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3:13-18 하나님 섬김에 유익이 무엇입니까?

오래 전,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던 초기의 이야기입니다. 평안북도 정주에 앞을 보지 못하는 점쟁이가 있었습니다. 그 점쟁이는 점을 잘 보기로 소문이 났고,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 점쟁이 옆에 살던 한 신앙인이 그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했지만, 그는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밥이 나옵니까? 내 눈이 떠진답니까? 도대체 예수를 믿으면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단 말입니까?’ 하고 거절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전도자가 이 점쟁이의 집에 와서 그에게 전도지를 전해주며 예수를 믿으라고 말했습니다. 당연히 점쟁이는 그 전도자에게 당장 집을 나가라며 호통을 쳤습니다. 그런데도 그 전도자는 계속해서 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신이 계속 이렇게 살면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은 물론이고, 당신 자손들은 다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전도자는 그 집을 나왔지만, 이 점쟁이는 그 날 이후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전도자가 한 그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거짓말로 점을 쳐서 돈을 많이 벌었지만, 자신이 죽으면 지옥에 갈 뿐만 아니라 자식들의 앞날도 불행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몇날며칠을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그는 결국 병을 얻고 말았습니다. 병상에 누운 점쟁이는 그 때 그 전도자가 준 전도지가 생각나서 부인에게 전도지를 꺼내 읽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 전도지에 있는 말씀을 듣는 순간 그의 마음에 성령의 감동이 임했고, 그는 몸을 추스르고 그 다음 주일에 교회에 찾아갔습니다. 그 후로 그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점쟁이 일을 그만 두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교회당을 짓고 학교를 지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오갈 데 없는 가난뱅이가 되었고, 그 소식을 들은 한 선교사님이 그에게 교회에서 관리인으로 봉사하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병을 고침 받게 되었고, 그게 자신이 예수 믿고 난 후 얻게 된 큰 유익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식들에게도 복음을 가르치며 신앙생활을 하도록 종용했습니다. 자신의 자녀들에게도 믿음의 유익이 나타나기를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그 점쟁이의 아들 중 하나가 선교사님에게 영어를 배우면서 기독교 학교인 신성중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프린스턴 대학을 거쳐 예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연희전문대학교 교수를 거쳐 연세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용제(庸齊) 백낙준(白樂濬, 1895-1985) 박사입니다. 백무당으로 불리던 백낙준 박사의 아버지는 정말 예수를 믿음으로 큰 유익을 얻었습니다. 자신의 병도 고침을 받고, 자식들이 잘 되는 복도 받았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에게 그런 은혜와 유익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진짜 이유는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게 될 어떤 유익이 내게 주어지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지금 당장 얻어지는 유익은 없을지라도, 우리는 더 큰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줍니다. 진짜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모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브리서 11:23-26) 성경은 모세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순간에 이르렀을 때 그는 영원한 것을 위해서 세상에서 주어질 유익을 포기했다고 말씀합니다. 바로의 왕궁에서 공주의 아들로 자라는 것은 세상적으로 말하면 타고난 복입니다. 아무나 누리지 못하는 복, 어느 누구도 꿈조차 꿀 수 없는 복을 모세는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바로의 왕궁에서 누리는 부귀영화보다는 자기 백성 - 자기 동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말씀합니다.

모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요약해 보여주면서,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히브리서 11:35-37)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굳이 풀려나기를 원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에 이르는 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믿음 때문에 조롱을 당하고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믿음 때문에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시련을 받아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믿음 때문에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톱으로 켜 죽임을 당하고 칼로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믿음을 위해서라면 궁핍한 생활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 어떤 학대를 당한다 하더라도 그 길을 꿋꿋하게 갔습니다.

여러분, 왜 믿음의 선배들은 그렇게 살아야 했습니까? 우리가 믿는 이 믿음이 그들에게 무슨 유익을 주었습니까? 분명한 것은 그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얻기 위해서 믿음을 따라 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유익들을 다 포기하고 스스로 고난의 길을 갔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믿음의 유익이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행하는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단 말입니까?’ 말라기 선지자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적인 회의론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들 그것이 자신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주전 400년경에 활동했던 선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전 400년경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을 때입니다.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무너뜨리면서 주전 538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 있던 사람들 중 일부가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러 가지 힘든 상황 속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습니다. 그리고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종교개혁 운동을 펼치면서 종교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여전히 그들이 꿈꾸던 나라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윤리적으로, 신앙적으로 부패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비록 종교적인 행위들은 어느 정도 모양새를 갖추었지만, 그 내면에서는 여전히 부패한 모습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율법에서 말하는 절기들을 지키고 있지만, 그들의 삶은 여전히 하나님을 떠나 있었고 죄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렇게 윤리적으로 신앙적으로 부패의 늪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윤택해지지 못하고 여전히 궁핍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종교적인 열심을 갖고 있음에도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위해서 해주신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행위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지적해 주신 말씀이 바로 말라기서의 내용입니다.

