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일5:14-17 영생을 얻은 자의 기도생활 /정도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물과 피로 임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성령과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서 이를 증거해 주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영생에 대한 확신, 구원에 대한 확신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영생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가서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과 핫라인이 개설된 것입니다. 이는 불신자들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특권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에게는 책임이 따릅니다. 그 책임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근거로 기도의 축복과 책임이라는 주제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 기도 응답의 축복(14)

14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은 먼저 우리 기도의 중요한 기초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여기에 담대함이라는 단어는 ‘파레에시아’라는 말로 원래는 담대함, 확신, 언론의 자유 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체가 높으신 분 앞에 서면 언론의 자유가 없습니다. 주눅이 들어서 하고 싶은 말도 잘 못합니다. 이처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한마디도 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을 때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언론의 자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유롭게 말하는 자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두 동강이 났습니다. 이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갈라놓았던 휘장이었습니다. 이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혔던 죄의 담이 허물어졌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나가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담대하게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가서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어린아이와 아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아이와 아버지는 지식적인 면에서나 능력적인 면에서나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입장에서 아버지는 만물박사입니다. 자기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는 아버지 앞에서 자유롭게 말하는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담대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린아이에게는 자기가 말하면 아버지가 들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이야기든지 하면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십니다. 친절하게 대답해 줍니다.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지혜를 줍니다. 이런 관계가 언론의 자유를 가진 담대한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영생을 가진 우리와의 관계가 바로 그런 관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면 언제든지 들어주십니다.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와서 말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언제든지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부모가 자녀들의 소식을 항상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 자녀들의 기도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도생활의 기본적인 개념은 내가 하나님을 초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기다리시는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와 의논하시고 나와 대화를 나누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내가 가는 것입니다. 나를 도와주시고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 기다리시는 아버지께 나가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담대함입니다.

가끔, 기도가 잘 안 된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기도가 잘 안 되어서 기도를 잘 못했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담대함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늘 바빠서 자녀들과 대화할 시간이 없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 아닙니다. 늘 회사 일에 쫓겨서 아내와 대화할 시간이 없는 남편과 같은 분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와서 자유롭게 말하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와서 자유롭게 말하고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시고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오랫동안 내가 하나님을 부르고 찾아서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나에게 귀를 기울이고 계시는 분이심을 깨달았습니다. 나의 말을 들으시려고 나보다 먼저 오셔서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심을 깨달았을 때에 기도생활이 즐거워졌습니다. 나의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습니다. 내가 힘들 때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나의 모든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 은혜를 누리지 못했다면 저는 정말로 힘들었던 시기를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힘든 세월이 제게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해 저의 신앙이 주님 앞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누구나 이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 생활의 기초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은 우리 신자의 특권입니다. 우리의 기도생활의 근거는 하늘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과 자유롭게 말하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근거는 매우 단순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가서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게 말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신앙생활의 모든 동력을 제공하는 엔진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는 확신이 무엇입니까? 그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자유롭게 말하는 자유가 있지만 부모가 자녀들의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가 볼 때 타당하고 자녀에게 필요하다고 판단이 될 때 들어줍니다. 자녀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들어줍니다. 그러나 부모가 볼 때 자녀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고, 도리어 성장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들어주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그의 뜻에 따라서 우리가 무엇이든 구하면 들어주십니다.

그러면 “그의 뜻대로” “그의 뜻을 따라서”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다 계시해 놓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1-22) 우리가 구한 것을 받으려면 마음에 가책이 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성령이 들어와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일을 하게 되면 마음에 가책을 불러 일으키십니다. 그때 우리는 즉시 회개하고 사죄의 은혜를 덧입고,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한다는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는 항상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의 삶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이 자기 욕심을 좇아서 기도하면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욕심에 쓰려고 잘못 구하였기 때문입니다(약 4:2,3). 구약의 잠언 28:9에서도 보면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는 가증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항상 기도의 조건,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구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면 기도 응답은 100%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앞두고 자신의 소원을 진실하게 아뢴 후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마 26:39-42).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바꾸어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이런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시기 어렵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그에게 구하는 기도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내가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당신의 뜻을 보여주시도록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뜻을 영접하고 순종할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주시도록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어떤 확신을 가지게 됩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안다면 또한 응답해 주신다는 것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들의 특권이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성도들의 특권입니다.


II. 기도하는 자의 책임(16-17)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하나님 앞에서 담대히 말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 무엇입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여기에 “구하라”(αιτησει)는 말은 미래직설법으로 반드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NIV에서 should pray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고 번역했습니다. 이는 영생을 소유한 사람의 책임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담대함으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의 책임을 말합니다. 그것은 곧 중보기도입니다. 중보기도는 영적으로 곤궁한 상태에 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을 보거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범죄자들을 위하여 생명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죄를 짓는다고 해서 다 사망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습니다. 그 죄는 부지중에 짓는 죄입니다. 다시 말하면 악한 의도가 없이 짓는 죄입니다. 도끼자루가 빠져서 길가는 사람이 맞아 죽은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를 과실치사라고 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통사고와 같은 것입니다. 또 인간이 연약해서 짓는 죄입니다. 감정과 혈기를 이기지 못해서 짓는 죄, 아무리 결심해도 안 되는 죄들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은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을 너무 쉽게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말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또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죄를 온전히 떠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구원 받은 성도들은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지 않습니다. 12,13절에서 말한 대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영생을 얻었습니다. 우리 안에 영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범하는 모든 죄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고, 영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성도들 중에도 영적으로 병들어서 죄 가운데 머물러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심령에 회개의 영을 부어주시고, 어떤 계기를 마련하셔서 그 영혼을 영적 위기에서 구해 주십니다.

