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5:7-11 인내하면 됩니다 /조상호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유머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전날 밤 남편이 연극을 보고 온 것을 알고 있는 아내가 물었습니다. “여보, 어제 본 연극 재미있었어요?” “1막만 보고 왔어.“ ”왜요?“ ”1막을 마치고 2막이 시작되려고 하는데, 아 글쎄 ‘2년 후’라는 글자가 나오지 않겠어? 내가 어떻게 2년을 기다릴 수 있어? 그래서 연극을 다 보지 않고 중간에 나와 버렸어.“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기질 가운데 가장 큰 단점을 꼽는다면, 무슨 일이든지 참지 못하고 급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국 사람들 가운데 한국인을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글에서 한국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을 읽은 적이 있는데, 어떻게 한국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지 아십니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가운데, 참지 못하고 안절부절 하는 사람은 대부분 한국인이라고 합니다. 이 주장에 동의하든지 동의하지 않든지 분명한 것은 이곳 뉴질랜드 관광지에서 일하는 키위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은 “빨리빨리”라는 말입니다. 지난 번 휴가 때, 어느 곳을 갔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현지인 직원이 저희 가족을 보고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우리가 한국 사람인지 어떻게 알았지?”라는 생각과 함께 “누가 가르쳐주었는지 모르지만, 한국말 제대로 배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직원의 다음 말을 듣고 기분이 이상해졌습니다. 그 직원이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빨리빨리” 한국 관광객이 많이 가는 곳에서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한국말은 “빨리빨리” 라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항상 “빨리빨리”를 외칩니다. 음식을 시켜도 “빨리빨리”, 줄을 서도 “빨리빨리”, 버스를 타도 “빨리빨리”, 배를 타도 “빨리빨리”를 외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부족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인내입니다. 이런 조급증이 신앙생활에서도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너무 인내가 부족한 것을 느끼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는 인내가 부족합니다. 저에게 인내를 주십시오. 지금 ‘당장’ 인내를 주십시오.”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인내’입니다.

오늘은 <됩니다 시리즈> 네 번째로 ‘인내’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3주 전에 “사랑하면 됩니다” 2주 전에 “기뻐하면 됩니다” 지난주에 “화평케 하면 됩니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고, 오늘은 “인내하면 됩니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따라서 하시겠습니다. “인내하면 됩니다”

오늘 본문은 다섯 절밖에 되지 않지만, 이 다섯 절 안에 ‘인내’라는 말이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물론 한국말 성경에서는 ‘길이 참으라’ ‘길이 참아’ ‘길이 참고 ’오래 참음’ ‘인내’ 등으로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만, 헬라어 원어로 보면 ‘마크로뒤미아’라는 단어와 ‘휘포모넨’라는 두 단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둘 다 ‘인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속에 담겨진 의미가 약간 다르기 때문에 구별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먼저 ‘마크로뒤미아’라는 단어는 '관계 안에서의 인내'를 뜻합니다. 예를 들어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고 고통을 참을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반면에 ‘휘포모넨’은 '환경 속에서의 인내'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사업에 부도가 났다든지, 대학시험에 떨어졌다든지, 몹쓸 병에 걸렸다든지 하는 환경 속에서도 참고 인내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서 기자는 그것이 관계로부터 오는 어려움이든지 환경으로부터 오는 어려움이든지,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내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인내의 열매를 맺기 위해 취해야 할 태도를 설명하면서 세 가지 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농부의 인내를 배우라

첫째로 인내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우리는 농부의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스피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일수록 기다림과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가정에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학교에서 시험을 치른 후 시험성적을 받아 왔는데, 딱 한 문제가 틀렸습니다. 그 아이의 엄마는 ‘도대체 어떤 문제를 틀렸나’ 살펴보았더니 “수박은 어느 계절의 과일인가요?”라는 문제였습니다. 아들이 ‘겨울’이라고 답을 적었기 때문에 틀렸던 것입니다. 엄마는 화가 나서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너 수박이 언제 나오는지도 모르니? 왜 겨울이라고 답을 적었니?” 그랬더니 아이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엄마, 우리 집 냉장고에는 겨울에도 수박이 있잖아”

