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가리는데 있어서 시험을 통한 검증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이 바르게 작동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아는데 있어서 시험을 통한 검증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에디슨은 전구를 발견하는데 100번의 시험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학교 등에서 연구한 것을 시험을 통해 검증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의 믿음이 참된 것인지 여부를 아는 것, 어떤 사람의 인격이 변화된 인격인지를 아는 것도 시험을 통한 검증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참 믿음과 변화된 인격의 진위를 가리는 시험의 수단은 무엇일까요? 삶의 위기입니다. 위기의 상황을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삶의 위기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시험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후부터 자기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많은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마지막에 받은 큰 시험이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는 시험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큰 위기를 맞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시험의 핵심은 무엇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끔찍이 사랑하는 아들을 하나님께 바침으로 그 아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를 검증받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들을 바쳤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향해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또 다른 시험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요셉이 그의 형들을 3번째로 시험한 것입니다. 요셉이 자신을 형들에게 밝히기 전에 한 마지막 시험이었습니다.
시험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형제들을 가나안 땅으로 돌려보내면서 다시 교묘한 수법으로 형제들을 위기에 빠지게 만든 것입니다. 모든 형제들의 곡식 자루에 곡식 살 때 지불한 돈을 넣었고, 특별히 베냐민의 자루에는 자신이 사용하던 ‘은잔’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애굽을 떠난지 얼마 안 돼서 종을 보내 은잔을 발견하게 하고, 베냐민을 도둑으로 몰고, 볼모로 잡히게 만들었습니다. 왜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다시 시험 했을까요? 그들 안에 해결되지 않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안에 뿌리 깊게 숨겨진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연합과 하나됨을 방해하는 가장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그 문제의 검증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했던 것입니다. 그 부분은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검증과 변화를 원하시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변화들은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의 뿌리 깊은 죄와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창44:1-6에 “요셉이 그 청지기에 명하여 가로되 양식을 각인의 자루에 실을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인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소년의 자루 아구에 넣고 그 양식 값 돈도 함께 넣으라 하매 그가 요셉의 명령대로 하고, 아침이 밝을 때에 사람들과 그 나귀를 보내니라, 그들이 성에서 나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 미칠 때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악으로 선을 갚느냐,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 데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하라, 청지기가 그들에게 따라 미쳐 그대로 말하니”라고 합니다.
요셉이 다시 교묘한 방법을 통해 형제들을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형제들이 모르게 밤에 그들의 곡식 자루에 곡식을 살 때 지불한 돈을 도로 넣었고, 베냐민의 자루에는 자신의 은잔을 넣게 했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요셉의 형제들은 기쁘게 애굽을 출발했습니다. 전날 요셉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큰 대접을 받았고, 필요한 곡식도 충분히 샀고, 볼모로 잡혀있던 시므온도 풀려나서 함께 가나안으로 향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흥분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상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요셉의 종이 뒤 쫓아 와서 요셉의 형제들에게 주인의 은잔을 훔쳤다고 하면서 “너희가 어찌하여 악을 선으로 갚느냐”고 하면서 그들을 심각한 도둑으로 몰아쳤습니다. 그 일을 통해 이번에는 베냐민을 볼모로 잡아 놓으려고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요셉은 그런 일을 꾸민 것입니까? 형제들 안에 뿌리 깊은 문제,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검증하고, 해결하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형제를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길 줄 몰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요셉을 무정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노예로 판 적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팔았던 유사한 상황을 만들어서 시험했습니다. 형들이 자기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베냐민만 남기고 떠나는가? 베냐민을 구하기 위해 그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릎 쓰는가를 본 것입니다. 요셉은 이전 두 번의 시험을 통해 형들이 거짓말쟁이들이 아니고, 정직한 사람들이 된 것을 알았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아니고, 자기의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시험으로 진심으로 형제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인지를 시험했습니다. 그 검증이 없이는 그들이 언약 공동체의 초석이 되고,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는 사람들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뿌리 깊은 죄와 잘못된 태도는 없습니까? 편견을 가지고 형제를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까? 자기 생명은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의 생명은 멸시하지 않습니까? 형제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둘째, 우리의 변화가 말 뿐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되기를 원하십니다.
