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에덴 동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에덴이라는 단어 안에는 즐거움, 기쁨, 축복, 혹은 행복의 땅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에덴의 반대 개념으로는 광야나 사막을 떠올립니다. 에덴은 아름답고 풍요로운 땅이었습니다. 네 개의 강이 소개되고, 물이 풍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에덴을 물댄 동산이라고도 합니다. 9절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를 보면 아름답고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가 풍성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다룰 것은 동산 중앙에 세워져 있는 두 나무입니다. 하나는 생명 나무고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유명하죠? 그런데 오늘 보면, 두 나무가 어디에 세워져 있는가 하면 동산 가운데 세워져 있습니다. 동산 가운데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세워두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도를 가지고 세워두셨다는 것입니다.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생명 나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두신 나무로 보입니다. 문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다른 것은 마음대로 먹되 오직 한 가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왜 이것을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 실과 안에 독이 있는 걸까요? 무슨 연유로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리고 가장 많은 질문 중 하나는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을까? 만들지 않았다면 먹지 않았을 텐데 괜히 만들어놓고 먹으니까 심판하신 게 아닐까? 타락의 원인 제공을 하나님이 하신 것이 아닌지 항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에서 선악과를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이해가 안 되는 영역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먼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무엇이기에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특별히 선악을 안다는 게 무엇일까요? 여기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있습니다. 가장 유력한 해석 가운데 하나는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되어 자기중심적 해석과 판단을 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가지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의존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악을 분별해 내는 것도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금지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스스로 신이 되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려고 하는 자기중심성을 가지고 스스로 선악을 구분하면 문제가 생길 때가 참 많습니다. 모든 것을 완전하게 아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안 계십니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맞다고 하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일까?” 우리는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옳고 그름으로 판단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아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동시에 다 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만이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나만 옳다고 우기는 것은 오만입니다. 떠도는 학설도 마찬 가지입니다. 한때는 옳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잘못되었다고, 한때는 그릇되었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옳다고 증명되기도 했습니다. 인간이 가장 많이 하는 것이 오해와 착각입니다. 성숙해질수록 어떤 고백이 나오나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많았구나. 쓸데없는 주장과 고집을 피우며 살았구나.” 누가 홀로 의롭고, 참으로 지혜로운 자입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욥기에서도 마지막에 욥이 회개하면서 한 고백이 “내가 알지 못하고 많이 떠들었습니다.”였습니다.
세상을 보면,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나의 의로움을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을 죽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결국 스스로를 죽이는 비극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과 허물에 대해서 맹공을 퍼붓고 비난했는데 알고 보면, 그 사람보다 더 큰 죄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죄인이란 무엇입니까? 치우쳐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다른 사람의 약점을 캐내고 비난하고 욕하는 전쟁터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결국 하나님을 비난하고 하나님께 반항하는 인간이 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금지한 것에 불순종함으로 얻은 지식은 결코 축복이 될수 없습니다. 교만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결국 내 주장이 강할 때 자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가 오만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네가 전지하냐?”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나도 죽고, 다른 사람도 죽이는 비극을 맞습니다.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둘을 세워 놓으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선택할 자유는 주어졌습니다.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던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던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자유를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특권은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스스로 행동하고, 결정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뒤에서 조정하시고 통제할 수 있도록 인간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독립된 자아를 가진 인격체로 스스로 결정하고 자발적으로 판단할 능력을 주셨습니다. 피조물이 가진 최고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자칫하면 하나님에게도 대들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하셨습니다. 자유가 없는 인간은 로봇에 불가합니다.