옛날에는 계절마다 과일이 달랐습니다. 대표적인 과일을 뽑아보면, 봄에는 딸기, 여름에는 수박, 가을에는 사과, 겨울에 귤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비닐하우스를 이용하여 계절과 상관없이 사시사철 과일을 맛볼 수 있습니다. 봄에도 수박을 먹을 수 있고, 겨울에도 딸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조급증 때문입니다. 요즘에 사람들은 “빨리” 건축하기를 원하고, “빨리” 세우기를 원하고, “빨리” 찾기를 원하고, “빨리” 먹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기다림이 사라진 시대입니다. 참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늘 본문은 농부의 인내를 배우라고 말씀합니다. 다같이 7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전에 LA 로고스교회와 동양 선교교회에서 사역하셨던 강준민 목사님의 주장에 의하면 밀 2되를 심으면 67되를 거두고, 귀리 3되를 심으면 79되를 거두고, 옥수수 7.5되를 심으면 120되를 거둘 수 있다고 합니다. 또 감자 한 쪽을 심으면 60개의 감자를 얻을 수 있고, 벼 한 알을 심으면 140알 이상 거둘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심고 나서 하루아침에 거둘 수는 없습니다. 농부가 풍성한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인내하며 땀을 흘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벼 씨는 심겨지고 나서 무려 88번 이상의 손이 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든 여덟 번이나 되는 농부의 수고를 통해 한 알의 벼씨가 140알 이상의 쌀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농부에게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힘이 들고 고통스럽지만, 농부는 인내하며 뿌린 씨앗들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농부는 맛있고 탐스럽고 귀하고 소중한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중국의 ‘모소’라는 대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중국 동부의 한 농부가 자신의 농장에 대나무를 심고 기다렸습니다. 1년이 지났지만 아무 것도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2년이 지났을 때에도 역시 아무 것도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3년이 지나도, 4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5년 째 되었을 때 대나무 싹들이 지면을 뚫고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하루에 한 자가 넘게 자랐습니다. 불과 싹이 올라온 후 여섯 주 만에 대나무들은 무려 15미터 이상씩 커졌습니다. 농부는 그 대나무를 자른 후 내다 팔아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모소’라는 대나무가 6주 만에 15미터나 자란 이유를 아십니까? 이 대나무는 싹을 내기 전에 땅속에 있는 뿌리가 사방 수십 미터까지 뻗어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단 싹을 내면 뿌리에서 보내주는 엄청난 양의 자양분 덕분에 순식간에 키가 자라는 것입니다. 가정이지만 만약 농부가 그 ‘모소’라는 대나무를 심고 나서 4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리지 못했다면, 결코 부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기다렸기 때문에 땅에 심은 대나무가 15미터까지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을 대다 팔아 부자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갈라디아서 6장 7절에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업신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두게 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모소’라는 대나무를 심고 기다린 농부처럼 끝까지 참고 기다리면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거두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풍성한 열매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농부의 인내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풍성한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농부처럼 끝까지 인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내하면 됩니다.

 

2) 선지자의 인내를 배우라

둘째로 인내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우리는 선지자의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화나 소설을 보면 공통적으로 착한 사람이 악한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우리 나라의 ‘콩쥐팥쥐 이야기’나 서양의 ‘신데렐라 이야기’나 ‘백설공주’와 같은 동화를 봐도 이상하게 착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데도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악한 마귀 때문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방법으로 믿는 성도들을 핍박을 합니다. 이것은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믿음의 선배들이나 선지자들의 삶을 보아도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선지자들이 고난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구약의 예레미야 선지자는 감옥에 수도 없이 들어갔으며 심지어는 산채로 구덩이에 던져지기까지 했습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나라 잃고 어릴 때부터 이방 땅에서 살고, 나중에는 사자 굴에 던져지기까지 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뼈가 썩는 것 같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에스더는 하만의 음모 때문에 이방 땅에 끌려간 다른 동족들과 함께 몰살당할 뻔 했습니다. 또 신약의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사도 바울은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길 만큼 큰 고난을 당했습니다. 이 외에도 히브리서 11장 36절 이하에 보면,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과 선지자들이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큰 고난을 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11:36~38) 이처럼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과 선지자들이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인내했습니다. 다같이 10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선지자들은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인내했습니다. 야고보 기자는 고난 가운데서도 오래 참았던 선지자들을 모델로 삼으라고 합니다. 사명을 위해 일하다가 고난을 당할 때, 끝까지 인내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명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오히려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5:10)고 말씀하셨고, 또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13)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난을 끝까지 견딜 때 구원을 얻으며 영광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을 일부러 자초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사명을 위해 당하는 고난은 오히려 우리에게 복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선지자들과 믿음의 선배들처럼 우리는 고난을 끝까지 잘 견뎌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옛날 학교 다닐 때 암송하던 시인데, <프쉬킨의 시> 가운데 이런 시가 있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아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니”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고난의 터널 속을 가고 있다 힐지라도, 믿음으로 인내하면 길고긴 고난의 터널을 빠져나오게 될 것입니다. 고난을 끝까지 참고 견디면 분명히 즐거운 날이 오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조금만 더 견디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기대하며 믿음으로 인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내하면 됩니다.

 

