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3:16-19 기도 중에 감사하는 이유 /이성희

서론

기도는 어렵습니다. 기도는 가장 잘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설교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기적 베푸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관상기도는 한국교회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너무 동방교회적이라고 하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너무 묵상적이어서 사이비성을 가지고 있다고도 하였습니다. 관상기도란 십자가를 묵상하고, 영혼을 고요하게 하는 기도법입니다. 주기도문이나 애송하는 시편 또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찬양과 감사로 마무리하는 기도입니다. 관상기도에는 찬양과 감사가 기도의 마무리입니다.

기도 방법은 네 가지입니다. ‘ACTS’란 말로 네 가지 기도를 요약합니다. 이 네 가지는 ‘찬미’(Adoration), 고백(confession), 감사(Thanksgiving) 그리고 간청(Supplication)입니다. 감사가 없는 기도는 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이미 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으면 다음에 요구하는 것을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참 기도의 특성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근거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경배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모든 일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겸손히 낮추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선한 것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간구하는 것입니다.

역대상 23:30에는 “아침과 저녁마다 서서 여호와께 감사하고 찬송하며”라고 합니다. 서서 감사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아침과 저녁에 기도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하는 것은 참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입니다.

어떤 할머니에게 딸이 전화를 했습니다. 어머니에게 돈을 좀 보내려고 전화를 통해 계좌번호를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딸이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해도 안 들려서 딸은 크게 계좌번호를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그 때 할머니는 큰 소리로 ‘계.좌.번.호’ 하더래요.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하는데 ‘감.사’라고 소리만 지르면 됩니까? 감사하는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기도’라고 합니다. 감사는 기도로 해야 하고, 기도는 감사로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성만찬을 베푸실 때도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누가복음 22:17에는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하시고”라고 합니다. 19절에는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하시고”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감사를 기도로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기도가 빠질 수 없습니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시 달라고 기도해도 주시지 않습니다.

독일어의 ‘기도’(Gebet)라는 단어는 ‘부탁하다’(bitten)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자칫 겸손하게 하고, 자기비하적인 자세로 기도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탁하고 구하는 형식으로만 기도하지 말고 감동적인 찬양과 감사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박국 3:1을 보세요.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라고 합니다. 음률에 맞춘 기도라는 말입니다. 하박국이 1장에서는 원망과 불평과 의문을 하나님께 쏟아냅니다. 2장에서는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해답입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우리가 농사짓는 사람은 아니지만 일 년 동안의 온갖 수확에 대하여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우리 개인이나, 교회나, 나라가 복잡합니다. 불평과 의문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구원받을 것을 다시 마음에 새기고 감사가 풍성한 감사주일이 되고 이 감사가 우리 매일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여호와 구원의 하나님 때문에 감사합니다.

하박국 3:18에는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합니다. 하박국이 말하는 즐거움, 기쁨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소유입니까? 아니면 존재입니까? 하박국의 최고의 소유가 무엇입니까? 무화과, 포도, 감람, 우리의 양, 외양간의 소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소유이면 불행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잠깐 보이는 것은 결코 인간에게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내 소유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공급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기도 하고 취하기도 하십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처절한 생존의 싸움을 합니다. 박탈감과 절망감과 현실적 위기에 살지만 하나님을 향한 확고한 신앙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리라는 구원의 소식을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손에 쥔 것을 다 잃어도 하나님을 잃지 않으면 부자입니다.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다 떠나도 하나님께서 곁에 계시면 평안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한 분으로 늘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욥기의 주제가 ‘고난’이 아니라 ‘회복’이란 말씀을 드렸습니다. 욥기를 보면서 고난만 보면 잘못 본 것입니다. 욥기에는 가장 확실한 회복이 나타나 있습니다. 영원한 회복은 구원일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세상에서 완벽한 회복을 경험합니다. 가정의 회복, 재산의 회복, 건강의 회복, 재산의 회복을 맛보았습니다. 양이 7천 마리였지만 1만4천 마리가 되었습니다. 약대가 3천 마리였지만 6천 마리가 되었습니다. 소가 5백 겨리였지만 1천 겨리가 되었습니다. 암나귀가 5백 마리였는데 1천 마리가 되었습니다. 욥기 1:3에 기록된 것보다 두 배가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아들 7명과, 딸 3명을 얻었습니다. 그의 딸들은 전국에서 가장 예쁜 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욥은 140년을 더 살고 아들손자 4대를 보았고, 나이 들고 기한이 차서 죽었습니다.

