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3:18-19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말씀 묵상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눅13:18-21)

오늘은 한 쌍의 비유로 알려진, 겨자씨와 누룩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음미하게 된다. 이 비유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간단명료하게 주신 말씀이지만 그 해석은 매우 다양하여 혼란스럽다. 교회에 나가는 신앙인들에게는 여러 번 듣고, 또 직접 읽어 본 비유들로 낯익은 말씀이지만 다시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위의 두 가지 비유들의 시작을 “그러므로”라는 접속부사를 사용하여 (제19일에 음미한) ‘안식일 논쟁’(눅13:10-17)의 결과로서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는 내용임을 밝히셨다. ‘18년 동안이나 병마에 붙들려 허리가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인을 치유하셨는데, 그날이 마침 안식일이라서 회당장의 분노를 샀다. 어떻든, ‘짐승만도 못한’ 인간 이하의 인간으로 취급 받던 그 여인을 고귀한 신분인 “아브라함의 딸” 곧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회복시켜주셨다.

“사탄의 속박”에서 풀려 해방된 ‘아브라함의 딸’은 즉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거기 모인 “온 무리가” 크게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바로 그때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사건들을 목도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무리를 향해 두 가지 비유를 들어 하나님 나라를 재조명하시게 되었다.


첫번째 비유.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18-19절)

그 당시 유대인들이 바라는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아(구세주)가 나타나서 로마제국을 무찌르고 강대한 ‘다윗 왕국’을 다시 세워 세상을 통치할 것으로 믿고 고대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메시아)를 “자칭”하는 예수는 전혀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았다. 유대교 지도자들을 규합해서 힘을 길러도 어려운 판국인데, 예수는 번번이 (대)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사(서기관)들과 충돌하는 것을 보면서, 메시아 왕국에 대한 희망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실망감을 느끼게 된 것 같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오며”(눅11:2)를 간구하도록 말씀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나라’는 먼 훗날, 인간의 힘(무력)으로 건설하는 가시적인 강성대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통해 ‘조용히’ 그리고 “세미한 소리”처럼(왕상19:12), 지금 여기에 임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11:20).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그 나라”를 “하늘나라” “천국” 곧 ‘죽어서 가는’ 사후의 ‘극락 세상’(천당)으로 생각한다.

예수 믿는 이유와 목적을 물으면 대다수 성도들은 “죽어서 천당 가기 위해”라고 서슴없이 대답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사후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들어가는” 장소 개념이 아니다. 도리어 “그 나라”는 우리에게 “임하는” 실상이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제34일 묵상, 눅17:20-21).

하나님의 나라를 Kingdom of God (하나님의 왕국) 대신 Reign of God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합하다.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그때,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지금 여기서 (부터) “살아 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은, 물론, 사후에 영혼으로 ‘들어 갈’ “하늘 나라”(천국)에서,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성취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하였지만, “아직” 완성은 아닌 성격을 지닌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지역적이고 가시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 ‘열매’를 보아 알 수 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인데 이런 것을 금할 법은 없습니다”(갈5:22-23, 새번역).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예수께서 두 가지 짧은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다.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18-19절)

겨자씨의 비유는 다른 복음서(마태, 마가)에서도 나오지만, 그 강조하는 바가 각기 다르다. 마태(마가)는 겨자씨가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13:32. cf.막4:32) 하였다. 겨자씨는 그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매우 작고 보잘것 없는 것을 “겨자씨 같다”고 표현할 정도로, 가장 작은 씨로 통했다.

마태는 매우 작은 (겨자)씨앗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은 사소하지만 점점 확장되어 큰 나무처럼 될 것을 예고하였다. 마태의 예고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은 갈릴리 출신 하찮은 12명으로 시작하여 거대 로마제국 전역에 퍼졌고 급기야 전 세계로 확장되고 있지 않은가!

