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향록목사/하늘의 문이로다! (창 28:10-22/골 3:1-4)
오늘 읽은 구약 성경은, 야곱이 벧엘에서 하늘의 문이 열리고, 거기에 사닥다리가 놓이고, 그 사닥다리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광경을 본 후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받은 기록이며, 신약의 골로새서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너희는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의 것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선 야곱의 앞에 하늘의 문이 열리게 된 과정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야곱이 하늘의 문이 열게 될 때까지는 자기의 운명을 개척하려고 세 번이나 결정적으로 노력했습니다. 그 처음은 어머니의 복중에서 나오게 되는 출생 시점에서였습니다. 복중에 있는 쌍둥이로서 형으로 태어날 것인가 아우로 태어날 것인가? 장자권(長子權)이 절대 우위에 있는 원시 사회에서는 장자로 태어나는 것은 축복을 지고 나오는 것이요, 차자(次子)로 태어나는 것은 불행을 지고 나오는 것이 됩니다. 야곱은 어머니의 복중에서 에서보다 한발 앞서 나오려고 애썼는데 그만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오는데 그쳐버렸습니다.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이 차자가 된 것입니다. 운명의 신이 그의 편이 되지 않았다고 할까요?
그 다음, 그는 나이 들어가면서 언제나 형의 약점을 이용하여 장자의 권한을 바꿔보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형 에서가 사냥 길에서 돌아오는데 몹시 배가 고파 아우에게 팥죽 한 그릇을 청했습니다. 야곱은 이것이 절호의 찬스라 생각하고 “죽 한 그릇을 드릴 터이니 형의 장자 권리를 내게 줄 수 있습니까?” 했습니다. 이에 형 에서는 몹시 배고팠기에 그 배고픔을 못 참고, 또 평소 장자권에 대해 중요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려므나” 하고 가볍게 넘겨 버렸습니다. 그러나 역시 장자권이나 형과 아우의 위치가 말로 가볍게 넘어가는 것이 아니고, 이웃 사람이나 일가친척이 에서를 아우로, 야곱을 형으로 쳐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남는 것은 형에게 얄미운 아우라는 것만 보인 꼴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어떤 이익을 위해 잔꾀를 부리면 이익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얄미운 약점만 드러나고 마는 법입니다.
야곱은 이제 세 번째로 아버지 이삭의 임종에 가까운 때에 어머니와 모의하여 큰아들이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채는 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앞을 잘 못 보는 아버지의 눈을 속여 팔에 소가죽을 입혀 털이 난 형의 손 같게 하고, 목소리를 변성하여 형의 행세를 하고 형의 받을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그러나 그 잔꾀는 금세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에서의 분노는 극에 달하여 야곱을 죽이려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이 기미를 안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에게 일러 한밤중 부모 형제 고향 산천을 버리고 어머니의 외가로 도망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잔꾀로 더 큰 것을 얻으려고 인간의 지혜와 방법으로 자기의 운명을 바꾸어보려고 했는데 결과는 모든 것을 완전히 잃어버린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 걸음 앞서려고 형을 내어 밀치고, 한 가지 더 얻으려고 형제간에도 흥정을 하고, 한 가지 축복을 더 받으려고 아버지도 형제간도 속이려 했는데 오히려 얻은 것은 없이 가졌던 것도 빼앗기고, 홀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어디로 갈 것인가? 갈 곳이 없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가정에서 쫓겨나면 그것은 곧 죽음이었습니다. 누가 때려 죽여도 보응할 수 없습니다. 그가 정처 없이 이른 곳은 루스라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사면이 석벽으로 둘러싸인 요새였습니다. 아마 다급한 야곱이 여기 숨을 곳을 찾아 들른 것 같습니다. 우뚝 서서 동서남북을 휙 둘러보니 나갈 문이 없습니다. 사면초과라 했듯이 보니 숨을 곳인 동시에 갇힌 곳이 되었습니다. 정말 인생의 막다른 곳이었습니다.
사람은 살다가 이렇게 인생의 막다른 곳에 이르게 됩니다. 동서남북 캄캄한 절벽 속에 갇혀 버릴 때가 있습니다. 칠흑 같이 어둡고 먹이를 찾는 맹수의 울음소리마저 들리는 절망의 밤이 닥쳐오는 때가 있습니다. 사탄이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는 세상에 알몸으로 누어있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야곱은 그제야 인간의 잔꾀나, 인간의 재간이나, 인간의 지혜나, 인간의 높은 아이큐나, 인간의 경영방법이나, 인간의 노력까지도 이렇게 되고 보니 무용 무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역시 별 재주도 다 부리고 별별 짓을 다해도 마지막은 누구나 이 꼴이 되는구나 하고 자각했습니다. 차자가 아닌 장자가 되어봤자, 미국인으로 태어나 봤자, 호부자의 자식이 되어봤자, 이름을 날려봤자, 마지막은 북망산에 한 줌 흙이 되고 마는 인생인데, 너나 내나 다를 바 없이 끝나고 마는 데 그걸 가지고 형제간에 원수 되고, 아버지를 속이고, 가정을 파괴하고, 죽기 살기로 결판나게 했으니 얼마나 미련한 것이 인간인가? 어리석은 자여 하고 가슴을 친 것입니다.