15절을 보면, 인간이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동산을 책임지고 돌보고 다스리게 하셨는데 이것은 자유가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16절의 “여호와 하나님이 그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에서 “임의로 먹되”라는 말이 자유롭게 먹으라는 말입니다. 무엇이든 취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창조의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선악과를 금지하신 것은 제한이나 구속이 아니라 자유를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동산의 모든 실과를 다 먹을 수 있었습니다. 거의 무제한의 자유였습니다. 예를 들어, 빨간 색이 섞인 것을 먹지 말라고 하거나 혹은 씨 있는 것은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동산 한 가운데 눈에 뚜렷하게 드러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하나만 금지하셨습니다. 99.999%를 다 누릴 수 있는 자유였습니다. 결코 어려운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어떤 것에도 제한이 없었고 이것 하나만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하나만 지키면 모든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상태에서 할 수 없이 이것을 따 먹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에덴 동산은 풍요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먹어야만 하는 어떤 이유나 명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마저도 먹겠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한하신 그 하나를 기어코 범한다면 그것은 실과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금지한 하나님에 대한 저항이고 불순종입니다. 모든 자유를 주셨는데 딱 하나, 금지한 그것이 불편한 것입니다. 그것을 거스른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정면승부이고, 공격이며, 의도적인 것입니다. 죄질이 나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신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되 하나의 제한을 두셨습니다. 제한을 두신 이유는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질서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인간의 위치는 어디에 놓여 있는가를 이해하고 행동하게 하셨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안에서 질서를 지킬 때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축복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인간에게 주신 자유는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한 가지 명령을 지키기만 하면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분명한 것은 선악과는 자유를 누리도록 주신 것이지 제한을 목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자유로움이 있지만 지켜야 할 선이 있습니다. 부부간의 금기를 깨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하나의 제한이 무너지면 그다음은 다 무너집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한 인간의 자유는 정욕적으로 변하게 되고 결국은 불행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정해줍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자체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초점이 맞춰 있습니다. 하나님이 금지하는 것을 먹겠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내가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겠다는 독립선언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존된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떨어져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은 최초의 법, 창조주가 피조물과의 맺은 언약입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정과 거부가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에덴의 복을 누릴 것인가 잃어버릴 것인가의 문제가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선악과가 뭔데? 내 마음대로 할 거야!”라고 우기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앉겠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너의 힘으로 살아라.”, “하나님을 찾지마라!”, “하나님을 의지하지 마라!”고 합니다.
오늘날 세상을 보면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겠다고 아우성입니다. 범죄한 아담의 후예들입니다. 배우자와 상관없이 마음대로 남자가 남자와 살든지, 여자가 여자와 살든지 상관하지 말라고 합니다. “당신이 뭔데 나를 간섭하느냐?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합니다. 하나님 싫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누가 나를 간섭하는 것입 니다. 모두 독립선언을 하고 삽니다. 내가 왕이 되고 싶고 누가 좋은 말을 해주어도 듣기 싫어합니다. 사춘기 아이들의 특징은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쁘다고 어루 만지면 손대지 말라고 합니다. 자기가 입고 싶은 옷을 입고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일어 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군대를 가면 제대로 훈련을 받습니다. 그곳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하면 큰일납니다. 제식훈련이 가장 힘듭니다. 한 번만 하고 끝내면 좋겠는데 계속 반복합니다. 자고 싶은 시간에도 잘 수 없습니다.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피곤한 생활을 했는데 의외로 괜찮은 사람이 되어서 나옵니다. 누군가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제한 받아본 경험은 의외로 좋은 경험이 됩니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내 팔을 내가 흔들며 가겠으니 비키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하지 말라고 하면 괜히 더 하고 싶어집니다. 선을 그어 놓으면 넘어가고 싶습니다. 누군가 “금지한 것은 다 재미가 있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비극은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내 마음대로 하고 살아갈 때입니다. 인간에게는 권력 의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힘을 가져서 내가 왕이 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 없는 자유를 누리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모든 피조물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분이십니다. 왜 선악과이고 왜 먹으면 안 되냐고 항변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께 복종해야만 에덴의 복을 누릴 수 있는 존재로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무분별하게 명령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거의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특권을 인간에게 부여해 주셨습니다. 창조물의 대표자로 모든 것을 다스리는 권한이 부여되어진 대단한 존재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서의 자유라는 것입니다. 자유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36절을 보면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 우리라”
누가 자유를 주신다고 하나요? 아들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입니다. 아주 심플합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진리’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살면, 그리스도에게 매이면 자유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자유가 제한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믿으면 믿을수록 힘들어진다고 합니다. 그것은 잘못 믿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대로 믿으면, 말씀대로 살면 참된 자유가 옵니다.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습니다. 수없이 나를 얽어매려고 하는 세상의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진리를 따르는 사람이고 진리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점점 불편하게 만들고 더 힘들게 만든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를 모든 것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롭게 만듭니다.