욥기를 통하여 배우는 것은 이것입니다. ‘고난은 알고 보면 복’이라는 것입니다. 물질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즐거움을 얻고, 평안을 얻고, 만족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있으면 세상의 어떤 것도 부럽지 않으며, 어떤 물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맥스 루케이도가 말했습니다. “최대한 많이 감사하라.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받을 이상의 것을 베풀어주셨다.” 지혜로운 사람은 없는 것을 욕심의 눈으로 보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것을 헤아려보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이 감사는 물질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함을 알면 감사도 풍성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은혜도 풍성할 것입니다.

‘인디애나 존스’나 ‘미이라’와 같은 고대 보물을 찾는 영화를 보세요. 옛날 보물이 있는 곳을 가서 가까스로 보물을 찾습니다. 보물을 찾아서 보물과 금을 잔뜩 가지고 나오다 돌문이 닫히고, 옆에서 독화살이 나와 죽습니다. 영화에 보면 독화살은 꼭 목에 박힙니다. 천금을 가져도 가장 귀한 생명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잃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나의 하나님이 되시면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귀한 것으로 아는 것이 복입니다.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귀하신 나의 주님이십니다. 이런 확신만 가지면 물질이 좀 부족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바라던 것을 얻지 못해도 하나님이 선하시고 나를 잘 아시기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와 ‘진주 장사의 비유’를 보세요. 보화가 있는 밭을 발견하고 모든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것이 천국입니다.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모든 것을 다 팔아 진주를 사는 것이 천국입니다. 모든 것을 다 팔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천국입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천국과 하나님을 세상의 물질과 비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삶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다음부터 살았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악가 조지 베블리 쉐어는 방송국에서 엄청난 액수를 제시하며 전속계약을 하자고 했지만 거부하고 찬송을 부르기로 결심하고 빌리 그래함 전도 집회의 독창자가 되어 평생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후에 그가 만든 찬송이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분은 없네”라는 찬송입니다. 제가 아는 권사님은 남편이 그 당시로는 엄청나게 부러워하는 직장을 다녔지만 신앙생활이 힘들다는 이유로 회사를 사임하게 하셔서 7남매를 키우느라 모진 고생을 하셨지만 그분의 자녀 5명이 목사 혹은 목사사모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짐 엘리어트는 대학을 졸업한 젊은 엘리트였지만 대학시절 선교사로 헌신하고 함께 기도하던 친구들과 에콰도르 아우카족 선교를 위해 아내와 어린 아기를 두고 떠났다가 도착 후 얼마 되지 않아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이런 예를 들자면 끝도 없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장의 핵심은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 믿음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가셔서 마르다를 만나셔서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6)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42)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1에는 “돌을 옮겨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시는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제1장은 ‘감사’입니다. 감사 기도의 모범을 보이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많은 감사의 조건 가운데 구원을 받은 것 때문에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새 생명 얻은 것 때문에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구원의 하나님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사도 하나님 때문에, 새 생명 얻은 것 때문에 아뢰는 감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여호와가 나의 힘이 되시기에 감사합니다.

하박국 3:19에는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라고 합니다. 하박국은 기도 중에 하나님이 자신의 힘이신 것을 알고 감사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당시의 환경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쇠약하게 만듭니다. 절망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힘이라는 것이 감사의 조건이 됩니다.

