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6:13-7:24 방주에 있던 자만 /이장우

현대인들은 과학적인 사고방식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설명되어야 진리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 홍수도 과학적으로 입증하면 사람들이 믿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서 방주의 파편을 찾는다든지, 방주를 실제 크기로 만들어 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방주를 만든 사람이 있었는데 네덜란드의 쟌센이라는 사람이 성경의 규빗을 환산하여 방주를 만들었는데 길이가 137m, 폭이 23m, 높이가 14m로 나오는데 톤수로는 약 32.000-35.000톤까지 실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배의 모양이 상자처럼 생기고 3층이니까 똑 같은 배보다 1/3을 더 실을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하워드 오스굳이라는 박사는 이 방주 안에 2,400종의 포유동물, 1만 종의 조류, 1천 종의 사류, 1250종의 도마뱀류, 10만 종의 곤충류와 1년간 먹을 양식을 실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설명하여 주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저도 군에 있을 때 노아 방주에 대한 특강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성지공전 조선공학 교수라는 분이 노아 방주에 대하여 상세하게 과학적으로 설명을 하였습니다. 요즈음도 사람이 손으로 나무를 사용하여 배를 만드는 사람의 하루 작업 분량이 있답니다. 그러므로 그 작업분량을 계산하여 노아 가족 남자 4명 곱하기 120년에서 안식일 빼면 정확한 배의 톤수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 첨단 과학으로 계산해 보면 폭풍우에 가장 잘 견딜 수 있는 배가 이 정도의 크기이며, 모든 짐승의 무게와 사람이 함께 일 년간 먹을 양식을 계산하니 조금 남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왜일까 하고 생각해보니 배 안에서는 활동이 거의 없고 또 배가 울렁거리니 육지에서의 절반 정도만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무게를 빼니 정확하게 노아 방주의 만든 기간, 톤 수, 먹을 양식까지 정확하게 계산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방주안에 있었던 기간은 1년 하고 17일 이지요. (7장 10-11, 8:13-14)

이정도로 노아 방주의 정확한 재원을 설명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한국의 창조과학회 하는 분들이 이런 일을 통하여 성경을 증명하고자 하는데 그렇게 하여 성경이 증명된다고 하여도 예수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특강을 듣고 나서 한 사람에게 믿을 수 있겠느냐고 물어 보니 이 사람이 바닷가 출신이라 직접 배를 가지고 있던 사람인데 뭐라고 하는가 하면 배의 가장 중요한 연결하는 핀이 그 정도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겠느냐고 합디다. 상자처럼 지어졌다고 말한다 해도 그렇게 반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말씀을 역사적인 증거와 고고학적인 증거를 통하여 믿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처녀가 아이를 어떻게 낳습니까? 다 웃을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고 말합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였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과학이라는 범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과학적인 싸움을 싸우는 것 자체가 믿음의 세계를 이해 못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과학적으로 창조가 아니라 진화가 맞다고 온 세계 과학자들이 다 들고 나와도 우리는 아니야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창조나, 노아 홍수, 다른 기적들을 그런 관점에서 싸우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예수를 믿고서 과학자가 되었는데 과학자된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하는 일에 보탬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그런 일을 합니다만,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게 되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노아 홍수를 통하여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언약을 하셨고 그 언약을 어떻게 실현하시는가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언약의 책이라고 구약 신약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볼 때 노아 방주의 크기나, 그 많은 물이 어디에서 나왔느냐의 관심보다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노아 언약이 무엇인지 찾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노아의 이름이 무슨 뜻입니까? 5:39에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심으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식을 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에게서 안식의 사건이 나올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안식이 어떻게 주어집니까? 하나님의 안식이 주어지기 위하여서 세상의 죄악이 관영한 것을 청소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안에서 쉴 때도 청소가 되어 있어야 쉬어도 편하게 쉴 수 있지요.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세상에 죄악이 관영한 것을 청소하셔야 쉬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홍수라는 커다란 빗자루로 쓸어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사람들이 속속들이 썩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13절에 보면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멸하는 순간에도,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노아에게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시는데 17절에서 18절을 봅시다. “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세우시는데 그 언약을 내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니 하나님께서 이루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 명하신 대로 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 않은 자는 120년 동안 증거하여도 아무도 방주 안으로 들어오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였다는 말씀이 베드로후서 2:5에 나타납니다. “5.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라고 말씀합니다. 노아가 120년간 방주를 만드는 그 행위가 의를 전파하는 것이 됩니다. 배를 만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과정을 증거 하는데도 단 한사람도 그 증거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죄악이 관영하였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오늘 이 시대도 꼭 같습니다. 지금 이 세상이 불살라 없어 질 것이라고 말씀은 증거하고 있지만 그것을 믿는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야 원래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성경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다면서 우리는 종말에 대하여 생각을 안하는 것입니다. 금요일 성경공부 하고 나서 교회의 교회됨이 무엇인가를 질문하셨는데 교회란 떠날 준비를 하고 사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이런 자세로 살면 틀림없이 세상 사람과 구별되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땅에서만 태어났기에 땅의 일만 생각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위로부터 났기에 위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에 관심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노아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주업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방주를 만드는 일입니다. 부업은 먹고 사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시하신 그대로 방주를 만드는 것입니다. 6:22을 봅시다. “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자신의 비젼과 꿈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시 하신대로입니다. 방주를 만들었는데 방향키도 없습니다. 돛대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키신 대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방향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가는 것입니다.