젊어서 죽는 것이 아깝기는 한데 그렇다고 나보다 더 어린 갓난아기들도 저 아프리카에서는 지난 해에도 수백만이 죽어갔는데, 몇 해 더 산다고 별 뾰족한 수가 있을 것인가? 형과 원수를 만들고 아버지를 속이고 가정은 파탄을 만든 이 야곱은 오히려 죽어 없어지는 것이 낫지 더 살아야 남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것 외에 무엇이 더 있을 것인가? 더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야곱입니다. 사람들은 때로 저 자식들 때문에 못 죽겠다 해도 부모 없는 자식들도 제법 잘 살아 성공하는 이 많고, 마누라 과부 되어 어찌 살까 좀 더 살아야 하지 하여도 과부 되어 시원치 못한 영감 있을 때보다 더 잘사는 부인들도 적지 아니한데 그것도 모두 군소리야.
야곱은 밤새도록 고민하고, 밤새도록 참회하고, 밤새도록 울고 지새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이 성경에는 없으나 명백한 사실 하나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할아버지가 믿으시던 야웨 하나님, 아버지 이삭이 그렇게도 믿으시던 야웨 하나님, 내 지난 날 지은 죄과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이 내 죄과를 용서하여 주신다면 이 시간에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하는 참회의 기도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돌베게를 베고 드러누웠습니다. 그대로 며칠이라도 누었다가 그대로 세상을 떠날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드러누우니 동서남북 절벽이 보이지 않는 대신 저 하늘이 보입니다. 벧엘에서 누우면 깎아 세운 듯한 절벽 속으로 보이는 하늘은 꼭 문같이 보입니다. '문은 있다. 그런데 그 문은 하늘에 뚫린 문이다. 문이 있다. 저 하늘 문', 그 하늘은 그저 빈 창공이 아닙니다. 저기서 사다리가 내려와 자기 앞에 턱 놓이는 것입니다.
사닥다리란 말은 층계라는 말입니다. 층계라는 히브리말의 본뜻은 쌓아올린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은 하늘 문으로 무엇을 쌓아 올렸다는 뜻입니다. 저 하늘 문 위로 거기 하나님이 계신 데로 도달할 기도를 쌓아 올린 것입니다. 지평으로만 밀고 나갔던 야곱이 이제 더 갈 데가 없이 막히자 하늘 위로 출구를 찾고 거기에 도달하고자 기도의 제단을 쌓아 올린 것입니다. 고대 신전은 계단으로 올라 신이 계신 맨 꼭대기까지 오르게 지어졌던 것과도 유사합니다. 하늘 위로 올라가는 것은 믿음입니다. 마침내 하늘 저편 거기 계신 인간의 지식과 지각을 뛰어 넘어 계신 자존자(自存者), 하나님과 연결된 것입니다. 야곱의 기도는 마침내 하나님의 계신 집의 초인종을 누르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거기서 응답이 오는 것입니다. 하늘은 푸른 창공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땅에서는 만날 수 없는 분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쌓아 올라갑니다. 저 하늘에 닿은 사다리 저 끝에서부터 천사가 줄지어 이곳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내려온 천사는 하늘의 메시지를 내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너 누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에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 할 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3하-15).
천사는 다시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고 잠을 깨니 놀라운 꿈입니다. 꿈은 꿈이나 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분명합니다. 야곱이 잠을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곳이 하나님의 전이요 여기가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돌을 모아놓고 기름을 붓고 여기는 본래 루스라는 지명이나 그 이름을 벧엘, 하나님의 집으로 고치고 내가 여기 돌아와 다시 하나님의 제단을 쌓고 십일조를 드리기로 서원을 올리고 동방으로 떠나갔습니다.
이제 이 사적에서 몇 가지를 정리하여 보겠습니다.
첫째, 무엇을 얻으려는 인간의 야심으로 지혜와 재주를 다 해도 결국 얻는 것은 아니요, 가진 것도 허망하게 잃어버린다는 것, 지평을 향해 자기 운명과 영역을 확대하려는 모든 야망은 결국 막혀버리고 만다는 것, 더 잘 사는 길을 찾아 가진 잔꾀를 부려보아도 결국은 죽음의 위협에 이르게 된다는 것, 모든 인간의 인간적인 길은 주어진 가정, 주어진 행복, 주어진 평화, 주어진 안전까지도 빼앗겨 버린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거기서 비로소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는 것, 하늘을 쳐다보면 반드시 나갈 문이 열려있다는 것, 하나님은 어떠한 절망에 놓여있는 자에게도 하늘 문을 닫지 않고 열어놓고 기다리신다는 것, 네 앞에 열린 문이 있느니라.
셋째, 이제 인간은 막다른 골목에서 하늘의 문으로 올라갈 기도의 제단을 쌓아 올리고 인간의 영역밖에 계신 하나님께 도달해야 한다는 것, 기도의 층계를 쌓고 또 쌓으면 하나님의 집의 초인종을 누르게 된다는 것.
넷째, 마침내 하나님은 그를 찾아 애쓰는 자에게 응답하신다는 것. 응답하시되 축복으로 응답하신다는 것, 그 축복은 안전의 축복이요, 땅의 축복이요, 생명과 종족번성의 축복이라는 것.
다섯째, 이제 하나님을 만난 곳, 여기가 루스가 아니라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 성전은, 성소는 딴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그 자리가 곧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
여섯째, 이제 하나님은 만남이 곧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십일조 제물을 바쳐서 하나님을 근거로 다시 인생길을 걸어가게 된다는 것.
일곱째, 그러니 29장에서 떠나 동방으로 가니 즉시 사막에서도 우물을 만나고 자기의 아내가 될 라헬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 "너희는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하는 권고를 회상하게 됩니다. 인생 길의 기점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기도의 층계부터 쌓아 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또 한해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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