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3:24-30,36-43 밀과 가라지의 비유 /김세윤

마태복음 13:24-30과 36-43절에 있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교독합시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우리가 예수의 비유들을 공부하면서 주로 마가복음의 순서를 따라가다가 오늘은 마태복음에 있는 비유를 다루게 되었습니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나옵니다. 그런데 지난 번에 우리가 다루었던 저절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는 마태복음에는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아마 마태복음에는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 대신에 마태가 지금 여기 밀 밭에 자라는 가라지의 비유, 이 비유를 여기 넣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 나오는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와 여기 오늘 읽은 마태복음의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자세히 비교해 보면 여러 가지 유사점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차이점들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 똑같은 비유를 여러 곳에서 되풀이해서 가르치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약간씩 변형을 시켜서 강조점을 달리하거나 의미를 조금 바꾸어서 하셨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비유도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와 말뿐만 아니라 내용에서도 유사점이 많지만, 한 가지 근본적인 차이점도 있습니다. 이 마가복음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는 왜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으면,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을 우리가 여러 번 강조했지만, 치유로 시위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한 것이 확실한데, 그러면 왜 당시의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대로 그냥 악의 힘을 하루만에 없애 버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신다든가, 또는 전혀 새로워진 사회를 만든다든가 이렇게 하시지 않고, 지금 우리 가운데 죄악이 이렇게 횡횡하고 고난이 이렇게 많고 이렇게 되는가? 예수께서 지금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시위하는 그 힘으로 병자를 고치고, 삭개오 같은 사람을 세롭게 하고 하는 힘을 조금 널리 사용을 해서 악의 힘을 완전히 없애 버리고, 의를 온 세상에 이루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는 것이 좋지 않을 것인가? 그런 의문에 대한 답으로 예수께서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를 했다고 지난 시간에 그랬지요.

그런데 오늘 우리가 보는 마태복음에 있어서 가라지의 비유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예수의 청중들이,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에게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요. 다시 말하면, 악한 자를 없애 버리고 사탄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고, 그 사탄의 사주에 따라 죄악을 저지르고 고난을 끼치는 자들을 좀 뽑아 버렸으면, 이 사회에서 아예 제거해 주시지, 왜 그렇지 않는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자기를 통해서 왔다고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통치를 삭개오 같은 사람을 의롭게 해서, 또는 병자를 고쳐서, 죽은 자를 살려서, 의와 생명의 통치를 나타내는데, 그냥 그 정도로 할 것이 아니고, 사탄을 한꺼번에 다 제거해 주고, 사탄의 사주 아래 죄악을 저지르고 고난을 끼치는 자들을 밀 밭에서 가라지를 다 뽑아 없애듯이, 다 한꺼번에 뽑아 버렸으면 좋을 텐데, 왜 그러시지 않나? 하는 그 의문, 또는 예수에 대한 요구에 대해서 예수께서 지금 답을 하신 것이에요. 그것이 이 비유의 초점이에요.

