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호목사/두려워 말고 믿으라! (눅 8:42-52)
어느 교회 장로님 한 분이 사망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만에 깨어났습니다. 그래서 이 분이 천국 갔다온 이야기를 만나는 사람마다 합니다. 목사님께 인사 겸 와서 천당 갔다 온 이야기를 하니까 목사님이 “장로님, 정말로 천당이 있습디까?”라고 했답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문제는 결국 믿음으로 돌아갑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물질문제, 건강문제, 인간관계 문제, 직업문제 등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이 많이 있지만 이 문제의 궁극적인 귀결은 믿음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그와 같은 전제를 가지고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성령의 감동과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회당장의 간청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이 사건은 예수님이 수많은 병자를 치유하는 사건중의 하나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고 죽음 가운데서 살려내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그냥 한 사람의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이적의 역사가 아니고 매우 계시적이고 강렬한 믿음의 비밀을 우리 앞에 들려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거라사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배를 타고 건너편 갈릴리로 가셨는데 사람들이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중에 특별히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주님을 기다릴 이유가 있는 사람은 아닌데 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자기 딸이 12살인데 아마도 날 때부터 죽을 중한 병에 걸렸던가 봅니다.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고 가서 그 딸을 고치려고 하는 강렬한 소원을 가지고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이로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청을 했습니다. 주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간청을 듣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돌발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혈루증을 앓고 있는 한 여인이 예수님 뒤로 와서 그 옷가를 만졌더니 그만 그 혈루증이 깨끗하게 낳았습니다. 주님은 그 사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누가 내 몸에 손을 대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도 “주여 사람들이 많아 밀고 있습니다.” “아니야, 누가 내 몸에 손을 대었느니라.” 주님은 강력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 여인은 자기 행위가 숨겨지지 못할 줄을 알고 고백을 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 자기가 혈루증을 앓았던 그 사연을 전부 이야기를 하고, 왜 주님의 옷에 손을 대었는지를 전부 이야기했습니다. 그 때 주님은 그 여인에게 아주 극찬을 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 여인의 믿음을 모든 대중들 앞에서 아주 높이 칭찬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다가 길거리에 일어난 이 여인의 사건을 통해서 한참동안 지체를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이에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주인이여, 방금 딸이 죽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선생을 괴롭게 하지 마소서.”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고 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주님은 회당장 야이로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네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매우 미련하고 우직스럽습니다. 딸이 죽었다고 하는데 두려워 말고 믿으라고 하니 그 말씀은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으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영원한 해답
예수님의 4복음서 기록을 보면 ‘믿으라’는 말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믿으라는 말씀을 강조할 때 두 가지 믿음의 장애물을 극복하라고 말씀합니다. 첫째는 ‘두려워 말고’ 믿으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했습니다. 두려움과 의심은 서로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두려워하면 의심에 이릅니다. 의심에 이르면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장애물은 두려움과 의심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두려워하느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아라.” 풍랑이는 바다에서 제자들이 두려워하면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칠 때 주님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의심하느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않느냐? 왜 의심하느냐?” 이렇게 주님은 두려움과 의심을 극복하면서 믿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 그는 참으로 큰 문제를 안고 있는 아버지입니다.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12살 된 딸을 두고 있는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그 병이 중하여 이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딸을 향한 야이로의 믿음, 그는 예수님 앞에 나아갔는데 두 가지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야이로의 자세
첫째는 자기 딸의 이 중한 병은 예수님께로 가면 예수님께서는 내 딸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 문제는 예수님께로 가야만 해결된다는 그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께 나아갔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는 예수님의 무릎아래 엎드려 간청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상황을 잘 이해하면 대단히 큰 사건입니다. 그 당시 주님은 나사렛 목수의 아들 정도로 대단히 천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그런 죄인의 친구로 멸시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 가운데 결코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회당장 야이로가 그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을 하는 이것은 그 당시 유대주의자들이 볼 때는 대단히 파격적인 행동입니다. 회당장은 율법의 선생님입니다. 율법의 지도자입니다. 유대주의의 지도자입니다. 유대사회에서는 지도자에 속하는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 앞에, 나사렛 목수의 아들 앞에, 죄인의 친구라고 비웃음을 받는 그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간구한다는 것은 파격적인 행동입니다. 이 두 가지 때문에 주님은 야이로의 그 진심을 받아들이고 그의 집으로 가 주시기로 허락을 했던 것입니다.
