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5 /이대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함(1-11절)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나는 이다’ 형식으로 자신을 밝히시는 일곱 개 선언 중 마지막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참 포도나무입니다. 포도나무는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극상품 포도를 심으시며 품으셨던 기대와는 달리 좋은 포도 열매를 맺지 못하여 결국 버림받고 맙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바람과 소망을 이루시는 참된 포도나무가 되십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연결되어 생명을 공유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이 신비하고 놀라운 믿음의 본질을 다시 한번 새기고 기뻐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1절과 2절입니다.

(1-2)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예수님 안에 있지만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제거해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깨끗하게 다듬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포도나무를 가꿀 때 겨울에는 열매 맺는 가지들이 가져가야 할 영양분을 빨아먹지 못하도록 열매가 맺히지 않는 가지들을 제거하고, 봄에는 열매 맺는 가지들이 쓸데없이 자라나면 다듬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아마도 예수님이 자신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깨끗하다고 선포하셨던 모습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3절 말씀은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라고 증거함으로써 이를 입증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신비를 말씀하십니다. 4절입니다.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이 말씀은 기독교 신앙의 정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미 요한복음 14장 20절에서 말씀하신 바입니다.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수학에서 두 개의 집합, 즉 집합 A와 집합 B가 같을 때, A가 B에 속하고 B가 A에 속한다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면 이는 결국 우리가 예수님과 같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인 동시에 예수님이 우리로 살아가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작은 예수로 살아감과 동시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거하다’는 말은 “거주하다”, “머무르다”, “계속해서 살다” 또는 “장막을 펼치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즉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상호 침투와 상호 내주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구분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구분이 되지 않는 포도나무와 가지가 지니는 중요한 심상입니다. 이 심오한 진리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따라서 가지인 우리는 포도나무 안에서만, 그리고 포도나무의 영향을 받을 때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5절은 증거합니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괜찮은 가지인 것 같더라도 포도나무의 생명력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열매가 맺어질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이 없는 삶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진정한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밖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간다고 믿는 자들은 밖에 버려져 마른 가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이 예수님 안에 있음을 분명히 의식하고 내가 어디 있든지 더 크신 예수님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며,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더 위대하신 예수님 안에서 행하는 것임을 아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7절입니다.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말의 의미를 보다 풀어서 설명해주십니다.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단언하십니다. 이는 기도만 하면 이루어진다는 백지수표는 아닙니다. 다만 말씀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면, 내가 구하는 기도가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자가 구하는 모든 것은 사실 예수님이 구하시는 것이 됩니다. 그 기도는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에 동참하는 기도입니다.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포도나무 비유가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주실 것을 약속한 후에 등장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즉 포도나무와 가지를 연결하는 매개가 바로 성령이며,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뜻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로 대표되는 성령님의 열매가 나타내는 것이야말로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 됩니다. 물론 열매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의미합니다. 즉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우리가 삶으로 아버지가 아버지 됨을 드러냄을 뜻합니다. 즉 아버지가 어떤 분이심을 우리의 삶으로 나타내고,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증명하는 일이 우리가 제자됨을 밝히는 일이 됩니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이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의미를 보다 상세히 밝히십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지키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아버지의 계명을 지킨 것처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로서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행위가 됩니다. 예수님은 이미 새 계명을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우리가 지킬 계명은 어떤 외적 조건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네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기준은 내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만 하면 그 이상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기준이 되면 그 기준은 나를 사랑하는 것을 넘어서 예수님 사랑이 됩니다. 자아를 향한 나의 이기적인 사랑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사랑의 출처가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하는 것은 어떤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11절은 말합니다.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다름 아닌 기쁨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리시는 연합의 기쁨에서 우리가 나왔기에 우리의 존재 목적은 그 기쁨을 함께 누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결코 도덕적인 우월성을 나타내려는 목적도 아니며, 다른 숨겨진 의도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사랑 그 자체가 목적이며 그 자체가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하는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라(12-17절)

예수님은 이 새 계명을 12절에서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위대한 사랑이라고 하시며, 우리가 자신의 친구임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본인이 먼저 그 죽음을 당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사랑이 어떤 것인지 직접 입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선포하십니다. 15절입니다.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이제 우리의 신분에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로 우리가 종이 아니라 친구라는 것입니다. 친구란 동등한 관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분이신데,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뜻으로서 우리는 우리 안에 내재하시면서 초월하시는 그 하나님의 교류에 속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친구라는 단어가 지닌 함의입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여기에서 우리가 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16절은 말합니다.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님과 어떤 동일한 대접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저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여 세우시고, 열매를 맺고 항상 있어 아버지께 다 받게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거하라고 명하신 것과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영원히 풀 수 없는 신비입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인해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는 그 구원을 이루어가는 책임도 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열매는 우리가 예수님 안에 머물 때 나타나는 결과인 동시에 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존재가 사랑스럽게 여겨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른 존재가 사랑스럽게 바뀐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예수님도 지금 이 말씀을 하시는 대상인 제자들이 인간적인 생각에서 사랑스럽지만은 않으셨을 것입니다. 몇 시간 후면 예수님을 다 떠나 버릴 그들이 뭐가 그리 사랑스러우셨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먼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고, 나의 사랑 안에 영원히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장기려 박사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랑이 아니면 말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 모든 생각이 사랑이 아니라면 거기서 멈춰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실 수 있었던 그 모든 말씀과 행위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실낱같이 보이는 소망을 붙잡고,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랑하며 악을 선으로 갚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없는지 생각해보시기 원합니다. 아직도 사랑하지 못한 한 사람이 없는지 생각해보시기 원합니다. 사랑할 수 없도록 만드는 그 한 가지 조건 그것까지도 먼저 사랑하신 주님 앞에 내어 드리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시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작은 예수가 되어 살아가게 하신 이 믿음의 신비를 우리 안에 간직하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교제 안에 우리를 조건 없이 초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사랑만이 우리의 본분이오니 오늘 그 사랑을 실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고,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함이란 무슨 의미입니까? 이 진리를 항상 의식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2. 내가 작은 예수로서 언제나 예수님 안에 거하고 있음을 인정하십니까? 그렇게 인정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함을 나타내는 열매를 맺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3.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어떻게 실천적인 방안을 세우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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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5 /이대은 요15 /이대은 Reviewed by □□□ on April 23, 2024 Rating: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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