사람이 한번 죄에 빠지면 쉽게 해어 나올 수 없습니다. 죄의 세력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에 빠지게 되면 회개하고 툭툭 털고 일어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한번 죄에 빠지면 회개하기보다 계속하여 변명합니다. 죄가 주는 낙을 누리며 그 가운데 머물고자 하는 유혹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한발자국씩 죄 가운데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죄의 세력에 사로잡혀 버립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게 되면 하나님께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징계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채찍으로 때려서라도 그 악의 길에서 돌이키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런 최악의 상태에 가지 않고 그 영혼이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회개의 영을 주시고 회개에 이르도록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참된 하나님의 자녀라면, 영생을 소유한 자라면 범죄한 영혼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베드로는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제자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열두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수제자로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눈으로 보았고, 모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체포되었을 때에 도망갔습니다. 계집종과 사람들로부터 “너도 예수의 제자가 아니냐?”는 추궁을 받았을 때에 주를 부인하였습니다. 저주하며 주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르렀습니까? 아닙니다. 베드로는 곧바로 회개하고 일평생 복음을 전파하며 살았습니다. 베드로가 이처럼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일평생 주와 복음을 위하여 헌신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 배후에 예수님의 중보기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이 예수님의 기도가 연약한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고,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게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형제 중에서 죄를 범하는 것을 보게 되면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저는 2006년 여름에 교회의 질서가 무너지고 영적 권위가 땅에 떨어진 가운데서 새롭게 교회를 세우라는 하나님의 뜻을 영접하고 목회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어떤 때는 차라리 새로 개척을 하는 것이 더 쉽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습니다. 우리말에 헌집 고치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헌집은 아무리 고쳐도 힘만 들고 고친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무너진 교회를 다시 세운다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모든 영적 권위가 무너진 가운데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어떤 논리를 가지고 설득할 수도 없었습니다. 제가 논리를 내세우면 정반대의 다른 논리로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죄를 책망할 수도 없었습니다. 죄를 책망하면 너는 잘 했느냐는 비난이 돌아왔습니다. 무슨 선한 일을 시도해면 생색을 내려고 한다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결하나 보자라는 식으로 냉소적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치유하시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몇 년은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일 년도 안 걸려서 믿음 위에 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것을 볼 때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는 형제자매를 위하여 중보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돌이키게 하시고 그 영혼을 구해 주십니다. 여러분 주변에 믿음의 길에 떨어져 나가 성경말씀과 관계없이 사는 형제가 있으면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할 수 있기 바랍니다. 또 현재적으로 교회생활과 기도생활을 멀리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영혼을 위해 중보기도해 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보기도를 기뻐하십니다. 개인적으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목장에서 함께 기도할 때 더욱 더 기도응답이 빨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드리는 기도를 빨리 응답해 주십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영혼구원을 위한 기도를 잘 들어주십니다. 중보기도를 하려면 구령의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죄 가운데 있는 영혼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자기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남을 위해 기도할 때 영적인 지평이 넓어집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야말로 주님의 마음으로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만을 위해서 기도하지는 않습니까? 영혼이 병든 심령을 위해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십니까? 연약한 사람들의 영적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십니까? 그들에게도 나와 동일한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까?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아멘! 우리가 중보기도를 감당할 때 이런 역사를 이루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위해 기도하면 그들이 변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신기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려운 문제가 하나 둘 풀려가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사망에 이르는 죄는 무엇을 말할까요? 16b절을 보십시오.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사도 요한은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고 했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을 위하여는 기도하라고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말하는 사망에 이르는 죄는 어떤 죄를 말할까요? “사망에 이르는 죄”가 무엇인지 이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편지를 받은 독자들은 그 뜻을 잘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시대가 흐르고 문화적 간격이 벌어져서 해석하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전에 그리스도인이었던 자가 고의적으로 그리스도를 버리는 배교자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신자에게 있어서 배교하는 일이 가능할까요? 이미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9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배교하는 일은 말할 것도 없이 죄를 짓는 일 조차 불가능하다”라고 말해 왔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 또 18절에도 말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고 했습니다. 참된 신자는 배교의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짓는 죄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망에 이르는 죄는 어떤 죄를 말할까요? 요한일서의 문맥에서 보면 이 죄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증거하시는데도 믿지 아니하는 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물과 피와 성령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의 죄를 가리킵니다. 믿도록 도전하시는데도 믿지 아니하는 자, 그 자가 바로 성령을 거역하는 죄입니다. 요한은 복음진리를 거부하는 영지주의자들을 염두고 두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 죄는 마태복음 12:31-32에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이 죄는 성령이 분명히 증거를 주시는데도 불구하고 복음을 거부하는 죄를 말합니다.

또 히브리서에는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6)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타락한 사람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배교자가 아니라 이단에 빠져서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을 만큼 거짓 확신에 차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자들을 위하여는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담대함으로 나아가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리낌 없이 나와서 구할 것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항상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지 뜻대로 구하면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중보기도의 책임이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기도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교회를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기도의 특권을 가진 참된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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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5:14-17 영생을 얻은 자의 기도생활 /정도열 요일5:14-17 영생을 얻은 자의 기도생활 /정도열 Reviewed by □□□ on August 06, 2024 Rating: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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