야이로가 예수님 앞에 나온 이 모습은 오늘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러 이 시간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몸이 예배당에 나온 이것으로 예배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예배에는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안고 있는 여러분의 모든 문제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답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이 자리에 오셔야 됩니다. 믿고 기도해야합니다. 믿고 참여해야 합니다. 믿고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나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답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께 가야 문제의 답이 있다는 이 믿음을 가지고 와야 예배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고백은 예수님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회당장은 딸 때문에 그의 회당장의 지위도, 유대주의자의 권위도, 그가 갖고 있는 자존심도 다 버리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것이 예배자의 영적인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모든 나의 나됨을 다 굴복시켜야 합니다. 주님 앞에 다 항복시켜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 앞에 나온 자의 신앙고백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르면서 마음을 닫아 놓는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기 위하여 고개를 숙이지만 우리 속에 교만의 사람, 우리 속에 불신의 사람은 고개를 꺽지 않고 있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앞에 항복이 되어야 합니다.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모습이 주님 앞에 나오는 신앙고백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아주 난처합니다. 딸 때문에 주님 앞에 무릎까지 꿇었는데 그 딸이 죽었답니다. 그것도 야속합니다. 주님이 좀 빨리 가 주셨으면 좋겠는데 그 길에서 예기치도 않게 한 여자가 나타나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원망스럽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을 맞이하고 있는 야이로입니다. 그야말로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허락을 받아 냈는데 그 주님이 자기 사정을 봐 주지 않고 길에서 머뭇거리면서 그만 자기 딸이 죽고 말았으니 결과를 보면 참으로 난처한 상황입니다. 야이로의 상황은 상당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나버렸습니다. 그야말로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 주님의 말씀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믿기 어려울 때 믿으라
여러분, 믿음은 견디기 어려운 그 순간에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은 위기가 없을 때 믿음이 아니라 위기가 있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야이로는 자기에게 부딪힌 그 현실 앞에, 주님 앞에 원망을 토할까 말까 하는 난처한 상황에 주님의 음성은 “야이로야, 네가 지금 힘드냐? 괴로우냐? 참지 못하겠느냐? 이해가 안 되느냐?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렇게 외고집스럽습니다. 미련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혜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비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언제나 부분만 보게 됩니다. 언제나 현상만 보게 됩니다. 진실을 볼 줄 모릅니다. 이것이 우리의 약점입니다. 병원에 가는 사람들은 영안실은 염두에 두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영안실로 가는 존재들입니다. 영안실은 누가 갑니까? 평소에 병원에 다니던 사람들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별 존재가 아닙니다. 병원 간다고 우리가 가진 병이 낫습니까? 아픈 부분 조금 건드리고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문제가 그렇습니다.
야이로가 당한 현실은 주님의 눈으로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금 야이로는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지만, 주님이 보실 때는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야이로의 집에 가서 “울지 말고 죽은 것이 아니고 잔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죽은 사람 앞에서 그런 실례의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은 죽은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야 일어나라” 주께서 잡아 일으키시니 영이 돌아와 그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먹을 것을 주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메시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딸이 살아나고 있는 기적의 건너편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게 주목을 못하는 약점이 있습니다. 사람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병든 사람의 관심은 병을 고침받는 것입니다. 딸이 죽은 아버지는 딸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소원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병자를 고치시기 위한 의원을 자청하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메시야의 사명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수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목적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왜 살리셨습니까? 그것은 아버지의 믿음을 북돋아 주기 위한 것입니다. 믿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병든 자를 고치시는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광경을 보는 사람들이 예수가 메시야임을 믿도록 하는데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성령의 목적이 거기에 있습니다.
이적의 목적
주님은 베다니의 나사로를 살린 적이 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유대지방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머뭇거렸습니다. 언제 가셨는가? 죽은 지 나흘 후 장례가 이미 끝난 후에 갔습니다. 집에 온 주님을 맞이하는 마르다는 “주여,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원망입니다. “주님, 좀 일찍 오시지요”라는 말입니다. 그때 주님은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는 엄청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주님의 그 말씀을 믿지 않고 “마지막날 부활 때는 살 줄을 믿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러분, 마지막날 부활 때에 살리라는 마르다의 믿음도 믿음이지만 부활자체가 되는 주님이 계시는 이 현장에서 나사로가 살아난다는 것을 마르다가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 가서 돌을 굴러내라 하신 후 “나사로야 나오너라” 외칠 때 나사로는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놀라운 기적입니다.