예수의 답은 하나님 나라의 씨가 한동안 자랄 그 기간 동안 저절로 자라고, 그래서 점점 자란다고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마가복음에 세 개의 비유를 한꺼번에 보면서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이 세 개를 한꺼번에 다루면서 저절로 자람, 점진적으로 자람, 그러나 필연적으로 자람. 점진적으로 자라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잘 안 보임, 은닉성, 이런 것을 말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한번 밀과 가라지의 비유로 하나님 나라가 점진적으로 자라게 되었음을 말하고, 미래에야 추수기가 있음을 말합니다. 미래의 추수기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에게는 구원의 완성으로 나타난 것이며, 악한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에 어그러지게 산 자들에게는 심판이 있을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비유는 무엇을 말합니까? 그 전에 악을 다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비현실적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도 방해를 가져올 수 있음을 여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비유의 대충은 그런데 그것을 조금 더 한 항목씩 자세히 설명해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께서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온 세상에 대한 구원의 계획의 실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38절에서 예수께서 이 비유를 설명할 때에 밭은 세상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 위에 하나님 나라의 씨를 뿌리는 비유인데, 그것은 온 세상에 구원의 통치를 이루려 하심입니다. 이 밭은 씨뿌리는 자에게 속합니다. 24절, 어떤 사람이 밭은 씨를 제 밭에 뿌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요. 세상의 창조주 하나님께. 38절, 천국의 아들들을 뿌린다. 씨는 천국의 아들들입니다. 이때 아들들이란 말은 샘족 언어의 숙어입니다. "....에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을 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들을 자꾸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하나님의 활동만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활동이 있습니까? 악한 자가 활동을 하고, 악한 자의 아들들은 악한 자의 아들들(.....에 속한 자)을 심어 놓습니다. 이 말입니다. 여기 악한 자는 사단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하나님께 속한 것이어서, 당연히 하나님의 활동 무대로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녀들 또는 자기의 백성들을 일으키는 곳인데, 불행히도 이 세상에 사단이 또 작용을 하면서 자기 말을 듣는 사람들, 사단을 청종하는 자들을 자꾸 많이 일으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 하나님께 속한 자들과 하나님 나라의 아들들과 사단에 속한 자들, 사단의 나라의 백성이 공존하는 밀밭에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현상과 같습니다. 그 상태가 이제 한동안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상태는 여기 지금 우리 비유에서는 강조가 되어 있지 않지만, 두 왕국의 싸움의 상태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사단의 나라와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속한 자들과 사단의 나라에 속한 자들이 서로 싸우는 관계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을 때에 일어나는 복락, 자유가 더 많아지고, 정의가 더 많아지고, 사랑이 더욱 많아지고, 풍화가 더 풍부해지고, 건강이 증진되고, 이런 것들은 다 하나님의 역사로 하나님의 통치의 구체적인 열매들로 나타나는가 하면, 반면에 사단의 작용으로 갈등, 억압이 증대하고, 싸움이 있고, 아픔, 슬픔이 있으며, 이것이 한동안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는가를 봅시다. 이들은 첫째로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씨 뿌리는 자가 밭에 뿌려서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저절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일관된 강조입니다. 우리가 저절로 있기로 한다면 차라리 사단의 아들들, 종이 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에게 43절에 보면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아버지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십니다. 아버지란 말과 또 짝을 이루는 아들이라는 말의 근본 의미는 상속의 관계를 말합니다. 상속의 관계에서 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창조주의 부요함, 무한함을 상속받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주가 그들의 아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과 초월성을 힘입어서 우리 인간의 제한성과 결핍성을 극복하여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렇게 되지요.

그 다음에 세 번째로 43절에 보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은 의인들입니다. 마가복음 3:15에 보면 예수께서 세례 때에 세례 요한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모든 의를 성취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의를 성취하시는 분이고, 또 마태복음 5:20에 보면 예수께서는 자기의 제자들을 의로 부르시는 그 의가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여야 한다고 하십니다. 완전한 의로 부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의로 부르심에 응한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입니다.

여기서 의라는 개념은 전에도 여러 번 설명을 했지만, 원래는 근본적으로 관계론적인 의입니다.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만한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창조주와 피조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시고,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우리의 그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고,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면 올바른 관계는 원만한 관계가 됩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평화가 나옵니다. 온전해짐이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을 덕입을 수 있으니까 온전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의의 가장 기본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 관계에 대해서 나오는 의무를 다합니다.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합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그의 삶이 온전해집니다. 그와의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의라는 개념은 두 번째로 윤리적 함축 의미를 갖게 됩니다. 원래 관계론적인 개념인데, 바로 하나님과 인간이 올바른 관계를 갖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시고,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해 주시고, 전에도 여러 번 설명했습니다만, 부자의 관계가 이런 것이 아닙니까?

아들에 대해서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함과 아들을 사랑해 주며,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서 의지하고 순종합니다. 이럴 때에 이 관계는 원만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의라고 하는데, 원만한 관계에 있음은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부자의 관계에서 아버지에게는 아들을 사랑할 의무가 주어집니다.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서 사랑하는 의무를 다하고, 부자의 관계에서 아들에게는 아버지를 의지하고 순종할 의무가 주어집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의지하고 순종하면 의로운 관계가 되며, 그 열매는 평화입니다. 이는 단순한 박한상과 부모의 관계가 아니라, 평화의 관계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샬롬'이라고 합니다.