17절에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좋았더라!” 로 가득 찼던 창조의 세계 안에 어두움이 드리우고 있습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조의 초반에 섬뜩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이 추적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짐작게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경계선에 놓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인간의 태도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무신론자들의 공격을 보면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관점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인가를 금지하시고 억압하시는 분으로 오해합니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만 끌고 가고자하는 독단적인 분으로 자신에 대해 저항하는 인간에 대해 철저히 처벌하는 공포스러운 분으로 몰고 갑니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와 같은 책 이 그런 부류의 책입니다. 권위주의적이고 편협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라고 부추깁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관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들어 놓고 먹으니 죽인다고 하는 가해하시고, 끔찍한 처벌을 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라고 부추깁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성가신 존재로, 아니면 자신의 경쟁자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금지 명령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할 때가 많지만 하나님의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신신당부하는 것들 이 듣기 싫은 잔소리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것은 부모의 간절한 애정이 담긴 사랑의 당부입니다. 금지는 억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더 많이 누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신 명령입니다.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은 공포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죽이려고 주신 명령이 아니라 살리려고 주신 명령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악과를 볼 때마다 하나님에 대해서 불편해지기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합니다. 인간에 대한 금지 명령에는 하나님의 풍성한 약속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이 명령은 하나님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줍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심판주가 되시기도 합니다.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은 절대자만이 할 수 있는 선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판정은 언제나 옳습니다. “반드시 죽으리라!”는 단순히 겁을 주는 게 아닙니다. 육체적 죽음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죽으리라!”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 어쩌면 죽을 지도 모른다.”가 아닙니다. “간혹 어떤 사람은 죽을지도 모른다”가 아닙니다. “정녕 죽으리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런 판결을 통하여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막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과 결단은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계가 없는 자유,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자유는 방종이나 독선으로 변질됩니다. 스스로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성경은 내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는 상태를 축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순종하는 삶이 축복입니다.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죽음입니다. 다른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고가 나면 끝입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죽는 것을 우리는 그냥 무심코 넘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지금도 시행되고 있는 장면입니다. 영웅호걸들도 죽고, 권 세 있는 사람들도 죽음의 행렬에 서 있습니다. 그렇게 능력과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죽음의 열차를 타야만 합니까? 하나님의 법이 그들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가 만드신 법 아래의 피조물은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것을 거스르고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대할 때마다 옷깃을 여미고 또 여며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 앞에는 두 가지의 나무가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순종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불순종의 길입니다. 하나는 축복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저주의 길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의 죄의 길입니다. 우리는 매일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모든 선택의 자유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고 선택의 대가는 내가 받아야 합니다. 주어진 자유를 사용할 때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선택은 책임입니다. 선택 이후 대가 지불은 반드시 주어집니다. 오만하고 교만하여 내 갈 길로 가겠다고 한다면 선악과를 따 먹은 것과 같습니다.
지금도 우리 안에는 두 마음이 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고자 하는 마음과 내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이 계속 내 마음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란 존재를 지우고 싶어합니다. 에덴은 너무 좋은데 하나님은 몰아내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어질 3장에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지 알고 있습니다. 3장으로 가면 인류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범죄하는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다음 장으로 넘어 가기 전에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내가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사이에 서 있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오늘 나에게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생명 나무인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인가? 주어진 자유에 대한 선택들이 오늘 나의 삶입니다. 내가 매일 선택하는 작은 일들 속에 하나님이 계십니까? 아니면 내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젖혀버리고 내 마음대로 선택하는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선택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매인 삶을 구속이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매인 삶이 자유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선택한다는 것은 머리에 뿔이 달린 삶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간섭을 싫어하면 그때부터 삶에는 위기가 옵니다. 내 느낌대로 살고, 내 기분에 끌리는 대로 살아가면 죽음의 길에 이르게 됩니다. 생명 나무를 선택한 삶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믿고 순종하십시오. 그리스도를 붙들면 삽니다. 말씀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열심히 사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만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려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항상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께 의존된 존재로 살아갈 때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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