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9:3-19,막2:13-22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최우식

 


최우식목사/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단 9:3-19/막 2:13-22)


 


   * 이 설교는 영뎃님의 설교 "잔치할 때와 금식할 때"를 주제를 기도로 하여 작성한 것입니다.


 


새 중에는 참새가 있고, 독수리가 있습니다. 낮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참새는 쉴 새 없이 날개를 푸드덕거립니다. 잠시라도 날개 짓을 멈추면 이내 땅에 떨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높은 창공을 나는 독수리는 힘들게 날개 짓을 계속하지 않고 날개를 활짝 펼친 채 거의 움직이지 않아도 상승기류를 타고 멀리 날아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높은 차원의 신앙을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은 참새처럼 파닥거리지 않아도 독수리처럼 힘들지 않게 유유히 날면서, 밝은 눈을 가지고 멀리 보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세상 중심 신앙과 하나님 중심 신앙의 차이는 마치 참새와 독수리의 차이와도 같습니다.


세상을 중심적으로 하여 자기중심적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은 수많은 세상 것들을 이루기 위해, 또 내가 가진 세상 것들을 지키기 위해 마치 참새가 땅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날개 짓을 해야 하듯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중심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날개를 달고, 독수리처럼 높은 창공에 올라가 하늘 소망을 보는 눈을 가지고 여유 있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오늘 구약과 신약 두 곳의 말씀을 봤습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을 중심한 신앙을 가지고 독수리처럼 날개 짓을 하며 높이 날고 있는지, 아니면 세상을 중심하여 사는 신앙을 가지고 참새처럼 날개 짓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중심한 신앙으로 무장하여 높은 하늘을 나는 독수리 같은 믿음과 축복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하면서 두 본문을 중심으로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라는 설교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 중심 신앙과 세상 중심 신앙은 그 차원이 하늘과 땅처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세상 중심 신앙으로는 하나님 중심 신앙을 결코 올바르게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막 2장의 배경을 보면,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를 걸어가시다가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레위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 마태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에게 다짜고짜로 “나를 좇으라”(막 2:14) 말씀하시니, 마태는 즉시 예수님을 따라갔고,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막2:15-16은 이때의 모습을 말씀해 줍니다.


“그(마태)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지금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간에 논쟁이 시작된 배경은 바로 평범한 식탁에서부터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전통에 따라 금식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죄인이라고 여겨 멸시하고 있는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규칙적으로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습니다.


그래서 전통에 따라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똑 같이 금식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인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16절)라고 지적했고, 어떤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당신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금식을 하지 않느냐?”(18절)고 지적한 것입니다.


자기들이 만든 세상적 전통과 자기중심적 신앙을 중시하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전통을 무시하고, 금식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모습을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그들이 천시하고 멀리하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어 바리새인들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느냐?”고 힐책을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전통을 무시하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경건치 못한 부류의 인간들로 매도하려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세상 중심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신앙을 가지고 살면 내용보다 형식에 치우치는 믿음, 죄인들을 사랑으로 용서하고 받아드리기 보다는 정죄하고 배척하는 신앙인이 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사는 신앙으로 무장하여 형식보다 내용을 더 중요시하고, 정죄와 배척보다, 사랑으로 용서하고 포용하는 복음신앙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중심 신앙과 세상 중심 신앙의 차이에 대해 21절에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여기서 “생베 조각”은 새로 짠 천으로, 아직 표백하지 않아 대단히 질기고 신축성이 있는 새 옷감입니다. 이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신앙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낡은 옷”은 낡아서 약간의 힘만 가하여도 쉽게 찢어질 수밖에 없는 옷을 말합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의 자기중심적이고 세상 중심적인 사고방식과 세례 요한의 교훈을 의미합니다.


 


생명력을 잃고, 세상 중심적이고 자기중심적이 된 신앙은 사람을 정죄하고 책임을 전가하여 그 관계가 적대적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사는 신앙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인간의 죄를 끌어안았듯이 하나님의 은혜로 먼저 자기를 살피고, 사랑으로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여 화목을 이뤄 천국 백성으로 소망 가운데 살 수 있게 합니다.


