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세상에 고난이나 고통이나 고민이 없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더욱이 예수 믿는 사람에게 왜 고난이 있는지? ━ 남보다 열심히 교회에도 다니고 기도도 열심히 하는데, 어려움을 당하는 분들을 보면 민망할 때가 있다. 또 처음 예수 믿는 분들 가운데, 얼마 동안 열심히 교회에 다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어보면 낙심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예수 믿고 가정에 어려움이 있어서 그만 다니기로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전에 어떤 새 신자는 칠곡에서 돼지를 먹이는데, 돼지 새끼가 죽어서 교회에 다니지 않겠다고 낙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해서 어려움이 없다거나 고난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구약 이사야 43장에 보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자,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너는 내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후에 그리고 2절에 보면,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사 43:1~3상)
무슨 말씀인가? 하나님의 구속을 받은 사람, 다시 말해서 예수 믿는 사람에게 물 가운데로 지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강을 건너는 일이나, 불 가운데로 지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고,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믿는 사람도 병에 걸리기도 하고, 자녀가 대학 입시에 떨어지기도 하고, 사업에 실패하기도 하며, 우환질고를 당할 수 있다. 그러나 다 같은 우환질고(憂患疾苦)이지만, 그 당하는 목적이 다르고 대하는 방법이 다르고 자세가 다릅니다. 의미가 다른 것이다.
욥은 고통이 절정에 달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욥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精金) 같이 나오리라" 이 신앙고백에는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첫째는, 고난과 고통, 자신의 사정을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이고, 둘째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단련하시는 훈련과정이라는 믿음이며, 셋째는, 고난의 결과 자기는 정금(精金) 같이, 즉 불순물이 완벽하게 제거된 순금이 된다는 확신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고난 중에 있는 성도가 있는가?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는가? 오해를 받고 믿음이 흔들리며 하나님의 사랑까지 의심하시는 분이 계시는가? 하나님은 나의 사정을 모르시고 내가 당하는 고난과 고통을 외면하신다고 생각되시는 분이 있는가? 욥의 이 고백을 다시 들으시기 바란다.
우리를 정금 같이 만드시기 위해 지금의 고난이 있다. 우리를 더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 사용하시기 위해 지금 훈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시어 항상 주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해 지금도 우리를 연단시키고 단련시키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바울 사도에게도 고난이 있었다. 바울에게만 고난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난'이라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구약의 요셉이 그랬고, 모세도, 다윗도, 다니엘도 다「고난의 대학」을 졸업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되었다.
오늘 본문에는 대사도, 바울이 당한 고난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바울에게 찌르는 가시가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 '찌르는 가시'가 무엇인지, 성경에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잘 알 수 없지만, 학자들은 '이것이 바울의 육체적 질병을 가르킨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한다. 다시 말하면, 바울 사도에게 육체적 질병이 있었는데, 그는 이 병을 낫게 해달라고 세 번이나 주님께 기도드렸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오히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으로 응답해 주셨다. 오늘의 본문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이 부분을 공동번역 성서로 한 번 읽어보겠다. 7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이다.
"내가 굉장한 계시를 받았다 해서 지나치게 교만해지면 안될 테니까 나는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얻었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곧 괴롭혀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고통이 내게서 떠나게 해 주시기를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다만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번번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더 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겠습니다"(고후 12:7~9)
여러분, 이해가 되는가? 바울 사도는 자신에게 있는 고통, 육체의 찌르는 가시를 없이해 달라고 세 번이나 주님께 기도드렸지만, 주님의 대답은 "너는 이미 내 은혜를 충분히 받았다"라고 말씀하셨다. 생각해보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 같습니다. 고통을 없이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고통은 없이 하지도 않은 채 '너는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는 말씀은 동문서답이요 역설 같은 말씀이다. 그러나 바로 이 패러독스(Paradox)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진리이기도 하다. '고난이 곧 은총이라'고 하는 것은 확실히 놀라운 역설이다. 그러나 이 역설은 우리 크리스쳔의 세계에서는 대단히 확실한 진리인 것이다.
오히려 가난이 축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육체의 질병이 영혼을 치료하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으며, 우리에게 닥쳐오는 고통과 시련이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어진 이 고난이 어떻게 해서 유익한 것이 되는지? 어떻게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이 되는지,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보자.
1. 고난은 인간을 죄악으로부터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목적으로 주어질 때가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할 때, 하나님께서는 막대기를 드셔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셨다. 또 신약에 나오는『탕자 비유』에서도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먹을 것이 없어 배를 움켜쥐는 고난 때문에 아버지 생각했다고 했다. 어느 장로님은 6․25를 회상하면서 "6․25는 나를 회개하게 하고 예수 잘 믿게 하는 은총의 시기였다"고 말했습니다마는, 확실히 인간은 이런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 같다.
세상에서 부자가 되어 육신의 만족과 안일에 젖어서 하나님이니, 교회니, 신앙이니 하는 영적인 문제에 추호의 관심도 없이 오로지 사업과 장사, 그리고 명예라는 현실 문제에 전념함으로 선택의 문제를 외면하고 버림받은 기아로 살아가기보다 차라리 가난이라고 하는 고난이 계기가 되어 영적인 문제를 해결할 때 어느 것이 더 나은 축복이겠는가? 오늘 이 자리에는 육신의 질병이나 가난, 자녀의 문제 등 고난이 없었다면 예수 믿지 않았을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고난이 계기가 되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된 것은 정말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도 고난 당하는 것이 유익이라고 할 수 있다.
2. 교육과 훈련의 의미로 받는 고난이 있다.
