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주일 아침, 교회를 가야 할 시간에 있었던 어떤 부부의 대화 내용입니다. 아내가 급한 마음으로 교회 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남편이 옷을 입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교회 갈 준비를 하지 않고 뭐하고 있어요?” 남편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가고 싶지 않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아내가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라고 묻자 “그렇소! 교회 가고 싶지 않은 세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사람들이 너무 쌀쌀맞고 사랑이 없는 것 같소. 둘째는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가기 싫소. 셋째는 그냥 가기 싫소!”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아내가 “하지만 당신이 교회에 꼭 가야 하는 세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는 성도들의 마음이 그래도 따뜻하고, 둘째는 그래도 교회에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몇 사람은 있어요. 셋째는 무엇보다 당신이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기 때문이예요! 빨리 옷을 입으세요!”라고 하였습니다. 때로는 교회 공동체가 목사마저 가고 싶지 않을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도에게 교회 공동체라는 곳은 피할 수 없는 곳입니다. 신자가 되어 그리스도인이 된 순간부터 자동적으로 교회 공동체의 일원, 가족이 됩니다.
성경적 공동체는 어떤 곳일까요? 기독교의 핵심 가운데에는 공동체성이 있습니다. 요즘 교회의 건강성이 화두가 많이 됩니다. 교회가 얼마나 큰가, 얼마나 많이 모이는가보다 교회가 건강하냐 건강하지 않으냐가 굉장히 중요한 이슈입니다. 교회 건강성에 대해 여러 진단을 할 수 있지만 핵심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공동체성입니다. 공동체성이 얼마나 살아 있느냐, 그것이 얼마나 확보되어 있느냐에 따라 교회 건강의 유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기업체나 세상의 공공기관 같은 조직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비유합니다. 몸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잘 이해하는 것이 교회의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지만 교회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다니다 보면 혼선이 많이 생기고 결국 교회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갈등이 생겨 스스로 시험에 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바울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이 ‘몸’, 인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의 인체는 신비롭습니다. 인간의 몸은 수많은 신체기관들이 오묘하게 서로 연결되어 움직입니다. 실낱같은 수많은 신경세포 조직이 거미줄처럼 온 몸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혈관을 통하여 혈액이 온 몸 곳곳에 쉬지 않고 돌고 있습니다. 크고 작은 뼈들이 서로 기가 막히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척추를 중심으로 많은 내장기관들이 매달려 제각기 활동하고 있습니다. 오묘합니다. 이 몸 전체를 이해할 때 중요한 개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유기적 연합이라는 것입니다. 유기적 연합이라는 것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긴밀하게 연결되어 상호 교류를 하면서 생명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할 때 우리의 관계를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각 지체라는 말입니다. 여러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교회는 홀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고 홀로 독립된 개체로 신앙생활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일대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믿음으로 받지만 그 이후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면 홀로 떨어져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손가락에 난 상처가 고통을 준다고 손가락을 잘라 버리지는 않습니다. 낫도록 해 줍니다. 어떤 것도 독립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우리가 서로 배타성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두 수용하고, 관계 단절을 하도록 하는 벽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대간, 지역간, 학력간, 인종간, 남.여 차이 등의 벽이 허물어지는 곳이 교회입니다. 모두가 다 어울리며 배타성이 없어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강조되는 것은 용납과 인내입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의 어떤 조직체보다 위험한 요소를 많이 갖고 있습니다. 너무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한 부류가 아니고, 어떤 목적이나 취미가 같아서 모이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올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다른 지체들을 몸의 일부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몸이 전부 다르지만 그것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이지선 자매를 아실 것입니다. 대학 졸업반일 때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오빠와 돌아오던 길에 음주운전 차로 인한 사고 때문에 온 몸의 반이 화상으로 녹아버렸습니다. 자신의 몸이 화상으로 녹아버렸을 때 너무 두려워 자신의 몸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녹아진 얼굴 피부 사이로 눈썹이 새로 날 때 그 일그러진 얼굴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내 몸의 일부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잘라버리지 않습니다. 잘라버리면 더 깊은 고통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교회를 몸이라는 관점에서 생각을 하면 우리의 신앙은 달라집니다. 기분 나쁘다고 “나는 교회를 안 다닐 거야!”