 


예수님은 22절에서도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의 비유로도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여기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세워진 하나님 중심 신앙을 의미하며, “낡은 가죽부대”는 바리새인들의 세상중심적 전통과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을 중시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따라서 생베 조각과 낡은 옷,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부대 비유는 ‘세상과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사는 신앙은 예수님으로 세워진 하나님 중심적 신앙을 이해할 수도 없고, 함께 할 수도 없다’는 것을 비유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주로 염소 가죽으로 부대를 만들어서 물이나 포도주를 담는 용기로 사용했는데, 이런 가죽부대는 낡게 되면 얇아지고 신축성을 잃게 되어서 쉽게 터져버립니다.


그러므로 낡은 가죽부대에 새로 담근 포도주를 담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특히 새 포도주가 발효되면서 생기는 가스의 압력으로 낡은 가죽부대는 터지게 되어, 새 포도주와 가죽부대를 모두 못 쓰게 되고 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기 전의 사고방식에다가 좀 더 선해지고, 좀 더 좋아지는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여전히 ‘선한 행실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 안에서 발견되는 죄의 모습과 허물과 못난 모습을 보면서 ‘내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에 사로잡혀 그 신앙생활이 조금도 기쁘지 아니 하고, 오히려 괴롭기만 하고, 자유함이 없고, 그 결과로 남을 정죄하여 자기를 보호하려고 합니다.


이런 교인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세상적 사고방식과 자기중심적 판단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귀한 신앙선언을 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리고 사도 바울은 연이어서 그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들에게 엄하게 명령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 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권면하신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5:18-20)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삶의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화목을 이룬 관계가 되신 것처럼,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부탁하신 말씀대로 화목하는 직책을 다 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으로 하나님과 먼저 화목을 이루고, 그 신앙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일에 사신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예수님을 만나 믿기 이전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간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 그 죄를 용서받고, 전혀 새로운 가치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구원 받은 감격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신앙생활을 하여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 소망이 없이 절망 가운데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 소망이 넘치는 삶으로, 근심과 염려 가운데 살다가 평안한 마음을 가지는 사람으로, 불평과 원망의 사람이 기쁨과 감사의 사람으로, 자기만 알던 인색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나누고 베푸는 사람으로, 교만과 혈기와 시기로 가득 차 있던 사람이 겸손과 온유와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까?


 


‘세상에서 겪게 되는 많은 시련과 박해 중에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다윗처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4-5)라고 얼마든지 간증할 수 있습니다.


늘 예수님 중심으로 하여 산 사도 바울처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라고 선언할 수 있습니다.


이 다윗의 간증과 사도 바울의 선언은 바로 하나님을 중심한 신앙에서 나온 신앙고백입니다.


다윗이, 사도 바울이 이렇게 하나님을 중심하여 사는 신앙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모든 짐을 맡아 주시고 담당해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다 내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대신 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든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초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천국잔치에 초청해 주셔서 우리의 모든 짐을 맡아 주실 뿐 만 아니라, 도와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한 소년이 참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부모는 거의 매일 싸웠습니다. 소년은 자기 부모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을 평생에 딱 한번 봤는데, 13살 때 부모님이 법정에 서서 이혼을 할 때였습니다. 그 정도로 소년은 어렸을 때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점점 자라면서 자기의 상처를 예수님의 말씀과 은혜로 극복했습니다.


이 분이 바로 현존하는 세계 최대의 신학자 하워드 헨드릭스 교수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가 그토록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믿음 속에 넘치게 되면, 우리는 어떤 상처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그러한 모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병든 영혼을 치유하시고, 위로하시고, 감싸주기 때문에, 우리 상처는 그 무엇이든지 치유 받게 되는 것입니다.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 큰 상처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에서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15:11)고 약속하셨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복음을 전하다 매 맞고 옥에 갇히는 시련 중에 있으면서도 기쁨이 충만하여 모든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하나님 중심 신앙으로 살면, 성령님이 우리 마음을 만져주시고 치유하여 주셔서 우리의 삶은 천국잔치집이 되는 줄 믿습니다.