마태(마가)와는 달리 누가는 겨자씨의 크기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공중의 새들이” 모여들어 “그 가지에 깃들이”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이루며 사는 그리스도인(성도)들이 모인 신앙 공동체가 (가시적) 교회이며, 참된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대표한다. 성경에서 새들은 정결한 새, 부정한 새, 그리고 (비둘기처럼) 순결을 상징하는 좋은 새, 그런가 하면 악하고(마13:4,19) 사탄을(막4:4,15) 상징하는 새도(눅8:5, 12) 있다. 그러나 겨자씨 비유에 나오는 “공중의 새들”을 그렇게 분류하기 보다는 누가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한 해석이다. ‘부정한 새’(레11:15) 까마귀까지도 ‘기르시고’ 거두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눅12:24).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포용성과 다양성이 고조되는 동시에 일치를 이루는 공동체로 소개한다. 큰 나뭇가지에 깃드는 ‘공중의 새들’은 세상 모든 민족을 상징한다(겔17:23, 31:6). 누가의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이방 민족들’까지를 아우르는 포용적 공동체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사도 바울이 더 확실하게 밝힌다.

“여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다인, 할례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 타국인, 야만인, 노예, 자유인 따위의 구별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전부로서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십니다”(골3:11, 공동).

“동서남북” 천지사방에서 모여드는(눅13:30) 다양한 민족, 언어, 문화, 인종, 피부색 등 각기 다름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움으로 하나되는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각양의 신앙 형태가 인정받는 곳이다.

어떤 한 사람, 어떤 한 교회, 어떤 한 종단이 ‘모든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 신앙(신학)의 ‘보수’와 ‘진보’가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나(우리)만 옳고 남들은 다 틀렸다고 비판하는 독선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위선으로 질책하셨다. 다름이 틀림이 아니다. 신앙 형태의 다양함과 동시에 예배 의식의 다양성까지도 인정받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한 표현이 각기 다르기 마련이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12:4-6).

내(우리) 체험을 표준화하고 교리화하여 다른 체험을 판단하고 단죄하며 갈라서는 것 역시 독선이며 신앙적 오만이다. (지구상의 기독교가 40,000여 교파로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에 통탄을 금할 길 없다.) 하나님 나라의 그늘에 쉼을 얻으려 모여드는 ‘공중의 새들’은 조건이나 차별 없이 환영받아 마땅하다.


두번째 비유.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20-21절)

이 비유야말로 그 해석이 분분하고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실정이다. 누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판이하게 된다. 누룩은 성경에서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다수 주석가들의 견해이다. 유대인들에게 누룩이란 악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통했다. 발효를 부패의 과정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급히 나올 때 준비한 떡·빵에는 누룩을 넣지 못하게 했고, 그 후로 유월절에는 무교병(누룩 없는 떡)만을 사용한다(출12:39). 그래서 유월절이 ‘무교절’로 불린다(출12:17). (일주일 동안 지키는) 유월절 첫날에는 집 안의 모든 누룩을 내다 버려야 한다(출12:15). 하나님께 바치는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을 수 없다. 그러나 화목제의 떡에는 누룩을 넣도록 되었다(레7:13). 칠칠절 곧 오순절 떡에도 누룩을 넣도록 하였다(레23:17). 하나님께 바치는 모든 제물에 누룩 사용을 금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에 누룩이 항상 부정적인 의미로만 사용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신약성서에서는 누룩이 완연히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잘못된 “교훈”(마16:11-12)과 그들의 “외식”(눅12:1)을 “누룩”에 비유하였다. 사도 바울은 누룩을 “악의”와 “악독”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고전5:6-8).

‘불순종의 거짓 교훈’이 온 교회에 확산됨을 “작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갈5:9)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이나 바울 사도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누룩 자체를 ‘위선’이나 ‘외식’ 또는 ‘악의와 악독’이라 말한 것이 아니다. 누룩이 빠르게 확산되고 파급되는 것처럼 ‘위선과 외식’ 그리고 ‘죄악’ 역시 급속히 확산되는 것을 시사한다.

그런 관점에서 예수님의 누룩 비유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교부들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우화적) 해석법이었다. 복음이 처음에는 “가루 서 말에 넣은” 누룩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시작되지만, 급기야 ‘온 떡 덩이’ 곧 ‘온 세상’에 퍼져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키게 된다고 해석하는 주석가들이 많다. ‘겨자씨’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뜻하고, ‘누룩’은 성도 개인의 내적 성장과 변화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누룩의 부정적인 면에 집착하여 ‘누룩 비유’를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주석가들도 많다. 누룩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고, ‘악의 원리’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하여 온 세상에 두루 퍼져나가지만, 그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깊숙히 스며드는 ‘누룩’ 곧 사탄의 흉계로 교회는 점점 부패하고 타락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실현될 때까지 교회는 사탄의 누룩으로 타락하게 될 것이라는 해석이다.