라고 하는 것은 몸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몸을 거부하는 것은 마치 내 팔을 잘라버리겠다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분리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를 좀 일으켰다고 “저런 사람은 쫓아내야 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만 골라서 모인 곳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더불어 지내는 법을 배우면서 성장을 해 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얘기할 때 그리스도의 몸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때가 언제인가 하면 공동체에서 누군가 아픔을 겪고 있을 때 그 아픔이 느껴진다면 내가 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손가락을 찌르면 아픕니다. 손가락만 아픈 것이 아니라 몸 전체가 아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 아프면 그 아픔이 나에게도 오고 그 집의 문제가 내 문제처럼 느껴진다면 몸 안에 같이 있는 것입니다. 몸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대예배 속에서 느낄 수가 없습니다. 소그룹, 사랑방 안에 들어가야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방에 몇 가정이 모여 있는데 어떤 집안에 환자가 생겼다면 모두가 그것을 느낍니다. 같이 기도하고 관심을 가지며 필요한 것을 돕습니다. 부족한 성도들이 눈에 띄면 부족한 사람들을 내치는 것이 아니라 내 곁에 두고 돌보며 섬기는 가운데 그도 자라가게 하고 그 섬김을 통해 자신도 영적으로 자라갑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나님께서 붙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으면 몸 안에서 상처 입은 영혼들이 치유 받는 놀라운 신비의 경험이 교회 공동체 안에 있습니다. 어딘가가 아프지만 몸이 건강하다면 낫는 것입니다. 몸 안에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치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생명의 뚜렷한 특징은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생명체로 보았습니다. 이 안에 엄청난 힘이 있는데 그 힘은 성장의 힘입니다. 어떤 생명체든지 자라는 기쁨이 있습니다. 핏덩이 같은 아이들이 자라고 말을 하고 뛰어다니며 머리가 비상해지는 것은 신비로운 일입니다. 조그만 씨앗을 심었는데 그것이 싹이 돋아나고,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은 너무나 신비한 일인데 이것은 생명의 힘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이러한 생명체로 본 것입니다. 죽은 무기체 덩어리가 아닙니다. 생명체는 끊임없이 새로운 세포가 생성되면서 자라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바울이 교회를 그렇게 표현합니다.
교회가 성장한다는 말을 사람이 많아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많아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씨앗이 우리에게 심겨지고 생명이 그 안에서 자라가는 데 자라가는 생명체들이 실제적으로 교회 안에 모여서 유기적 관계 속에서 커져갈 때 그것을 ‘자라간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적 생명체는 영적으로 자라가게 됩니다. 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장을 성경에서 ‘온전함에 이르게 한다’라고 하며 ‘온전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인간은 ‘온전하다’, ‘완전하다’라는 표현을 쓸 수 없습니다. 영어로 mature이라고 하는데 그리스도인이 성숙해진다는 것입니다. 성숙해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숙의 목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본문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라는 표현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삶이 성숙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으면 모든 사람이 그렇게 자라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로 있습니다. 나이가 70세에 예수를 믿어도 영적으로는 갓난아이와 같습니다. 갓 태어난 그리스도인입니다.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이제 막 태어난 그리스도인이라 분별력이 없습니다. 자기중심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강도 높은 이야기를 하면 알아듣지 못합니다. 영의 세계에 진입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다른 것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요동치고 쉽게 미혹을 받습니다. 영적으로 자라지 않으면 외부적 환경에 제한을 받고 늘 끌려다니는 모습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영적으로 늘 힘든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체가 우리 안에 있으면 자라가게 됩니다. 영적 성인으로 자라가고 듣기만 했던 말씀을 스스로 섭취하기도 하고 섭취하는 양이 많아지고 굉장히 딱딱한 말씀들을 먹기 시작하며 말씀의 세계가 드러납니다. 기도도 5분 만에 끝나고 달라고만 하던 걸음마 단계에서 더 깊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진리에 대에 분별력을 가지고 진리를 가지고 세상을 판단하고 분별할 줄 아는 눈을 가지는 것이 영적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우리 안에 일어나야 합니다. 바울은 나중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처럼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고 하는데 이것은 영적인 어떤 수준에 올라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씨앗이 우리 안에 들어온 이상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그 성장의 목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고, 그리스도를 닮는 것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성장은 어떻게 하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첫째, 교역자들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11절을 보면 여러 직임이 나옵니다.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가 나오는데 여기 언급한 직분들의 공통점은 말씀 사역입니다. 여기에서 실제적으로 남아있는 사역은 목사와 교사입니다. 목사의 주된 사역은 말씀 사역입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사역입니다. 말씀을 전할 때 회심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회심한 성도를 말씀으로 양육할 때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말씀 사역입니다. 그래서 목사와 성도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목사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신앙생활에 참 중요합니다. 목사가 말씀의 통로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가르침이 잘 전달될 때 신앙이 성장하게 됩니다.