샬롬이라는 말은 갈등이 없음이라는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헬라어로 평화란 말은 갈등이 없음, 전쟁이 없음, 전쟁의 부재라는 소극적인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경에서 샬롬이라는 말은 그런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고, 그보다 훨씬 온전함, 모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온전케 됨을 의미합니다. 물론 갈등도 극복된 것이지요. 전쟁도 없는 것. 그러나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생명력으로 가득 찬 그런 것이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과 그의 무한한 부여함을 돕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의의 기본 의미인데, 우리가 의인이 되었다는 말은 이런 관계를 등지고, 이런 관계에서 멀리 떠나버린 자들(탕자의 비유) 즉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 분깃을 가지고 멀리 떠나 버린 자가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아들의 지위를 신분을 회복합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가락지를 끼우고 옷을 입히고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상속자의 지위에 회복을 시킴으로써 큰 잔치가 벌어지고, 살진 송아지를 잡고 풍악을 울리며 잔치가 열립니다. 아버지의 부요함을 상속받는 것이 이것이 의이고,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의라는 말은 일차적으로는 관계론적인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다함, 즉 하나님께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고, 사단을 순종해서 죄를 짓고 악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 참되고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의인은 양쪽 뜻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결국 43절 마지막 추수 때에, 마지막 최후의 심판 때에 해와 같이 빛나리라.

반면에 악한 자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술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39절에 악한 자, 곧 사단이 심는 씨들입니다. 사단의 통치를 받는 자들, 사단의 말에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지금 상당히 심각한 말입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지금 이 비유에서 사단의 자식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악을 행하는 자들, 좀 심한 말 아닙니까? 여러분들 친구들 중에 예수 안 믿어도 진실되게 살려고 노력하고 선한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지금 이 비유에서 예수가 사단의 자식들이라고 합니다. 우리 성경에 아마 여러분들이 그런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읽기 때문에 그냥 지나쳐 버릴 경우가 있는데, 성경 곳곳에 그런 말이 많습니다.

한 번 보실까요? 요한복음 8장 44절을 한 번 보실까요?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에게 적대하며 달려드는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의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곳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희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됨이라." 이것이 얼마나 큰 욕입니까? 유대인들에게. 유대인들은 인간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아브라함을 아비로 삼고,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을 자기들의 아버지로, 자기들의 언약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 생각하는데, 예수께서 "아 그렇지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고린도후서 4장 3-4절에서는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추지 못하게 하느니라."라고 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왜 믿지 않나요? 사단이 그들의 눈을 가리워서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사단의 영향권 아래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니까, 밭의 주인이니까, 당연히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나와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인정해야 하고 그에게 의지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그를 의지하지 않는 것, 그 행위 자체가 그들이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세력의 영향 아래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은 자기들이 사단의 영향 아래 있음을 드러냅니다.

바울의 언어로 말하면, 사단에 의해서 눈이 멀고 사단의 영향 아래에 있습니다. 그것을 심하게 말해서 "여기 사단의 자식들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부인할 수 없잖아요.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인간들의 창조주로서 당연히 하나님으로서 인정을 받아야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항하는 사단의 세력권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영향 아래에 있다는 것을 지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심한 말이 아닙니다.