나사로를 살린 기적을 베푸신 주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는 일에 대하여 요한복음 11장 42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린 것은 나사로 개인을 좋게 하는 것, 나사로 가족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사로를 살리는 이 광경을 보고 있는 가족들과 제자들과 모든 사람들이 내가 하늘로부터 온 메시야임을 믿도록 하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십니까? 언제 그렇게 믿었습니까? 죽은 식구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믿었습니까? 예수님과 한번 거래를 해 보시겠습니까? 가족 한사람 죽여 놓고 살려 주면 믿겠다고 도박을 하겠습니까? 그래야 믿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나사로를 살리는 그것을 최선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지 않더라도 믿는다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1장 40절에서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야 믿고, 병든 자가 고침 받아야 믿는다면 주님은 그렇게라도 믿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의 관심은 믿는 것보다는 병든 내 가족이 살고, 죽은 내 가족이 살아나는 그 이상 더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적의 방법으로 우리를 다루지 않습니다. 이적이 주님을 믿게 하지 않습니다. 믿게 하시는 이는 성령입니다. 우리가 이적을 보지 못했어도, 가족이 살아나는 것을 보지 못했어도, 오늘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주의 성령이 우리를 믿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우리편에서 기적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런 기적이 없어도 믿게 하시는 그것이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내가 눈으로 보지 않고도 믿었다면 그 믿음이 기적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믿게 하는데 목적이 있지 우리에게 죽은 자를 살리는 이벤트를 베풀고 쇼를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쇼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은혜만 받고 하나님의 복을 받고 믿는 믿음의 역사가 따르지 않는다면 그건 영적인 쇼에 불과한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도 미련하고 우직스럽습니다.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데 믿으라는 말만큼 미련한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말밖에는 정답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우리를 믿게 하는데 있고, 더 믿게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야이로는 기본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이 딸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안 됩니다. 주님은 이 야이로의 믿음을 더 강하게 무장시켜 주실 필요가 있기 때문에 죽은 딸을 살려서라도 야이로로 하여금 더 크게 믿게 하신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믿으라
우리는 치료나 개혁이 목적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중생시키고, 우리를 부활에 이르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병든 몸이 치료받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네가 영생에 이르기를 원하느니라”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갖기 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두려워 말라’라는 말이 365번 나온다고 합니다. 매일매일 믿음을 방해하는 두려움, 의심을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믿지 못하게 하는 유혹과 불신앙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수가 많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장애물을 극복하고 믿음의 경지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풍요함에 대해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요소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풍요함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정보가 얼마나 많습니까? 며칠 전에 TV프로를 봤는데 중고등학생들의 숙제를 해 주는 곳이 한두 개가 아니라 수십 개가 됩니다. 그래서 숙제가 똑같으면 안되니까 꾀부리는 방법도 나왔습니다. 정보가 너무 많아 문제가 됩니다. 약품이 얼마나 많습니까? 건강식품이 얼마나 많습니까? TV채널이 얼마나 많습니까? 너무 많기 때문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홍수가 나면 마실 물이 없듯이 영양제가 많다보니 무엇을 먹을지 모릅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역기능으로 갑니다.
여러분, 주5일제라고 긴장하지 마십시오. 요즘 신학계에도 주5일제 가지고 신학적으로 조명하는 세미나가 열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제7일을 안식일로 주셨습니다. 쉬는 날로 주셨습니다. 이 날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레 가운데 하루, 이날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지어준 날입니다. 이날은 주5일제가 된다고 해서 변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주4일제가 된다고 해서 주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3일이라 해도 주일은 주일입니다. 주일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의 날입니다. 거룩하게 하신 날입니다. 이 날을 붙잡아야 믿음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고집스럽습니다. 주말휴가를 그르쳐도 주일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 고집스런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길은 좁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넓은 길로 가지 마세요. 갈 길이 많다고 함부로 가지 마세요. 고집스러워도 외길로 가야 합니다. 주와 함께 가야 합니다. 그 고집스런 믿음의 길로 가야 합니다. 주5일제가 무슨 문제입니까? 주일만 우리가 붙잡으면 주3일이 되어도 관계 없습니다.
우리 한국말 중에 제일 불행하게 쓰이는 말이 ‘정말’과 ‘진짜’라는 말입니다. ‘진짜인가’ ‘정말 그런가’ 여러분, 정말 믿습니까?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인데도 주님 앞에서 진정 믿는 자로 서야 합니다. 이건 참으로 절실한 문제입니다. 끝났다는 말을 가볍게 하지도 말고,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서 포기하지 마세요. 야이로는 주님 앞에 무릎까지 꿇고 주님을 초청했는데 야속한 주님은 길에서 머뭇거리시고, 결국 딸은 죽어버리고, 할말이 없는 그 상황에서도 야이로가 받은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등산을 갔는데 바위에서 미끄러졌습니다. 구사일생으로 떨어지다 나뭇가지를 붙잡았습니다. 이제 살길이 전혀 없었습니다. 홀로는 도저히 벼랑위로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고함을 질렀습니다. “누구 없소?” “살려 주세요” 그 때 놀라운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 “당신 누구요?” “네가 믿는 하나님이야.” “아이고, 하나님 여기 계셨습니까? 날 좀 살려주세요.” “내가 하나 확인 할 것이 있어. 너 정말 나 믿니?” “믿고 말고요.” “증거가 무엇이냐?” “저는 교회 다닙니다. 교회에서 봉사도 합니다.” “그런 것 말고 너 정말 내 말대로 다 믿겠어?” “믿습니다.” “그럼 나뭇가지 잡고 있는 손을 놔 봐라.” “손을 놓으라고요?” 이 사람은 잠시 생각하다가 갑자기 고함을 질렀습니다. “위에 다른 사람 없소!”
맺는 말
믿는다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믿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 불신앙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견딜 수 없는 상황이지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 음성이 들려지기 바랍니다. 그 믿음의 길로 주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죽은 딸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길은 자꾸만 결과만 치중합니다. 죽은 딸이 살아나는 그것만 자꾸 집착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에 이를 수 있는 믿기만 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먼저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로 가야 합니다. 그 고집스런 외길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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