 


모로코 섬의 성자 다미안의 감사를 아십니까? 저주받은 천형이라고 불리던 문둥병 환자들이 하나씩 둘씩 모여들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모든 문둥병자들을 집단으로 거주하게 된 저주의 섬 모로코 섬에 복음을 가지고 들어갔던 선교사요, 끝내는 자신도 그 문둥병에 걸려 일생을 문둥병자들과 함께 하였던 최고의 성자 다미안은 문둥병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고, 단신으로 모로코 섬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모든 사회와 국가와 종교와 사람들로 부터 소외당하고 외면당해온 문둥병자들은 철저하게 그를 외면하고, 다미안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 했습니다.


다미안의 헌신적인 선교로 그 저주의 섬에 이윽고 한 사람 두 사람의 신자가 생겨나게 되고, 서서히 복음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대다수의 문둥병자들은 복음을 믿으려 하지 아니하고, 다미안의 복음 사역을 거절하고, 방해하였습니다.


 


다미안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문둥병자들이 왜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도 저 사람들과 같은 문둥병을 내려 주옵소서. 그래서 저도 그 천형의 고통을 함께 누리면서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모로코 섬에 들어 간지 6년째 되는 어느 아침에 평소처럼 다미안은 차를 마시기 위해서 물을 끓이다가 그 뜨거운 물이 실수로 자신의 발등에 떨어졌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뜨거운 물이 발등에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뜨거움도, 아픔도, 감각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바로 다미안도 문둥병이 걸렸던 것이었습니다.


순간 다미안은 그 자리에 끓어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저도 저 문둥병자들에게 설교할 때에 ‘여러분’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우리는’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당신들 문둥병자가 아니라, 우리 문둥병자들은’이라고 설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이 기쁨의 문둥병을 주시오니, 정말 감사합니다.”


이 마음이 하나님 중심신앙으로 살아 구원 받은 자, 세상적 사고방식과 자기중심적 신앙을 버린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응답으로 받아 가지는 기쁨과 감사입니다.


 


오늘 구약 본문에 나오는 다니엘이 바로 하나님을 중심한 신앙으로 산 증인입니다.


 


다니엘은 한 마디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이 얼마나 신실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산 믿음의 사람인지, 얼마나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산 사람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단2:17-18에 보면, “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동무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고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사 자기 다니엘과 동무들이 바벨론의 다른 박사와 함께 죽임을 당치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구하게 하니라” 하여 친구들에게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다니엘은 위급한 때를 기도로 극복했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자기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기도하고 감사하며 그 상황을 하나님 앞에 의뢰하고 있는 기도의 사람 다니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단 9:3에서 다니엘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다니엘은 나라가 바벨론에 의해 정복당한 아픔을 생각하며,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간절한 기도와 금식이 필요한 때가 있는데, 그러한 때에 간절히 기도하며 때로 금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대학생 시절에 예수를 믿어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형식적이고,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었습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믿고, 믿지 못할 것은 적당히 덮어두는, 도마처럼 의심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가 군대를 갔는데, 카투사로 미군들과 함께 비무장 지대를 지키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미군 5명과 함께 젊은이는 밤중에 비무장 지대로 매복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너무도 캄캄하여 목적지로 가는 도중에 방향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엉뚱하게 적군의 초소 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적군의 초소에서 총알이 비 오듯 날아오는데, 젊은이 일행은 어디로 가야 안전한 곳으로 피할 수 있는지 방향을 전혀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는 땅바닥에 엎드려 난생 처음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 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그런데 그때 그 무서운 총소리 속에서 대성동에 있는 교회에서 종소리가 너무도 선명하고 또렷하게 들려 왔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는 그 종소리의 방향을 기준으로 삼고 엎드려 기어서 사지를 벗어났습니다. 살아 돌아오고 보니, 너무도 그 종소리가 귀하게 들리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서야 그 젊은이는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들으시고, 교회의 종소리를 들려주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깨닫고,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증거가 되어 젊은이는 제대를 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믿음을 증거하고 가르치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약속의 말씀을 따라 기도했습니다. 성도도 약속의 말씀을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그 약속의 하나님께 회개하고,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열 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와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6절) 다니엘은 지금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지 않고 불순종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우선적으로 처리하고자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여호와께서 그 종 선지자들에게 부탁하여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치 아니 하였음이니이다.”(10절)