심각한 상황입니다. 불신자는 사단의 세력권 안에 심각하게 놓여 있습니다. 41절에 따르면 이들은 스스로 악을 행하는 자, 불법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사단의 세력권 안에 수동적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며, 사단은 자기 세력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수동적으로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꾸 악을 자지르도록 불법을 행하게 됩니다. 불법 중에는 넘어지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넘어지게 하는 것은 남으로 하여금 거꾸러지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의와 정의를 행하지 못하게 하는 일도 포함됩니다. 오늘 아침 설교 시간에도 이러한 내용을 함께 생각하였습니다. 세상의 사상가들이나 예술가들, 오늘날 굉장히 영향을 끼치는 대중 예술가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에게 대항하도록 하고 악을 행하게 하는 악을 도모하고 있는지에 대해 논의하였습니다. 마르크스와 레닌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재앙을 가져왔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하고, 공산혁명이 자유를 박탈하며 진정한 자유와 정의를 행하지 못하게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현재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지만, 악한 자와 악한 자에 속한 자들이 악을 행하고 또 남을 거꾸러뜨리는 일이 종말까지 한동안 공존할 수밖에 없음을 예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사단에 속한 자들은 42절에 "그들의 종말은 풀무불에 던져넣어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엄청난 심판이 있습니다. 여기서 풀무불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연상하게 하나요? 다니엘서에서 누가 풀무불에 들어갔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풀무불에 들어갔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여러 곳에서 다니엘을 연상하게 됩니다. 38절에 "인자"라는 말이 나오지요. 씨를 뿌리는 자는 인자입니다. 이는 다니엘서 7장에서 온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천국의 아들들에 대한 언급도 38절에 있습니다. 이 말은 다니엘서 2장과 7장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말은 구약에서 드문 표현인데, 다니엘서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또한, 불법을 행하는 자에 대한 언급도 다니엘서에 나오는 말이며, 의를 행하는 자와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의인들은 종말에 하나님 나라에서 태양같이 빛나리라, 별과 같이 빛나리라 하는 말도 다니엘서 12장 1-2절에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니엘서를 찾아보면, 어떻게 이것이 다 들어맞겠는가가 재미있겠지만, 시간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예수의 비유는 다니엘서의 내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여간 악에 속한 자들에게는 최후의 심판이 있습니다. 여기 풀무불이라든지,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는 것은 그림입니다. 그것을 문자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림 언어입니다. 구원에 이르지 못함, 엄청난 고난에 빠짐을 말하는 것이지, 그것을 꼭 문자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본문은 예수를 통해서 이미 하나님 나라가 왔으나, 이 세상에 죄악과 고난이 병행하는 가운데 사람들이 왜 하나님께서 죄악과 고난을 단순히 제거해 버리지 않나 하는 의문에 대한 답입니다. 우리도 그런 의문을 자꾸 갖게 됩니다. 예수께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의 처음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음, 출범했음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사단이 통치하는 세상이고,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사단을 완전히 꺾고,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됩니다.

예수의 처음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출범해서 사단을 이깁니다. 사단을 이김은 악을 극복하고 고난을 극복함으로 나타납니다. 예수의 생전에는 치유로 나타났습니다. 그 치유는 모든 악과 고난을 극복함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사단을 이김을 가장 크게 나타낸 것이 예수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죽음 자체를 이긴 사건입니다. 치유도 죽음의 증상인 고난들을 이김입니다. 그래서 문둥병자를 고침이 죽음이 문둥병으로 나타나고, 죽음이 이웃에 대한 착취와 서로에 대한 적대감과 공포로 나타나고, 그런 고난으로 예수께서 그 관계를 치유함으로 샬롬, 온전하게 됨, 평화가 있고 갈등이 평화로 극복이 되고, 서로에 대한 공포가 서로에 대한 자유함으로 극복이 됩니다. 그래서 죽음의 증상들을 죽음의 세력을 죽음을 자꾸 꺾어 가시다가 스스로의 부활로 예수께서 사단을 결정적으로 이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결정적으로 이긴 날이라고 해서 D-Day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 사단이 항복을 안 해서 한동안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을 씨 뿌리는 밭의 주인과 자꾸 밤에 음침하게 뒤로 다니면서 악의 자녀들을 쑤시는 사단과 각축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이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뿌리는 하나님과 악의 자녀들을 뿌리는 사단의 각축장, 이것이 한동안 계속됩니다.

그러나 예수가 분명히 말하는 것은 이 비유의 중요한 요점입니다. 이 비유라는 것이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출범했으며, 한동안 악의 세력이 한꺼번에 제거되는 것이 아니고, 악의 세력이 하나님의 구원의 힘과 한동안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이 비유의 하나의 초점이며, 또 하나는 곧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추수의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시위가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됩니다. 그때 사단에게는 사단에 속한 자들에게는 엄청난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여기 이 사이에 사는 우리가 이 악의 횡횡함을 보고, 왜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했으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을 얼마나 우리에게 크게 시위하시고, 스스로 부활로 사단의 죽음을 이기기까지 하시고, 또 우리 가운데에 복음이 선포되고, 이 복음이 성령의 각 사람 속에서 역사하셔서 악인이 살인자가 새사람으로 되는 것도 우리도 보기도 하고, 그래서 고용주와 노동자들이 막 싸우는 장에 변화가 일어나 가지고 새로워짐이 있고, 평화가 있고, 자유가 있고, 정의가 확대되는 이런 것도 많이 봅니다. 이런 것을 보면 확실히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데, 하나님의 통치가 확실히 지금 있는데, 그리고 그 하나님의 통치가 막강한 힘으로서 악과 죽음을 이기는 힘으로 지금 나타나는데, 아 요즘 한꺼번에 죄악과 고난, 죽음을 한꺼번에 제거해 버리지 않지 하고, 우리 믿는 자들이 그런 생각을 가질 때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럴 때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악의 힘의 실제만 너무 과장해서 보고, 하나님이 지금 막강히 역사하심, 죄악의 힘을 극복하고 고난의 힘을 극복하시는데, 하나님의 힘에 대해서 눈이 먼다든지 희미하게 만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공부한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그 점을 강조했습니다. 점점 하나님의 통치가 막강해짐, 승리에 달함, 그것을 굉장히 예수께서 권면했습니다. 이 비유에서는 그 점을 권면하기보다는 이렇게 공존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잃지 말고 확신을 가져라는 것입니다. 추수가 있음. 그때에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된다는 말씀입니다.