드디어 방주가 완성되었습니다. 짐승들이 스스로 방주로 나아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명하셨기에 그렇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주에 들어가고 일주일 후에 홍수가 40일을 쏟아집니다. 땅에서는 샘들이 터져 나옵니다. 주야로 40일을 땅에 쏟아지니 온 땅에 물이 가득합니다. 가장 높은 산위 십오 규빗까지 물이 차 올랐습니다. 그리고 150일 동안 물이 땅에 가득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대로 땅위의 호흡있는 것을 다 끊어 버리셨습니다.

23절을 봅시다. “23.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방주에 있던 자만” 이것이 언약의 무서운 면입니다. 방주 밖 즉 언약밖에 있던 모든 것은 다 멸절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언약 안에 있습니까? 언약 밖에 있습니까? 언약 안에 있는 자란 나의 계획과 야망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언약을 따라 살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사람의 관심은 하나님의 언약에 늘 초점을 맞추고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삽니까? 베드로후서 3:1-14입니다. “1.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2.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말세에 종말이 없다는 자들이 나와서 조롱하는 것입니다. 말세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지요. 이런 자들은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과 물의 넘침으로 멸망당한 것을 부러 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동일한 말씀, 물로 심판하신 그 동일한 말씀이 이제 불 사르기 위하여 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주님의 재림을 약속 하셨기에 그 약속을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의 자세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십니까? 없어질 것이 아닌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십니까? 이것이 종말을 사는 우리의 삶의 자세입니다.

그렇다고 될 대로 대라는 식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일어나는 수많은 천재지변을 보면서도 우리는 동요하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지 그러한 천재지변에 허둥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처처에 지진과 기근과 난리에 난리의 소문이 나리라는 말씀은, 이런 세상에 기대를 하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는 사인으로 받는 것입니다. 지진을 조사하고 천재 지변을 조사하는 식이 아니라 잠잠히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입니다.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은 모든 소망이 거기에 있으므로 세상의 어떤 것에 대한 기대가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에 대하여 바라는 것을 소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사람의 욕망이 따를 뿐입니다.(주보의 인사말)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에서 믿음, 소망, 사랑이 바르게 피어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은 사람의 집념으로 보이고, 소망은 욕망으로 드러나게 되고, 사랑은 애정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 것을 바라고 살아가는 한 이런 면을 벗어 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는 삶은 세상에 안주한 삶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 노아 홍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관심이 주님의 약속에 있어야함을 알았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약속은 다시 오마 하신 약속입니다. 이 약속안에서 주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사시는 성도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방주안에 있는 자만 살았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만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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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6:13-7:24 방주에 있던 자만 /이장우 창6:13-7:24 방주에 있던 자만 /이장우 Reviewed by □□□ on May 26, 2024 Rating: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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