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기쁨’이라는 제목입니다. 조금 전에 우리가 불렀던 찬송도 우리가 주안에서의 기쁨을 고백한 찬송입니다만은 주님과 함께 신앙의 길을 가는 여러분들의 그 길이 언제나 평안하거나 형통하지는 않을지라도 내게 기쁨이 여전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확신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요한일서에 이은 요한이서는 내용과 배경이 요한일서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중 한 장으로 되어있는 아주 짧지만 그러나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 담겨져 있는데, 그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이단 사상이나 부도덕한 생활을 경계하지 않고 방종으로 이끌어가는 적그리스도의 미혹을 막기 위하여 이 서신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1절에 보면, 발신자가 장로요, 수신자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라"
그런데 발신자인 장로가 누구일까 하는 부분은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전통적인 해석은 사도 요한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해석을 지지합니다. 뿐만아니라 '장로'라는 명칭의 의미와 역할에 있어서는 지금 시대의 장로와는 의미와 범위가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요즘 같으면 목사와 장로의 사역과 권위를 통합한 대단히 폭넓은 의미에서의 직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편지를 받는 사람을 분명하게 지칭하면서 1절에서 3절까지 인사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인사말 속에는 전형적인 사도 요한의 언어가 담겨져 있는데 이것은 그의 인격과 생활, 그리고 목회적 삶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러분들도 편지를 쓰실 때면 나름대로의 틀, 어떤 형식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편지를 쓸때면 나름대로의 폼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경원 집사님에게 제가 편지를 쓴다면 이렇게 시작할 것입니다. "주 안에서 동역자 된 나경원 집사님께..." 편지의 첫 인사말은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전제입니다. 첫 마디 문장만 보아도 마음이 푸근해져 기분이 상승하거나 혹은 다운될 수도 있음은 인사말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언어 속에는 그가 평소 잘 사용하는 단어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 진리, 지식, 거함.... 이런 단어들은 전형적인 사도 요한의 언어들입니다. 이런 언어들을 통해서 사도 요한은 교회 일치에 대한 깊은 확신을 전달하려고 힘쓰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언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속성이나 인격 혹은 그 사람의 지식의 수준이나 신앙적인 관심까지도 잘 대변해 주기 때문입니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저 분은 오늘 아침에 싸우고 나왔구나...’ ‘저 분은 예배를 통하여 큰 은혜를 받고 싶은 기대와 감격 속에 나왔구나...’ ‘저 사람은 오늘 별로 오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체면상 눈도장 찍으러 나왔구나....’ 얼굴 속에 마음의 생각이 담겨져 있으니 얼나나 재미있습니까? 다 담겨져 있어요! 슬픔과 기쁨이 표현되고 기대와 실망이 표현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모함과 지루함도 표현이 됩니다. 더구나 얼굴 속에는 마음의 창이라고 하는 눈이 있어 더욱 분명히 그 사람의 내면을 깊숙히 들여다 볼 수 있기에 마치 거울을 들여다 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어떤 분은 설교 시간만 되면 성경을 읽습니다. 설교와 성경읽기, 이는 굉장히 가까운 일 같은데 사실은 천국과 지옥처럼 거리가 먼 상황입니다. 말씀을 들어야 할 시간에 설교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책"에 눈길을 주는 행위는 마치 "당신은 떠들어라. 나는 관심없다"는 메세지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예배에서의 태도란 바로 내 마음을 하나님께 진솔히 표현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말씀은 사모하는데 눈은 성경을 본다는 말은 억지일 뿐입니다.
우리의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하여 마음의 상태, 신앙의 상태, 관심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가름하기에 언어는 상대방을 이해하는 척도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사도 요한의 언어를 보면, 그의 언어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되는 일을 위해서 그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지식을 이야기하고 예수 안에 거해야 함을 이야기 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의 키워드는 "진리"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6절 가운데서 "진리"라는 단어를 우리가 잘 붙들어야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이 성경말씀의 의도가 뭔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주님은 바른 이해를 위하여 자주 비유를 들기도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중심적인 단어는 진리입니다. 2절과 4절에서 사도 요한은 진리에 대한 그 의미를 잘 구별해 놓았습니다. 먼저 2절을 보면 진리의 2가지 내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할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 진리가 바로 우리와 함께 할 진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진리일지라도 그것이 나와 상관이 없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성령이 능력이요 권세라고 한들 그 성령이 나와 상관이 없다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령 충만함이란, 나의 배우자의 충만함이요, 교회 공동체의 충만함일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충만함이 될 때 비로소 주님과 하나됨을 맛 볼 줄로 믿습니다.
