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1:27-12:9 이끄시는 하나님 /노경모

1. 서론

노아의 홍수로 인해 이 세상이 물로 다 멸망한 것처럼 보이고, 이제는 도저히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염려가 되는 상황인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약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는 셈의 후손입니다.(11:10) 그는 아브람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하란에서 불러내신 것 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4). 그러나 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셨음을 행7:2-4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는 자기의 둘째 아들 나홀과, 자기보다 먼저 갈대아 우르에서 죽은 셋째 아들 하란을 제외한, 큰 아들 아브라함과 자부 사래와 죽은 하란의 아들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먼 여정 끝에 하란에 도착하였습니다. 분명히 가나안 땅을 향해 갈대아 우르를 떠났는데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아니하고 일행들은 하란 땅에서 머물고 맙니다. 얼마의 세월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이들은 안주해 버리고 맙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하란에서 죽고 맙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거기를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떠납니다. 이렇게 구원사의 환 획을 긋는 아브라함의 사건이 12장에서 시작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유심히 살펴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기를 바랍니다.


2. 본론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을 대할 때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해서만 초첨을 맞추고 있는 경향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무조건 순종하여 나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히11:8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의 기록의 목적과 관점을 알아야만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의 실제적인 행동과 히11장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그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하고 있는 것들과의 괴리를 메꿀 수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조금 있다가 이야기 하도록 합시다.

창11:31에 보면 데라가 가족들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2:5에도 아브라함이 그 가족들과 소유를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하란을 떠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데라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에 하나님께서 최종 목적지가 가나안 땅임을 보여주셨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행7:2의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보일 땅 즉 가나안땅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창11:31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창12:1에서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 명령은 아브라함이 두 번째 받은 명령입니다. 첫 번째는 갈대아 우르에서 맏은 명령이요, 이번에는 하란에서 받은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이 가나안 땅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을 때 다시 확인 할 필요없이 말씀을 좇아(4) 가나안 땅을 향해, 식구들과 소유를 이끌고 하란을 떠났던 것입니다.(5)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이 보여 주시고 지시한 가나안 땅으로 들어 갔던 것입니다.(5)

그렇다면 히11:8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라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왜 하필이면 '갈 지명을 어딘지 모르고 떠났다.'라고 생각을 하고 싶습니까? 히11장이 믿음의 장으로서 선인들의 믿음을 칭찬한 본문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에 좀 더 큰 점수를 주고 싶은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까?

우리는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갔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지만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나서 거기에서만 살아온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이 어디인지 어떤 곳인지 알 리가 만무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러한 상황속에서 갈대아 우르를 떠났던 것입니다.

과연 얼마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알고 떠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깊은 신앙심을 갖고 떠났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가나안 땅으로 가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하란 땅레 주저 앉아 있는, 어쩌면 계속 눌러 앉아 있으려고 하는 장본인이 아브라함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 고향을 떠나도록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오, 그리고 떠날 수 있는 마음, 즉 믿음을 선물로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놓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떠났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살펴 보려는 선입관념과 욕망을 지그시 누르고 하나님을 살펴 보는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어쩌면 이 본문은 믿음과 순종을 설교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보다, 아브라함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살펴보는 즉 하나님을 주인공으로 삼는 접근이 이 본문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며, 이 본문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찾는 길인 것입니다.


첫째로, 본문을 통해서 명령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1-3)

떠나 가라는 것입니다. 왜 떠나라고 말씀하십니까? 왜 가라고 명령하십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으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복을 주어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해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주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리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생각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귀중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왜냐고요?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을 받을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손해를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명령을 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떠나야 합니다. 우상의 소굴인 갈대아 땅을 떠나야만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떠나시게 만드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떠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이 즐비한 곳에서 우리는 떠나야 합니다. 안주하고 싶은 하란을 떠나게 만드셨던 하나님은 우리가 편안하게 안일하게 안주하기 쉬운 환경들을 따날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녀들이 세상의 죄악과 분리된 성결한 삶을 살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상급과 소명과 분깃이 분명합니다. 아나톨레의 비젼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내 것으로 취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가는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간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얼마 겁나고 두려웠겠습니까? 자기가 사는 경내를 벗어나면 적들이 있습니다.


(둘째로) 2. 자기의 뜻을 기필코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4-6)

갈대아 땅에서 아브라함을 끌어내신 하나님이, 하란 땅에서도 아브라함을 이끌어 내십니다. 가나안 땅으로 보내는 목적 즉 언약(2,3)을 분명하게 말씀시면서 가나안 땅으로 갈 것을 촉구하십니다. 그리고 드디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오늘의 본분 5절에서는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들어 갔더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의 동기가 어떻든지 간에 우리를 신학교로 불러 주신 분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목회를 길을 멋지게 가게 하실 것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로뎀 나무 밑의 엘리야처럼 낙심될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배 밑창의 요나처럼 피하고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의 길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11년전 이 양지동산에서 아나톨레를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엘리야처럼 낙심될 때도 많았고, 요나처럼 도망가고 싶을 때도 많았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하나님의 일이기에 하나님께서 집요하게 인도해 오셨습니다. 그 분은 앞으로도 이 아나톨레 끝까지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아나톨레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약속을 완전히 이루시기까지 하나님은 쉬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셋째로) 3. 자기의 백성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7-9)

드디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아브라함을 향해 바로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도장을 찍어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이제서야 하나님이 누구이신줄 알게 됩니다. 자기를 고향에서 떠나게 하시고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하신 하나님이 누구신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필코 자기의 뜻을 이루시고 약속을 성취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그는 이제야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습니다. 7,8절에 두 번이나 단을 쌓았다는 것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랜 세월의 여정에서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당신은 경배와 존귀를 받으셔야 하는 제사의 대상이 되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경배의 대상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우상의 소굴에서 아브라함을 끄집어내어 집요하게 가나안땅으로 이끄신 하나님께서 드디어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해 보여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한 부분 때문에 뒤로 물러가지 마십시오, 드디어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지 모릅니다.

아나톨레, 여러 가지로 부족해 보이는 부분이 많습니다. 화려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달콤한 매력도 없어 보입니다. '성경을 귀납적으로 연구하자!', '강해설교하자!' 라는 평범한 모토 외에는 뭐 내세울 강력한 표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나톨레를 아나톨레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아나톨레를 통해 배출된 수많은 동역자들의 말씀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계십니다.

지금은 여러분들이 성경에 대한 귀납적인 연구도 부족하고, 강해설교에 대해서도 너무나 부족한 부분이 있더라고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멋지게 성장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다름 사람이 아닌 여러분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3. 결론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불러내시고, 주저 앉아 있을 때 언약을 확인시키시고, 다시 이끌어 내시어 당신이 원하시는 곳, 기업으로 주시기로 한 땅으로 인도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그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나의 현재의 상황이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내 스스로가 실망되는 일이 있더라도 그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에게 축복하시기 위해 나에게 명령하시는 하나님, 나를 통해서 기필코 당신의 뜻을 이루실 하나님, 나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힘차게 나갑시다.

아나톨레 동역자들이여, 이 양지 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빠져 봅시다. 이 일에 우선순위를 둡시다. 그리하여 여러분을 통해서 아나톨레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가를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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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1:27-12:9 이끄시는 하나님 /노경모 창11:27-12:9 이끄시는 하나님 /노경모 Reviewed by □□□ on June 30, 2024 Rating: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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