말라기 1장에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그들의 행위가 얼마나 거짓된 것인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히 제사를 드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에게 더러운 떡을 드렸다. 눈먼 희생제물을 바쳤다. 병든 것을 제물이라고 가져왔다. 그것이 진정 하나님을 섬기며 경외하는 모습이란 말이냐?’ 만일 총독이나 높은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선물이라면 정성껏 준비한 좋은 것을 가져갈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면서도 사람에게조차 선물로 줄 수 없는 것들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말라기 2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윤리적인 타락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거룩하고 바른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셨는데도, 율법을 바르게 가르쳐야할 제사장들이 율법을 잘못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비윤리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방의 우상숭배자와 결혼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고, 자신의 정욕과 욕망 때문에 조강지처를 헌신짝 버리듯 버렸습니다.

말라기 3장에서는 심지어 십일조와 마땅히 하나님께 드릴 예물조차도 떼먹고 말았다고 꾸짖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를 떼먹고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십일조를 떼먹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어리석음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 말씀이 소개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신앙이나 삶의 모습에서 하나님을 등지며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말 자체도 불신앙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문 14절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열심히 신앙생활 해 봐야 아무런 유익이 없으니 하나님을 섬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들은 신앙생활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윗사람을 섬기는 것만큼도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상관없이 살고 있었고,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는 꾸지람을 들을 정도로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잘못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도와주지 않으신다고, 자신들에게 복을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신앙생활 열심히 해 봐야 아무짝에도 나에게 도움이 안 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봐야 내게 유익이 하나도 없어!’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그들은 율법과 전혀 상관없이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말씀대로 산들 내게 아무 유익도 없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게 어리석은 우리 인간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말씀에 약속된 복을 우리에게 반드시 주십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시지 않습니다.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민수기 23:19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약속하신 바는 반드시 지키십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살면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지켜주시고 그에게 복을 주신다는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지키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복 받기를 바라곤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게 유리한 대로 끌어들여 적당하게 행하고서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씀대로 바르게 행함으로 복을 받을 생각보다는, 적당하게 말씀을 지킨 척만 하고선 복 받기를 원합니다. 마치 말라기 선지자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적당하게 하고서 ‘왜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시지 않느냐?’고 항의합니다. ‘왜 열심히 신앙생활하다고 하는 나에게 유익이 없느냐?’고 하소연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자니 내가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때로는 내 삶에 너무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할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포기하고서 스스로 ‘이만큼이라도 한 것이 어디야! 이제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셔야만 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할 만큼 했어. 그러니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실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게 우리의 착각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것이 적어도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더욱 큰 복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복을 받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슬프게 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모습 속에 잘못된 부분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잘못을 알면서도 거기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회개한들 자신들에게 유익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못을 했을 때 회개하는 것은 무언가 유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신앙인답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회개해야 할 것은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신앙인이 됩니다. 회개 없이는 결코 바른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회개 없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5:25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셔서 농사짓는 것에서 양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허물과 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런 복들을 누리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를 끌어안고 사는 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것들을 누리며 살지 못합니다. 죄가 우리가 마땅히 누리며 살아야 할 좋은 것들을 막아버리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을 따라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풍성히 베풀어 주십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도록 더욱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나 회개는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시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 지금 우리가 누리고 살아야 할 것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죄를 끌어안고 살면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것조차도 누리지 못합니다. 죄가 그것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금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15절입니다.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정직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이 복을 받아 번성해야 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망해야 합니다. 그게 바른 세상이고, 우리가 소망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악을 행하며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더 잘 삽니다. 정직하게 사는 사람보다 다른 사람에게 사기치며 사는 사람들이 더 형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슬픈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삽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불평스러운 마음에 원망이 가득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나도 그들처럼 살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세 살 사람들이 사는 방식을 답습하며 살기도 합니다.

여러분, 로또 복권 사서 1등에 당첨되었다는 사람을 보면 부럽지 않습니까? 누구는 열심히 죽도록 일해도 한 달에 백만 원 이백만 원 벌기도 힘든데, 어떤 사람은 복권을 사서 몇 십억을 번다고 하니 ‘나도 복권이나 사볼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나만 왜 이렇게 고생고생하며 살아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는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이 불공평해 보이고, 때로는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맞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유혹을 받습니다. ‘하나님 계시지 않는 것처럼 내 마음대로 살아볼까?’ 하는 유혹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유혹에 넘어가 세상 사람처럼 살기도 합니다.