진리는 또 다시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상대적인 진리란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혹은 환경이 달라짐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예를 들어서 73년도 대학입학시험의 국사문제에서 우리 나라 구석기시대는 언제인가? 라는 문제가 나왔다면 ① 3만 년 전 ② 4만 년 전 ③ 5만 년 전 ④ 6만 년 전이라는 문항 중에 3만 년 전이라는 항을 선택해야 컴퓨터는 맞다고 응답을 합니다. 그것이 73년도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저는 최근에 새로운 뉴스를 들었습니다. 지난 12일에 충청북도 진천면 송두리라고 하는 마을에서 도로공사를 하던 중에 구석기 유물을 발견했는데, 주먹도끼, 주먹대패와 같은 유물을 무려 80여점이나 발견을 했다고 문화재청에서 발표하면서, 출토지층을 조사한 결과 5만 년 전 구석기 시대 유물이라며 우리나라 구석기 시대의 연대를 새로 써야한다며 흥분하였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제까지 알고있던 우리나라의 구석기 시대의 연대가 수정되어야한다는 말입니다. 내년도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학생들은 이번에 발표된 것을 근거로 해서 답을 써야 됩니다. 이는 학문이란 새로운 발견과 발명에 의해서 가치나 기준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빌라도에게 고소를 당해서 빌라도 법정에 서셨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직접 심문합니다. ‘니가 유대인의 왕이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두 번째 빌라도가 묻습니다. ‘사람들이 니가 진리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진리란 무엇이냐?’ 빌라도가 예수님을 향해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빌라도는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입니다. 당시에 헬라 철학을 그대로 인수한 로마 제국, 로마 제국에서 로마의 군사, 특히 로마의 장교가 된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영광입니다. 최고의 학문을 겸비한 사람들입니다. 그가 진리를 모를 까닭이 없습니다. 주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철학적 관심 때문이 아니지요.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지금 빌라도가 예수님을 향해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학문적 관심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지요.
지금 빌라도 머릿속에 진리라고 하는 개념은 지금 시대가 로마 제국 시대가 아니냐? 다시 말하면 로마 제국처럼 힘을 가지고 지배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냐? 그런데 지금 네가 나한테 고소당해서 죄인의 몸으로 내게 와 있는 주제에 무슨 진리 타령이냐? 그 이야기지요. 그런데 그를 향해서 우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얼마나 당당하신지 모릅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절대적인 진리는 세월이 변해도 우리의 환경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인 줄 믿습니다.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는 과거나 오늘이나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진리에 대한 확신은 이래야 합니다.
그 진리를 알 뿐만 아니라 이제 그 진리를 행한다 함을 들으니 내가 기쁘도다.
목회자의 기쁨은 이것입니다.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살 때, 성도들이 말씀 안에서 살 때,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과 제도 속에서도 주의 자녀로써, 그리스도의 자녀로써 살려고 몸부림 치는 모습을 볼 때 기쁨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6절에서는 진리에 대한 기쁨을 실천하고 있는 성도들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수신자인 택하심을 입은 부녀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정의를 하시면서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는 이 계명을 쫓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을 수 있지요? 대답합니다.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결국 계명과 사랑이란 하나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 그것이 계명을 지키는 일이요,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요, 그것이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의 계명 안에서 행하는 것인데, 그것은 마치 예수께서 행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행하는 것, 주님이 모델이 되고, 주님이 모범이 되어서 그 주님을 따라서 사는 것, 그것이 사랑이요, 그것이 사랑을 지키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을 바라보시면서 기뻐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스바냐서는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기쁨을 이기지를 못하신다. 왜? 잘 하고 있기 때문에...... 견디기 힘든 환경 속에서, 견디기 어려운 시련 속에서 주님의 말씀, 주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생명을 거는 이들을 보면서 주님은 그 기쁨을 이기지 못 하신다. 찬송합니다. 고백합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사랑하는 성도의 삶이 언제나 진리 안에서 행하는 기쁨 안에서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주님의 기쁨 되기 위해서 어떤 삶의 환경과 조건이 여러분들에게 다가와도 주님을 향한 그 삶, 기쁨이 되기를 원하는 여러분의 삶의 목표와 그 의지가 꺾이지 아니하고, 진리 안에서의 기쁨의 삶이 늘 여러분들을 통해서 표현되고 증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세상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어도, 진리이신 주님이 변할 수 없듯이 우리 역시 주님을 바라보며 진리 안에서 행하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위하여 오늘도 주님의 자녀로써, 주님의 계명을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행하기를 원합니다. 실천적인 삶, 구체적으로 행하는 평안의 성도들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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