아마 남자 교우들은 군대에서 기합을 많이 받아보신 줄 안다. 요즈음은 그런 무지막지한 기합이 없는 줄 압니다만, 그저 "이유는 없지만 목적이 있는 기합이다" 하면서 기합을 준다. 『이유는 없지만 목적이 있는 기합』는 말이 그 당시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니 이해가 된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도 마찬가지다. 이 고난이 왜 오는지, 또 무엇 때문에 이런 아픈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시고 우리를 연단하시며,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훈련시키기 위해서 때로는 이유 모를 고난을 주시는 것이다. 욥이 받은 고난이 그러했고,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가 받은 고난이 여기에 속하는 고난이다.
캐나다 토론토(Toronto)에 가면 거대한 수족관이 있다. 그 수족관에는 바다에 있는 모든 물고기들과 해양 생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처음에 그 수족관에다 물고기들을 넣을 때의 이야기다. 이 수족관에 태평양 연안의 많은 물고기 종류를 전시할 준비를 하고 자동차로 운송계획을 세웠다. 태평양의 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온도와 수압이며 햇빛의 양(量)도 그대로 했다. 많은 물고기들을 싣고 두 주일이 걸려 토론토에 도착했는데, 와서보니 물고기들이 모두 죽었다. 태평양 바다의 조건과 꼭 같이 해서 운송했는데 고기들이 모두 죽은 것이다. 몇 번이나 시도를 했지만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수족관의 학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 년을 두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그러다가 한 가지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물고기들에게 적당한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물고기 운반 차량에 바다의 악동이라고 하는 문어새끼, 상어새끼 같은 무법자들을 넣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태평양 바다의 온도와 수압, 햇빛을 맟춰 편안히 2주일 동안 물고기들을 수송했을 때는 모두 죽었는데, 괴상한 악동들과 같이 올 때는 한 마리도 죽지 않고 다 살았다는 것이다. 문어새끼들과 상어새끼들이 물고기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니기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고, 정신을 차리고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물고기들이 다 살았다는 것이다.
그렇다. 바닷 속의 여러 물고기들이 살 수 있는 조건은 항상 바다 밑에 있는 조류의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의지와, 수많은 악동들, 문제어들에서 벗어나려는 긴장의 의지가 살아가는 지혜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도 오직 편안과 안일만 주어진다면 그 영혼은 결국 타락으로 죽음 가운데 빠질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에 주어지는 시련과 고난과 아픔들은 결코 상처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악동들, 악사건들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지혜와 의지 그리고 성숙된 인격을 키울 수 있게 해 준다는 교훈을 우리는 이 어류 수송의 예(例)에서 배워야 하겠다.
3. 또한 고난은 인간을 보다 깨끗하게 만드시려고 뜨거운 용광로를 지나게 하는 성결의 의미가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확실히 믿음이 있다. 그러나 믿음뿐만 아니라, 동시에 다른 것들도 많이 있다. 욕심도 있고, 불같은 성격도 있고, 미움이나 시기, 질투 같은 것들이 있어서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 혹은 세상적인 것을 자랑하고 싶고 뽑내고 싶고 교만에 빠지게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불 속에 들어가고, 시험을 만나고, 환난을 겪게 되면 용광로 안에서 불순물들이 녹아버리듯이 이런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은 다 녹아 없어지고 마지막에는 순수한 믿음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7절에서 말하기를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고, 가도 바울은 로마서 5장 3절 이하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고난의 가시는 땅과 하늘, 즉 우리 인간과 하나님의 보좌를 연결하는 사닥다리이며, 우리를 보다 선하게, 깨끗하게, 그리고 훌륭하게 만들어주는 위대한 스승인 것이다. 우리 가운데 육신의 질병으로 고민하는 사람이 있는가? 사업이 잘 안되어서 곤경에 빠진 분들이 있나? 아니면 가정의 문제가, 또는 자녀의 문제가, 생활의 문제가 고통스러운 가시와 같이 아프게 찔려오는 고난을 당한 분들이 있는가? 절망과 시험 가운데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가는 분이 이 자리에는 없나?
여러분의 그 위기(危機)는 하나님의 기회이다.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처럼, 여러분의 연약함과 고난의 가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여러분에게 머무는 거룩한 장소이다. 이제, 여러분의 지혜나 인간적인 조건을 자랑하지 말고 온전히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고 기도하시기 바란다.
일찍이 일본의 하천풍언(賀川豊彦)은 말하기를 "고난은 인생의 부록이요 예술이라"고 하였지만, 우리 크리스쳔들이 고난 가운데 육적으로 연약을 느낄 때, 그 영성(靈性)은 능력이 무한하신 주님께 접근해지며, 거기에서 새로운 위로와 힘을 얻는 것이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믿음이 자라고,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겸손을 배우고, 우리의 연약을 깨닫고, 한계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모난 부분, 울퉁불퉁한 덩어리들이 깨트려지고 부셔져서 진흙과 같이 된 후에,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새로운 질그릇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은 토기장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토기장이다. 아무 쓸모없는 진흙과 같은 우리들을 때로는 부서뜨리기도 하시고, 때로는 아예 반죽을 만드셔서 짓이기고 밟으시다가 때가 되면 우리를 새로운 창조물, 위대한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만드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다 고난을 받았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였던 것이다.
시편 119편 71절 말씀을 한번 찾아보자(P. 892).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다고 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지도 못했다. 그러나 고난 당하고 나서, 고난이 나를 연단한 후에는 비로소 바르게 행할 수가 있었다는 말씀이다.
그 다음 71절 말씀을 또 보자. 시편 119편 71절 말씀이다.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고난을 통하여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으니,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신앙은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이요 깊은 신앙이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주의 율례,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라고 시인은 고백하고 있다. 고난을 통하여 말씀의 비밀을 깨닫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며,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지어질 뿐 아니라,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언제나 체험하며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란다. 깊은 영성(靈性)의 소유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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