3) 욥의 인내를 배우라

셋째로 인내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우리는 욥의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앞서서 소개한 농부는 자기 일을 위해서, 즉 자기가 거두게 될 열매를 위해서 참고 기다립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인내합니다. 그러나 욥의 인내는 농부의 인내나 선지자들의 인내와 약간 다릅니다. 여러분, 무엇 때문에 욥이 고난을 당했습니까? 욥이 범죄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아내와 자녀 때문에 고난을 당했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욥은 하나님 때문에 고난을 당했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하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너 욥을 본 적이 있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나를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말씀하시며 욥을 자랑하십니다. 그러자 사단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많은 재물을 주셨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지, 만약 하나님께서 욥에게 주셨던 것을 다 빼앗아 보십시오. 욥은 단번에 하나님을 원망할 것입니다.“라고 반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욥의 몸을 제외한 그의 모든 것에 손을 댈 수 있도록 허락하십니다. 마침내 사단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하루에 10명의 자녀들이 다 죽임을 당하고, 수많은 소와 나귀와 양과 낙타 등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립니다. 이쯤 되면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하나님, 하필이면 저입니까?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억울합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먹고 삽니까?“ 등의 말을 하며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욥기 1장 20절부터 23절을 보면, 욥은 우리의 예상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야훼시요 취하신 자도 야훼시오니 야훼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여러분 욥이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그는 땅에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사단의 1차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하나님께 허락을 받아 이번에는 욥의 몸을 공격합니다. 욥은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어야 할 만큼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서 고생을 하게 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랑하는 아내마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저주를 퍼부어댄 후 떠나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끝내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믿었던 친구들마저 위로한답시고 찾아와서는 오히려 맹렬한 비난을 퍼부어 댔습니다. “너에게 분명히 죄가 있으니까 하나님이 너를 벌한 것이다. 이유 없이 네가 이런 고통을 당할 리가 없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하나님께 회개해라” 그래도 욥은 여전히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하거나 원망치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를 찬송했습니다.

이처럼 욥은 끝까지 인내하고 또 인내했습니다. 누구 때문에 인내했습니까? 하나님 때문에 인내했습니다. 야고보 기자는 이 욥의 인내를 배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11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욥기 4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빼앗긴 것의 두 배를 욥에게 다시 주셨습니다. 욥은 양 14,000마리, 낙타가 6,000마리, 소가 1,000마리, 암나귀가 1,000마리, 등을 소유하게 되었고, 아들 일곱과 딸 셋도 얻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참고 인내하는 것이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인내하면 하나님께서 은혜와 복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어려서부터 보석 감정사가 되는 게 꿈이었던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보석 감정사를 찾아가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늙은 보석 감정사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보석 감정 기술을 배우려면 인내심과 끈기가 가장 필요한데, 젊은 사람에겐 그런 것이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청년은 자신이 충분한 소질과 열정을 갖고 있으니 한 번만이라도 기회를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끈덕지게 매달리는 그 청년을 본 그 보석 감정사는 그 청년에게 내일 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청년이 찾아오자 보석 감정사는 손바닥에 작은 보석 하나를 올려 주며 “의자에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이 보석을 보고 있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흘러갔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도 보석감정사는 청년의 손에 어제의 보석을 쥐어 주며 의자에 앉아 있으라고 했습니다. 셋째날도, 넷째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그 청년은 일주일 동안 보석을 보고 있었지만 더 이상 침묵할 수가 없었습니다. “스승님, 전 언제부터 기술을 배우게 됩니까?” 그러나 보석 감정사는 무뚝뚝하게 대답했습니다. “곧 배우게 될 거야.” 그리고 더 이상의 말도 없이 자신의 일만 계속했습니다. 마침내 열흘이 지났을 때 청년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차라리 다른 감정사를 찾아가는 것이 낫지 이런 식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보석 감정사가 똑같은 보석을 쥐어 주며 의자에 앉아 있으라고 지시하면, 청년은 보석을 집어 던지며 이렇게 외치려고 했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날 골탕 먹일 셈인가요?’ 그런데 청년이 보석을 집어던지려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어제까지 제가 보고 있던 그 보석이 아니잖아요!” 그러자 늙은 보석감정사가 말했습니다. “이제야 조금씩 배우기 시작하는군.”

기회는 끝까지 기다리는 자에게 찾아옵니다. 참고 기다리는 사람이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무슨 일을 만나든지 오래 참으시기 바랍니다. 욥처럼 길이 참고 인내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내하는 사람을 인정하시고, 복된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에 실린 한 시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나는 믿노라 해가 비치지 않더라도 해가 있다는 것을.
(I believe in the sun even when it is not shining)

나는 믿노라 사랑을 느낄 수 없을 때라도 사랑이 있다는 것을.
(I believe in love even when I'm feeling it not)

나는 믿노라 하나님께서 침묵하실지라도 그 분이 계시다는 것을.
(I believe in God even when he is silent)“

이 글은 2차 대전 때 유대인 포로수용소 벽에 적혀 있던 글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수용소 안에 있던 한 유대인이 나치의 눈을 피해 적어놓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희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렸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하고 포기하려고 하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가정 안에서 고난이 너무 힘들어, 학업이 너무 힘들어, 사업이 너무 힘들어, 직장생활이 너무 힘들어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하고 포기하려고 하는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풍성한 열매를 기다리는 농부처럼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선지자들처럼 끝까지 고난을 견디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욥처럼 믿음 잃지 말고 끝까지 인내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www.imr.co.kr/sris/%EC%8B%A0%EC%95%99%EC%83%9D%ED%99%9C/%EB%90%A9%EB%8B%88%EB%8B%A4/%EC%9D%B8%EB%82%B4%ED%95%98%EB%A9%B4%20%EB%90%A9%EB%8B%88%EB%8B%A4.htm

 

약5:7-11 인내하면 됩니다 /조상호 약5:7-11 인내하면 됩니다 /조상호 Reviewed by □□□ on April 26, 2024 Rating: 5
Powered by Blog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