창44:7-13에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우리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 하시나이까 이런 일은 종들이 결단코 아니 하나이다, 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 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 주인의 집에서 은금을 도적질 하리이까, 종들 중 뉘게서 발견되거든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주의 종이 되리이다, 그가 가로되 그러면 너희 말과 같이 하리라 그것이 뉘게서든지 발견되면 그는 우리 종이 될 것이요 너희에게는 책망이 없으리라, 그들이 각각 급히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각기 푸니, 그가 나이 많은 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나이 적은 자에게까지 수탐하매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지라,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오니라”고 합니다.
중대한 도둑으로 몰린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의 청지기 앞에서 정직과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자기들은 그런 일을 할 사람들이 아니라고 맹세했고, 논리적으로 설득을 했습니다. 자신들의 정직을 주장하기 위해 은잔이 발견된 자는 죽여도 좋다고 했고, 자기들은 요셉의 종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 요셉의 종이 ‘은잔이 발견된 자만 종이 될 것이고 나머지는 책망 받을 것이 없고, 돌아가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형제들이 ‘각각 급히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각기 푸니’라고 합니다. 그들의 행위를 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정직했음을 당당하게 증명해 보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된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의 종은 그 결과를 어떻게 다루기로 했습니까? 베냐민만 종으로 삼고, 나머지는 길을 떠나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시험에 직면했습니다. 베냐민을 포기하면 자기들은 목숨을 부지할 뿐 아니라 자기들의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기회를 두 번 얻었습니다. 요셉의 종이 그렇게 말했고, 뒤에 요셉 앞에 섰을 때 요셉이 베냐민만 종이 되고 돌아가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들은 베냐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만 살겠다고 길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창44:13에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오니라”고 합니다. 그들은 과거에 무죄한 요셉을 팔았던 때와 반대로 무죄한 베냐민을 구하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운 곳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비로소 그들은 배다른 자식에 대한 편견과 미움을 다 버리고, 한 식구 한 가족이 된 것을 행동으로 증명해 냈습니다. 그들은 요셉이 파티를 열고, 베냐민에게 다섯 배의 음식을 줬을 때 시기심 없이 기쁘게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배다른 형제 베냐민이 위기에 빠졌을 때 자기들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함께 하며, 구출하려고 뛰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서로에 대한 사랑을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공동체의 하나 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라고 합니다.
셋째, 우리의 죄인 됨과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인정하기를 원하십니다.
창43:14-17에 “유다와 그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니 요셉이 오히려 그곳에 있는지라 그 앞 땅에 엎드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 잘 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유다가 가로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어떻게 우리의 정직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적발하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 요셉이 가로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나의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고 합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과거와 상상 할 수 없이 인격적으로 변화되었고, 콩가루 같던 가족들이 시멘트처럼 강한 결집력을 드러냈습니다. 어디서 알 수 있습니까? 형제들과 유다가 요셉의 종과 요셉 앞에서 자신들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그들은 말 할 때마다 ‘우리’라는 단어를 씁니다. 은잔이 발견된 베냐민에게 책임을 돌리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형제들을 대표해서 요셉에게 자신들의 정직을 3가지 수사학적 질문으로 말했습니다.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어떻게 우리의 정직을 나타내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요셉의 대답을 듣는 물음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직함을 주장하는 고백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억울했겠습니다. 그 상황에서 어떤 것으로도 자신들의 결백을 입증 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상황에서 그들이 크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적발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런 상황에 직명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과거에 자신들이 지었던 죄, 오랫동안 숨기고 있었던 죄를 깨닫고, 회개하라는 상황이라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상황 속에서 과거에 요셉을 잔인하게 팔았던 죄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무 죄 없이 팔려가면서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절망했을 요셉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유사한 상황에 직면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변명하지 않고, 베냐민과 함께 종이 되기로 했습니다. 다른 말로하면, 그들은 그 상황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그 상황에 복종하는 길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자기들의 숨겨진 깊은 죄를 깨닫고 인정 할 줄 아는 사람들로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인정하는 사람들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숨겨진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주께로 나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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