목사의 역할을 12절에서 명확하게 표현합니다. 첫째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둘째는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훈련의 포커스는 성숙한 성도가 되게 하고 성숙한 성도가 섬김의 삶을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목사의 말씀 사역을 통하여 하는 것이고 그래서 온전해진 그리스도인이 섬김의 삶을 살아가게 함으로 교회가 세워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중요한 원리가 있는데 그것은 교회의 일은 목사나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오히려 성도들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실제적으로 사역의 주체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목사가 하는 일은 성도가 성숙하도록 하고 봉사의 일을 하도록 코칭을 하며 실제적 사역은 성도들이 하는 것입니다. 간혹 교회의 일은 목사가 하고 우리는 세상에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역의 모든 주체는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섬김의 일들을 목회자가 아닌 성도가, 평신도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를 온전하게 함으로 그들이 무장되어 일꾼으로 세워져 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수동적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은사와 재능들을 사역의 장을 열고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봉사는 교회를 돕는다는 개념이 아니라 각자가 마땅히 있어야 할 그 자리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양이라는 것은 성도들의 잠재력을 계발시켜 주는 것입니다. 잠재력을 개발시켜주고 그 분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하게 만드는 교통정리를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는 목사님께서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하는데 그러면 성도가 해야 할 일을 가로채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봉사를 하게 하려면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일은 훈련사역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훈련사역은 목사가 말씀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려다 보면 귀찮게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목사님. 간섭하지 마세요!” “편안하게 다니도록 내버려 두세요!”라고 합니다. 사람의 본성은 편하게 내 방식대로 사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고자 하는 방식대로, 죄성에 이끌려가는 내 삶의 스타일을 고치려면 훈련이 필요합니다. 존 칼빈은 이것을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저는 훈련을 통해서 사람들이 변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훈련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훈련을 하려면 교회 안의 여러 프로그램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이 훈련을 통과하지 않으면 우리는 진정한 변화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 주일 예배만 드리고 끝나면 편합니다. 다양한 훈련 프로그램을 하라고 하면 못마땅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훈련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우리가 성도로 세워져 가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피가 되고 살이 되기까지 어려운 싸움을 벌여야 합니다.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마땅한 훈련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성도들 편에서 좀 더 강한 훈련을 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오히려 맞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다는 것이 쉬운 일도 간단한 일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복음의 씨앗이 심겨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자라간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또 자라가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마땅한 훈련을 받으며 영적으로 자라가게 될 때 한 사람 한 사람이 백의 몫, 천의 몫을 감당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목사가 목사의 일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성도가 영적으로 잘 자라도록 도와주고 성도들이 봉사의 일을 잘하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반드시 영적으로 자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적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목회자를 세우셨고 목회자가 말씀이라는 수단을 통해 성도들을 훈련시키고 온전케 하며 하나님 나라에 헌신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둘째, 성장은 공동체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성장은 결코 개인적인 문제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관계를 무시하면 안 됩니다. 신앙은 관계적입니다. 16절 말씀이 굉장히 귀중한 말씀입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몸 안에 있을 때 함께 자란다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자랄 수 없습니다. 성도들과의 관계 안에서 자란다는 것입니다. 내가 혼자 있으면 내 신앙이 좋은지 안 좋은지, 내 신앙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어떤 신앙생활이 좋은 신앙생활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자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속해 있을 때 신앙이 성장해 갑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왔던 모든 과정을 보면 그리스도의 몸 안에 속해 있을 때 서로가 연결되고 결합되어 주고받는 관계 안에서 우리의 신앙이 자라왔습니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붙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고 받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깊이 연결되었고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줄 것이 있는 관계가 맺어져 있습니다. 누구나 상대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전할 말씀을 준비합니다. 성숙한 신자가 이제 막 신앙을 시작한 사람에게 줄 선물이 있습니다. 어떤 고통을 겪으며 믿음으로 지나온 성도는 이제 막 고통을 당하고 있는 성도를 도울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부분은 가지고 있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이제 막 갓 태어난 성도들을 도우며 영적으로 자라가게 됩니다. 서로가 유기적인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장애인들을 비장애인이 섬기는 것을 통하여 주는 은혜가 큽니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것이 삶에 영향을 줍니다. 장애인 역시 비장애인의 도움을 받으며 서로 연결되어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소그룹 안에 들어가야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로 친다면 사랑방입니다. 사랑방 안에 들어가면 위로가 있습니다. 대예배에서는 누군가 나를 위로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있지만 누구도 내 마음을 알아줄 방법이 없습니다. 