6절 말씀을 더 구체적 죄목으로 말합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세우신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이 우리의 실수였고, 우리의 문제였고, 우리의 잘못이었음을 자복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주(主)의 율법을 범하고 치우쳐 가서 주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으되, 곧 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 가운데 기록된 맹세대로 되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범죄 하였음이니이다. 주께서 큰 재앙을 우리에게 내리사 우리와 및 우리를 재판하던 재판관을 쳐서 하신 말씀을 이루셨사오니, 온 천하에 예루살렘에 임한 일 같은 것이 없나이다.”(11,12절) 고백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다니엘처럼 나의 죄와 민족의 죄를 자복하고 버리기 위해 때로 금식하며 기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지고 응답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에게는 살면서 여러 가지 많은 위기가 올 수 있는데, 그 위기 중 가장 큰 위기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다니엘은 심각한 위기에 대해 간절한 기도와 금식으로 대응할 줄 알았습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말 심각했을 때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들은 심각한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구약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식했던 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첫째, 금식을 통해 ‘이제부터 내 삶의 우선순위는 지금 기도하고 있는 바로 이 문제라’는 것을 선포했습니다.


‘이 문제는 내가 해야 할 여러 일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이 순간 내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위한 기도를 내 생애의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삼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둘째, 금식은 ‘밥 먹는 시간까지 아껴 가면서 기도할 만큼, 기도하는 그 문제에 모든 신경과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하여 매달린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은 ‘나의 우선순위가 내가 지금 기도하고 있는 이 문제에, 그리고 기도 그 자체에 있으며, 다른 무엇보다 여기에 내 삶의 모든 것을 쏟고자 합니다. 심지어 밥 먹는 시간을 아껴가며 나는 기도합니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다니엘도 자신이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역사적 시점에 서 있음을 깨닫고, 기도와 간구를 결심했고, 금식하였습니다.


다니엘은 금식하되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기도하였습니다.


 


다니엘은 심각한 위기를 기도로 극복하는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다니엘은 여러 번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 위기를 만날 때마다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 위기를 뚫고 나갔습니다.


 


우리 늘푸른교회가 능력을 상실하고, 힘없이 맥없이 된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기도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늘푸른교회에 있어 가장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가 무엇일까요?


물론 저의 부족함이 심각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 여러분의 신앙자세도 심각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하나의 드러난 문제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정말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저와 우리 성도님들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식어진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식어진 것을 빌미로 틈을 타 목사와 성도의 허물이 보이게 하여 우리를 격동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 질 때 기도와 금식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막 2:19-20에서 말씀하십니다.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신랑을 빼앗길 날”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여 죽으시는 때를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십자가의 수난은 믿음이 연약한 제자들에게 그들의 믿음을 뿌리까지 흔들어 놓는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금식이 필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러한 순간이 있습니다.


때로는 큰 환란으로, 때로는 믿음의 회의로, 때로는 죄의 유혹으로, 때로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주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식어질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도 사라지고, 잔치하는 즐겁고 행복한 마음도 사라지는 바로 이때가 가장 기도와 금식이 필요한 때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모두 형식적이고 생명이 없는, 세상 중심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신앙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있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으로 무장하여 잔치하는 즐거움을 가지고 믿음 생활하는 성도, 때로 기도와 금식이 필요할 때 기도함으로 큰 믿음으로 무장하여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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