의해 사용되었다. 그런데 성경 기자가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강조하고자 할 때는 ‘여호와 하나님’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그 어떤 부분이 바로 인간 창조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고, 스스로 노력하시고, 스스로 능력이 있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향하여 열심이시고 우리를 통해 어떤 목적을 약속하시고, 언약하시고 성취하시는 그리고 어떤 전체를 걸고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완성해 가시는 그런 하나님을 표현할 때는 여호와 하나님, 즉 ‘엘로힘 야훼’라고 표현한다.

성경을 읽을 때 이런 미묘한 차이를 알면 한결 이해가 쉬워진다.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호칭에는 이처럼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인간 창조

5절에는 ‘초목이 없고 채소가 없다’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직 창조를 하지 않았다는 말일까? 그렇지 않다. 초목에 대한 창조는 이미 제3일에 끝났다(창세기 1:11~13).

11.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창세기 1장)

그런데 왜 본문 5절에는 초목과 채소가 없다고 기록되어 있을까? 이 말은 초목이 없고 채소가 없다는 것에 의미의 강조점이 있지 않다. 여기에는 중요한 하나님의 의도가 숨겨 있다.

두 개의 창조 기사의 문법을 비교해 보면 사용된 단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본문 4절에서는 들과 밭이라는 단어를 히브리어의 ‘샤데’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본문을 히브리 원문에 맞게 다시 해석해 보면 ‘기본적인 초목은 모두 있지만 누군가가 농사 짖고 경작하고 수확해야 할 과정이 아직 남아 있다’라는 뜻이 된다.

이 말은 ‘인간이 필요하다’라는 뜻이다. 즉, 농사를 해서 열매를 맺어야 할 인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 노동은 죄의 대가만이 아니다. 이 때는 아직 죄가 들어 오지 않은 상태인데도 노동은 필요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다.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라는 표현은 어떤 상태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즉 농사 짓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게 만들었다는 히브리적 표현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땅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위해 아주 복된 조건으로 만드셨다는 것과 그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를 말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땅의 흙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흙은 성경에서 먼지, 티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티끌이란 단어는 욥이 사용하고 있다.

8. 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드셨는데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9.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욥기 10장)

14. 그가 콧김을 마시고 입김을 들이쉬시면
15. 만물은 일시에 숨이 멎고 사람은 티끌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욥기 10장)

먼지라는 표현은 시편 기자가 사용하고 있다.

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편 103:14)

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시편 104:29)

흙이 먼지 티끌과 같이 사용된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람이 죽어 화장하고 나면 한 줌의 재만 남는다. 사람이 흙으로 되었다는 것은 신학의 커다란 담론이다. 매우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다. 내가 무언가, 인간이 무엇인가 등을 생각하게 만든다.

사람은 생명이 떠나면 그냥 먼지, 한 줌 재에 불과하다. 우리는 아무 인생에도 자랑할 것이 없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출발과 출처를 뼈저리게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 사람은 서로 존중하고 겸손해야 한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지어다. 이게 우리 인생이다.

 

7절 ‘지으시고’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는 ‘야짜르’라고 한다. 모세가 이 글을 쓸 때 세계 최고의 문명은 애굽이다. ‘야짜르’란 단어는 애굽의 최상류 창작자 층에서만 사용하던 단어이다.

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에레미아 19장)

에레미아서에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든다’에서 사용된 그 단어도 ‘야짜르’이다.

하나님은 다른 것들은 모두 말씀으로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직접 손으로 만드셨다. 이 때 ‘야짜르’란 고급 단어가 사용되었다.

 

7절의 ‘생기’는 히브리어로 ‘내샤마’ 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기운’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성경 전체에서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사용되었다. 동물이나 식물들에게는 사용된 적이 없다.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의 생령과 맞닿을 때만 존재한다. 하나님의 생령이 떠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인간은 단 1초라도 주님의 생령이 떠나면 먼지에 불과하다. 이것이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차이이며 관계이다. 이 넘을 수 없는 차이와 관계를 잘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이 인간이 창조주 앞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일려 준다.

 

에덴 동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동방의 에덴 동산에 두셨다. 여기서 ‘동방’은 꼭 동쪽 방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동방이란 단어는 은유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해가 머물러 있는 방향 또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동방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을 의미한다.

에덴 동산이란 동산의 이름이 에덴이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이라는 지역을 만드셨는데 그 지역의 한 곳에 동산이 있었다는 것이다. 에덴은 ‘기쁨의 동산’이라는 뜻이다.