‘누룩’의 해석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럴싸하지만, 누가복음의 특성과 누가의 고유 신학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공관복음이라는 천편일률千篇一律적 성경해석의 오류에 빠지기 쉽다. 앞서 언급했지만, 겨자씨의 비유에서 마태(마가)는 (세상에서)“가장 작은 씨앗”이 자라 큰 나무가 된다는 것에 역점을 두지만, 누가는 씨알의 크기보다는 그 씨가 큰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깃들이는’ 상황에 역점을 둔다. 그렇듯, 누룩의 비유 역시 누가의 특성과 신학적 고유 관심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마태(마가)는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의 배에 앉아 가르치셨고, ‘많은 무리는 해변에’서 듣고 있을 때, 먼저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천국’에 관해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주셨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누가의 상황은 다르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다가, 거기에 있는 18년 동안 허리가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인을 고쳐 주시며, ‘아브라함의 딸’의 고귀한 신분을 회복시켜 주셨던 일을 우리는 어제(제19일, 눅13:10-17)묵상하였다. 그 일로 회당장과 ‘안식일 논쟁’이 있었던 직후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주신 것이다.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눅13:20-21)

그때 거기서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맛 본’ 유대인들은 예수의 ‘누룩 비유’를 들을 때, “아브라함”의 이름을 들었던 차에 ‘한 여자가 가루 서 말에 누룩을 넣었다’라는 말을 듣고 즉각, 사라가 떠올랐을 것이다. 성경에서 ‘가루 서 말’로 빵을 만들어 ‘천사들’을 대접한 ‘여자’는 (그들의 조상) 사라뿐이다.

“아브라함이 급히 천막으로 들어가 사라에게 고운 밀 가루 세 말을 내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고 이르고”(창18:6, 공동).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딸’을 언급한 직후에 “여자가 밀가루 세 말의 반죽에 누룩을 넣었다”라는 말씀을 주신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밀가루 세 말은 50파운드(22.68kg)로서, 여기에 누룩을 넣고 발효시켜 빵을 만들면 120명의 식사량으로 충분하다. 이렇게 많은 양의 가루 반죽은 큰 잔치 때에나 할 수 있지 보통 가정에서 일상용으로는 하지 않는다. ‘가루 세 말’이란 ‘대 향연’을 암시한다. 물론 사라가 천사 3명(하나님 포함.창18:2)을 대접하기 위해 “밀가루 세 말”을 사용하였다. 여기에 신비가 숨겨진 것 같지 않은가? 아브라함과 사라가, ‘사람 모양으로 이 땅에 내려오신’ 야훼 하나님 앞에 대 향연(화목제?)베푼 것을 뜻한다.

‘누룩 비유’와 한 쌍을 이루는 ‘겨자씨 비유’에서 누가는 ‘공중의 새들이 깃들인다’에 역점을 두어 ‘세상 모든 민족’이 ‘하나님 나라’로 환영받게 될 것을 암시하였듯이, 여기 누룩 비유에서도 ‘하나님 나라’ (메시아)대 향연을 위한 충분한 양으로 “부풀리는” 기능을 암시하는 것이다.

하찮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고도 12 바구니가 남지 않았던가!(눅9:13-17). 동서남북 사방에서 ‘하나님 나라 잔치’로(눅13:29) 모여드는 모든 사람·민족들을 ‘생명의 떡’으로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양’으로 ‘부풀리는’ 누룩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3-35).

주여, 이 생명의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아멘.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1. “죽어 천당 가는 것”과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2. 누가의 관점에서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해석하는 요지는 무엇인가?

3. 성경에서 누룩은 항상 부정적인 의미로만 사용되었는가?


●기도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 나라를 지금 여기서 부터 (이루며) 살아내도록 성령님의 도움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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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3:18-19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눅13:18-19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Reviewed by □□□ on February 19, 2025 Rating: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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