그런 유혹을 이기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그리고 그 믿음에 따라 산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법으로 살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불법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의 그런 방법을 따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더욱 믿음으로 우리 자신을 무장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6-18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믿음 때문에 지금의 풍족함을 포기하고 믿음을 따라 정직하게 사는 사람, 교만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고 믿음을 따라 바르게 사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높여주실 날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반드시 올 것이고, 그 때에 정말 누가 잘 살았는지가 판가름 날 것입니다. 지금 떵떵거리며 큰소리치며 살지라도 하나님 심판대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보다, 지금은 조금 부족하게 살지라도 하나님께서 칭찬해 주시고 존귀하게 여겨주시는 것이 더 복된 일입니다. 믿음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지금의 풍요나 형통함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얻게 될 존귀함과 영광을 더 가치 있게 생각하고, 오늘을 정직하고 바르게 삽니다. 그게 신앙인입니다.

여러분, 현실의 유익과 우리의 신앙을 바꾼 채 살지 마십시다. 현실에서는 우리에게 유익이 없어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칭찬해 주시고 높여주실 그 때를 바라보며 믿는 자답게 사십시다.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유익은 하나님께서 신앙을 따라 사는 우리를 바라보시며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고 감동을 주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만큼 값지고 귀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터넷에 실린 어떤 분의 이야기입니다.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분입니다. 어느 날 그분의 아들이 결혼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축의금으로 백만 원을 했습니다. 빠듯한 살림에 아들 결혼시키느라 힘들었는데, 그 친구의 그 축의금은 그에게 참으로 많은 힘이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그렇게 큰돈을 축의금으로 내 준 친구가 너무 고마워 콧등이 시큰거렸습니다. 그리고 늘 그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의 아들이 결혼을 한다는 청첩장을 받았습니다. 청첩장을 받고는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살기도 빠듯한데 어떻게 축의금을 마련할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아내와 상의해서 빚을 내서라도 백만 원 축의금을 하기로 했습니다. 빚낸 돈으로 축의금을 마련해 결혼식장에 갔습니다. 친구는 ‘와 줘서 고맙다’고 거듭거듭 말했습니다. 결혼식장에 다녀오면서 아내와 ‘돈을 빌려서라도 축의금 낸 것 참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집으로 등기우편이 배달되어 왔습니다. 아들 혼사를 치룬 그 친구에게서 온 것입니다. 웬 인사장을 등기로 보내나 하는 마음으로 열어보니, 친구의 편지글이 있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이 사람아! 내가 자네 형편 다 아는데 무슨 축의금을 그리 했는가? 자네 요즘 어려운 것 잘 아는데 이게 무슨 짓인가? 자네는 우정을 돈으로 맞바꾸려 하는가?” 그리고 편지 안엔 99만 원짜리 수표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아, 나는 자네 친구야. 자네 축의금은 만원이면 족하네. 이 돈을 안 받는다면 자네를 친구로 생각지 않겠네. 아들 결혼식에 참석해줘서 고맙네. 가까운 날 만나서 차 한 잔 하세. 힘 내게나!”

참으로 따뜻한 우정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받은 것만큼 하나님께 갚으며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진 않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100개라면 단 한 개만이라도 갚으려 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100개의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하나님께서 내게 해 주신 것이 무엇이냐’고, ‘하나님을 믿는 이 신앙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불평만 하며 산다면 그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갚으려 한다면, 그 모습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감동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한 채 산다면, 그것만큼 잘못된 신앙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유익을 생각하기 앞서 하나님께 감동을 드리는 신앙으로 사십시다. ‘신앙생활 할 때 내게 유익이 무엇이냐?’고 따지기 앞서,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 마음에 감동을 드리십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 귀히 여겨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감동시켜 드린다는 것! 그것보다 더 큰 신앙의 유익은 없습니다




http://www.imr.co.kr/imrtj2/2014-4%EC%9B%94/%EC%84%A4%EA%B5%90%EB%AA%A8%EC%9D%8C/%ED%95%98%EB%82%98%EB%8B%98%20%EC%84%AC%EA%B9%80%EC%97%90%20%EC%9C%A0%EC%9D%B5%EC%9D%B4%20%EB%AC%B4%EC%97%87%EC%9E%85%EB%8B%88%EA%B9%8C.htm


말3:13-18 하나님 섬김에 유익이 무엇입니까? 말3:13-18 하나님 섬김에 유익이 무엇입니까? Reviewed by □□□ on February 23, 2025 Rating: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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