주일에 예배는 공적으로 모이는 것이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소그룹, 사랑방 안에서입니다. 이곳에 가야 그리스도의 생명의 힘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대예배에서는 내가 어떤 고통 속에 있는지. 죽는지 어떠한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대예배는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되는 시간입니다. 수평적으로 성도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소그룹입니다. 사랑방 안에 들어가야 교회라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그 관계 안에서 신앙이 성장하게 되고 그 관계 안에 놀라운 비밀들이 숨어 있습니다. 가끔 정신적, 영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공동체를 기피하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공동체의 위력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관점에서의 생명체로서의 교회를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곳은 소그룹, 사랑방입니다. 사랑방 안에 들어가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어마어마한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랑방 안에서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작은 공동체가 아니면 소속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소속감이 없으면 안정감이 없습니다.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없기 때문에 언제든지 분리가 가능합니다. 주일에 한 번 예배를 드리고 그 이상의 어떤 것에 연결되지 않았다면 잠재적으로 교회를 떠날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소속감도 없고, 부담 없이 다니기 때문에 부담 없이 떠날 수도 있습니다. 손, 발, 배. 모두 몸인데 하나하나 떨어져 있으면 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몸에 붙어 있을 때만 몸입니다. 몸에 있다는 경험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소그룹입니다. 한 사람으로는 너무 불안정하고 부족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신뢰가 많이 깨어져 버린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디에서도 참된 사람을 느끼거나 서로를 깊이 신뢰하고 살아갈 환경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소외감을 많이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서적으로 황폐해져 가고 첨단사회가 될수록 더욱 소외되고 있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커지면서 부를 가진 사람은 부를 가진 사람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격리되어 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우울증과 자살률이 높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극단적 개인주의가 커져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공동체 의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아이디어는 공동체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완벽하게 주신 환경이 공동체입니다. 아담과 하와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공동체의 시초입니다. 그런데 죄로 인하여 이 공동체가 깨어졌습니다. 공동체가 깨어지면서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가 깨어지고 아담과 하와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이 공동체가 깨어진 것이 재앙입니다. 이 관계의 깨어짐에 대한 불행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아이디어 두 가지가 가정과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가정보다 더 중요한 것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라는 그리스도의 몸이 살아 있으면 개인적 가정이 어려움이나 위기를 갖고 있어도 건강한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 소속되어 있는 가정이라면 위기라고 해도 언젠가 회복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이 가지는 힘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모인 곳은 그냥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이 몸 안에는 성령이 움직이시고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생명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것은 신적인 통치가 일어나고 있는 곳입니다. 이 안에는 신비한 힘이 역학적으로 일어나고 있는데 이 안에 들어가면 연약함과 문제투성이가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처음부터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죄성을 가지고 있고, 전혀 다른 사람이 모여 있기에 위험한 출발이지만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들어가 서로 노력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점점 몸이 성장함으로 그 안에 성장한 사람들이 건강하게 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입니다. 이것보다 더 나은 선물을 주실 수 없습니다. 바울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을 주셔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안에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실 때 다양하게 일하시지만 공동체 안 관계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공동체 관계 안에서 경험하게 하십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 곳곳에서도 가족 이상의 그리스도의 몸의 생명을 서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냥 교회를 다니시는 분은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담스럽고 까다롭긴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동체를 통하여 당신의 축복을 흘려보내기를 원하십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나 홀로는 불가능합니다. 상처를 받을 수도 있지만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공동체 안에 들어가 서로 연결되어 신앙생활을 할 때 그 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의 신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교회 사랑방은 가장 작은 단위의 세포입니다. 이 세포조직이 건강하게 살고, 건강하게 산세포가 모인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됩니다. 사랑방활성화 캠페인은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본질적인 사역이고 교회의 건강성을 회복하는, 너무나 중요한 교회 생사가 달려있습니다. 개인으로는 사느냐 죽느냐, 개인의 신앙이 자랄 것이냐 멈출 것이냐가 달려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 사랑방 안에 깊이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섬기는 일에 앞장서셔서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영적으로 자라가고 풍성해지고 강력해져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다음세대까지 건강하게 물려주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방들이 강력하게 활성화되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서로 연결되어 생명을 주고받는 건강한 몸이 되어 다음세대까지 책임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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