자, 오늘 그런 이야기인데, 여기서 우리가 교훈을 하나 배웁니다. 그러면 종말에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완성이 될 때까지 하나님의 의의 힘과 사단의 악의 힘이 공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의 힘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사단의 죄악의 권세 아래 놓인 사단의 자녀들이 공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추수 때가 되기 전에 미리 악의 힘을 강제로 뽑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 가라지를 아직 추수 때가 되기 전에 강제로 뽑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강제로 뽑았다가는 밀도 다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비유가 그러합니다. 그러면 우리 가정에서, 우리 교회에서, 우리 기독교 가정, 우리 교회, 적어도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기로 다 합의하고 결의한 공동체 교회에 죄악이 있고 고난이 있을 경우 그냥 놔두라는 말씀입니까?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그냥 놔두라는 그런 말입니까?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사회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의를 행하려는 자들과 마이클 잭슨 같이 사단을 섬긴다고 선언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사단을 인정하지 않지만 실제로 자꾸 죄악을 도모하는 사람들. 그러므로 해서 사단을 섬기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은데, 그 사람들이 공존하니까 그냥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배버려 두어라 그런 말씀입니까? 죄악을 뿌리 뽑으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사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에서도 그냥 내버려 두어라 그런 말씀입니까? 우리 기독교 가정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지 않는 구성원이 있습니다. 남편이든지 자식이든지, 그러면 내버려 두라는 말씀입니까? 그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5장 27-30절에서 예수께서 악을 제거하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날카롭게 말씀하시는가를 한번 읽어 보십시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함이니라."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뜻을 좇고자 하는 선한 의지와 사단의 사주를 받아서 죄를 저지르는 일이 왔다 갔다 하는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는 하나님의 의의 힘과 사단의 죄악이 공존하니까, 그냥 우리가 스스로 우리 속에서의 죄악성을 뿌리 뽑으려고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이 가라지의 비유가. 마태복음 5:27절 말씀을 보니까 그런 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 속에 있는 죄악성을 제거하는 데 얼마나 엄중하게 말씀하시는지요. 만일 우리 눈이 우리로 하여금 죄악을 저지르게 하거든 눈을 뽑아 버리라고 하십니다. 만일 우리 손이 죄악을 저지르려고 하거든 손을 잘라 버리라고 하십니다. 또 마태복음 18:15-17을 보면 악을 행하는 형제가 있거든 먼저 가서 타일르고, 그래도 안 들으면 대표가 가서 타일르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안 들으면 내어 쫓으라고 하십니다. 파문시켜라. 그 사람은 교회 공동체에 속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파면은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음을 공식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엄중히 파문해야 합니다. 이것을 예수께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비유를 지금 본 마태복음 5:29-30, 마태복음 18:15-17절 등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일단 오늘 이 비유를 통해 우리 가운데 있는 죄악이나 우리 개인의 삶에 있는 죄악, 우리 교회 공동체에 있는 또는 우리 가정에 있는 죄악에 대해서 그냥 그것도 괜찮고, 그것도 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태도를 가지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 가운데 있는 악, 우리 개인의 삶에 있는 악, 우리 교회에 있는 악을 보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회의한다든가 또는 성급하게 이것을 그의 막강한 힘으로 없애주지 않나 하고 원망하지 말고, 주권자적인 결정에 맡기고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를 써야 하겠지요. 하나는 개인의 삶에 있는 악을 제거하려는 진지함으로 교회 안에 악이 있다면 그것을 제거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그러나 완벽주의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기 전에는 우리 개인의 삶에서도, 우리 기독교적 가정의 삶에서도, 우리 기독교 공동체 교회의 삶에서도 완벽함이 있을 수 없고, 우리에게 가라지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것을 점차 제거해 주시도록 사단의 세력을 꺾으려고 노력하지만, 완벽주의를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완벽주의를 고집하다가는 역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밀도 다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사에서 엄청나게 많이 증명된 바입니다.