동산은 히브리어로 ‘간’이라고 한다. ‘간’은 ‘가난’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가난’이라는 단어는 울타리를 치다’라는 뜻이다. 동산에는 이처럼 ‘하나님이 특별히 간섭하시고 보호하시는 영역’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님께서 그 동산 중앙에 선악과와 생명 나무를 만들어 놓으셨다. 하나님이 참 짖굳다라는 생각이 든다. 동산의 뒤쪽 한 켠에 잘 안 보이는 곳에 만들어 놓으셨다면 인간들이 타락할 확률도 작지 않았을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언제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곳에 이 두 나무를 심어 놓으셨다.

 

선악과

선악과의 의미는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나무 자체에 어떤 성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빌미로 창조주와 인간 사이에 계명을 만드신 것이다. ‘먹지 마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첫 계명이다.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장)

 

하나님께서 이런 계명을 만드신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담겨 있다.

만약 이런 계명이 없으면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이 것을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경계선을 만드신 것이다. 나는 창조주이고 너는 피조물이다. 너는 내 질서, 명령, 통치 내에서만 참된 안식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인간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금단의 열매와 이를 통한 계약을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열매를 먹느냐 안 먹느냐의 자율권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셨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기계로 만든 것이 아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피조물인 우리를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하게 대우해 주신 것이다 우리에게 선택권과 자율권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동등하게 대우하신다는 깊은 사랑을 보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강제로, 억압적으로 억지로 다루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강제로 우리를 사랑하게 만들었다면 그게 어찌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될 수 없다. 남녀 관계에서도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강요하여 결혼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스스로 사랑해야 그게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설득하여 그 분을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 금단의 열매와 계명을 만드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이 계명을 어겼다.

 

생명 나무

선악과를 먹었으면 계명대로 죽어야 한다. 그것이 원래의 계명이었다. 공의를 살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계명대로 우리를 죽여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이지 않으시고 대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이셨다. 우리의 죄값을 예수님이 대신 지불하도록 한 것이다. 그게 생명나무이다. 생명나무는 인생들이 하나님의 긍휼, 자비, 용서를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계시록 2장 7절에 생명나무에 대한 기록이 있다.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계시록 2장)

여기서 ‘이기는 그’는 죽음에서 승리하신 분 즉, 예수 그리스도이다. 또한 그 분을 구주로 고백한 사람들이다.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1장 )

이처럼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통한 자만이 먹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인류는 인류의 역사를 통한 헛된 두 가지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그 첫째가 선행 체계이다. 선행 체계란 선행을 통한 득도를 추구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의지, 노력, 선행을 통해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다는 사상, 철학 등을 말한다. 그러나 이 것은 인생을 속여온 것이며 헛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식 체계이다. 지식 체계란 인간의 지식으로 영생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역시 인생들을 속이는 것이다. 모두 헛된 일이다. 오직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의 은혜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다. 그 외에는 소망이 없다. 그 소망이 바로 생명 나무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통해 인간이 처절하게 무너지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선악과 사건이다. 선악과는 죄값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런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예수의 공로를 힘입어야 한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도 ‘이기는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를 통하면 생명 나무 열매를 먹을 수 있다. 선악과 나무 가지 하나 꺾고, 생명나무 가지 하나를 꺾어 만든 십자가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밖은 사건이 바로 에덴 동산의 두 나무 사건이다.

 

두 개의 명령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두 가지 명령을 주셨다. 창세기 2장에는 ‘경작하며 지키게’란 구절이 나온다.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세기 2장)

 

경작하고

경작하라는 말은 ‘정복하라’의 의미가 아니다. 이 명령은 아담에게 온 인류를 섬기며 살라는 명령이다. 경작은 또 단순히 ‘노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경작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야바드’라고 한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레위인들이 성막이나 성소에서 여호와의 수종들 때 사용하던 단어이다. 즉 제사장들이 섬길 때 사용하던 제의적 용어이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

우리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인생이어야 한다. 축복의 창고가 되는 인생이 되어 안 된다. 창고와 같은 인생은 쌓아 놓기만 하는 어리석은 인생이다. 우리는 먼지 같은 존재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잠시 맡아 놓은 것뿐이다. 몇 만평의 땅이 있다고 한들 다 가져 갈 수가 있겠는가? 5,000명을 먹여 살리는 인생을 살 것인가? 아니면 5,000명분을 혼자 먹으며 사는 인생이 될 것이가?

‘경작하라’는 섬기라는 말이다. 섬긴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부터 받은 원천적이 복을 자꾸 흘려 보내라는 것이다.

 

지키라

지킨다는 영어의 Keep의 의미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질서와 법도 아래 있을 때에만 행복하다.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여기서 지키라는 것은 그것을 지키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율례와 법도 안에 내가 있을 때만 참된 안식과 행복이 있는 존재인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래서 주가 주신 생명 있는 동안에 온 땅에 하나님의 복을 마음껏 경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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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4-17 생명나무와 선악과 /송태근 창2:4-17 생명나무와 선악과 /송태근 Reviewed by □□□ on March 17, 2024 Rating: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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