시편 18:1에는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시편 43:2 에는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환경에 개의치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힘이라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호와가 힘이라는 것은 그들의 말에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이란 히브리어 ‘엘로힘’은 ‘엘’이란 말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엘’이란 말의 뜻은 힘입니다. 여호와가 힘이시니까 내게 힘이 되십니다. 힘도 없는 존재가 힘이 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산성이십니다.  방패이십니다. 요새이십니다. 반석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작고 힘이 없는 나라입니다. 백성들은 작은 나라의 약소민족입니다. 힘이 없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힘이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힘이셔야 하고, 든든한 분이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대 게르만어에 힘이란 단어, ‘kraft’는 능숙함, 완성, 기술, 수공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근육을 팽팽하게 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힘이라는 단어는 단지 강함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그냥 힘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능숙하고 완벽한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힘이십니다. 하나님이 힘이시기에 내가 약해도 괜찮습니다. 나는 약한데 하나님이 힘이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나는 비록 약하나, 주 예수는 강하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습니다.

세상의 힘이란 물리적 힘, 물질의 힘, 권력의 힘, 지식의 힘 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힘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힘의 이동이 있습니다. 물리적 힘에서 정보의 힘으로 힘이 이동하였습니다. 권력이 힘이라고 하지만 자세히 보면 권력이란 아무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뜬구름 같을 때도 있습니다. 어제까지 당당하던 권력 실세들이 오늘 체포되기도 하고, 힘을 과시하던 사람들이 피의자에서 피고로 변하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믿을 만한 힘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힘이신 것을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잠언 24:5에는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라고 합니다. 아는 것이 힘입니다. 그런데 지혜와 지식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 지혜와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힘이신 것을 알면 내가 힘이 생기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호와를 아는 것이 나의 힘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라고 합니다. 힘이 있으면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힘이 없으면 발걸음이 무겁고 걷기도 힘듭니다. 더구나 힘이 없으면 높은 곳을 다니기가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힘이 있으면 높은 곳도, 낮은 곳도 관계가 없습니다. 이사야 40:4에는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힘이시기에 모든 곳을 평탄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편히 걷게 하십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라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슴은 신성한 동물입니다. 성경에서 사슴은 깨끗하고 정한 동물이며, 사랑스럽고 예쁜 동물이며, 힘이 있고 빠른 동물을 말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우리를 사슴 같게 하십니다. 우리를 편히 걷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 아침에도 교회까지 올 수 있는 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시대는 분명히 힘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장거리미사일을 발사합니다. 중국은 사드배치를 반대하고 어선들이 마구 우리 고기를 잡아갑니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이 되어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가 불투명하다고 긴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최순실 게이트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개인과 교회와 나라를 구할 힘이 필요한 때입니다. 하나님의 힘이 절실한 때입니다.

삼손은 성경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머리털 때문에 힘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눈이 뽑힌 삼손이 다곤 신전의 두 기둥 사이에 서서 팔을 벌려 기둥을 잡고 신전을 무너뜨렸습니다. 그 때 3,000명이 죽었는데 삼손이 살아 있을 때 죽인 자 보다 더 많았습니다. 힘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사야 40:29에는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라고 합니다. 31절에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힘이심을 알고, 그분을 통하여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들어가다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걸인을 만났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걷게 하였을 때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이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찬송하며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다리에 힘을 얻게 된 걸인은 감사가 풍성했을 것입니다.

찬송가에도 하나님이 힘이심을 간증하는 노래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 되시니”.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등입니다. 하나님이 힘이라고 고백하는 찬송이 참 많습니다. 그 찬송을 부르면 힘이 되고 감사가 넘칩니다.


결론

우리 시대는 하박국 시대와 비슷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소민족의 애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외교, 안보 모두가 편치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편한 것이 없고, 편할 때가 없습니다.

하박국 1:3에는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라고 합니다. 13절에는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라고 합니다. 14절에는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라고 합니다.

“어찌하여”라는 탄식이 그칠 날이 없을 만큼 우리 주변 환경은 어지럽습니다. 탄식은 우리로 하여금 아래를 보게 합니다. 고개를 숙이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힘이십니다. 위를 보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사슴처럼 높이 올라가 영혼의 고도를 높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힘이신 것을 알고 위를 바라보면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은혜가 따라다닌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만 있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힘이시기에 나를 사슴같이 뛰게 하실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힘이 없이 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힘을 얻고,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하박국의 삶이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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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3:16-19 기도 중에 감사하는 이유 /이성희 합3:16-19 기도 중에 감사하는 이유 /이성희 Reviewed by □□□ on March 15, 2024 Rating: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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