이것은 교회사뿐만 아니라 사회 이데올로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까 제가 마르크스와 레닌을 예로 들었습니다만, 마르크스-레닌식의 유토피아 사상이 이 땅에 완벽한 정의 사회를 구현하려고 하면서 얼마나 역효과를 가져왔는지, 더 많은 고난과 더 많은 불의를 가져왔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가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교회사에서도 교회 내의 모든 악을 제거하려고 하다가 완벽주의를 추구하다가 더 큰 악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핍박의 경우, 우리 교단이 속한 고신교회가 좋은 예입니다. 과거 고대 사회에서 로마 제국의 황제의 명에 타협하여 신앙을 버리고 배신해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중에 핍박이 끝날 경우, 그 사람들이 다 교회에 모여들면 신앙을 끝까지 지키다가 회생된 사람들과 신앙을 약간 타협해서 살아난 사람들과 싸우게 됩니다. 신앙의 순수성을 끝까지 지키려는 사람들은 신앙을 타협해서 목숨을 건진 사람들에게 배신자라고 욕하고, 이 사람들은 자기 변명과 자기 정당화를 하며, 이 사람들의 형제 없음에 대해 싸우게 됩니다. 이러다가 교회가 꼭 분열하게 됩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그렇지 않습니까? 신사참배한 사람들과 신사참배하지 않은 사람들이 고신교단과 다른 교단으로 처음에 분리되었습니다. 그것이 한국 교회의 분열의 시작입니다. 그 뒤로 한국 교회가 엄청나게 분열하게 됩니다. 특히 장로교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 교회사에서도 가라지를 제거하려다가 밀도 다친 셈입니다. 한국 교회가 엄청난 분열과 갈등의 역사를 겪으면서 교권 정치가 너무 강한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성도들의 교제의 장이 아니고, 세상 정치보다 더러운 교권 정치가 행해지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완벽주의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오늘 두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하나는 우리 개인의 삶과 교회의 삶에서 악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의 마태복음 5:29-30절에 호소하고, 마태복음 18:15-17절의 가르침에 호소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치리가 약해져서 교회에서 온갖 짓을 다 해도 버젓이 목사 노릇하고, 버젓이 집사 노릇, 장로 노릇하고 성찬식에 참여하는 상황이 되니까 교회의 거룩성과 순수성이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거룩성, 순수성, 의로움을 견지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악을 제거하려는 노력과 악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반면에, 오늘 이 가라지의 비유를 예로 들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주의는 있을 수 없고, 완벽한 교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어느 교회나 어느 그리스도인의 삶이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세력이 완전히 제거될 때까지는 악과 선이 일부 공존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통치와 거기에 대항하는 사단의 통치가 일부 공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판단을 잘해야 합니다. 이 사단의 악의 통치를 뿌리 뽑는 데 있어 뽑으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아까 전자를 강조했습니다. 도리어 밀의 손해가 일어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는 성령의 역사로 옵니다. 그런데 그 성령의 역사는 누가 받습니까? 겸허하게 마음이 열려진 자가 받습니다. 자기 일을 내세우는 자는 자기의 일을 성령의 역사로 동일시하는 사람은 항상, 아까 예로 든 신사참배 이후의 한국 교회의 분열의 역사에서, 고대 교회의 로마 제국의 핍박의 역사에서 했듯이 이상 분열이 일어나고, 분열은 더 큰 악을 조장하고 더 큰 아픔을 가져오며,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 더 큰 피해를 가져옵니다. 자, 여러분들 오늘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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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3:24-30,36-43 밀과 가라지의 비유 /김세윤 마13:24-30,36-43 밀과 가라지의 비유 /김세윤 Reviewed by □□□ on January 27, 2025 Rating: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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