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4:1-34(32-34) 가을에는 성숙하게 하소서 /진창설

1. 성숙의 계절, 가을

여러분, 9월입니다.

여러분, 9월을 얼마나 기다렸습니까? 그렇죠? 그 이유는 무엇보다 지난여름이 너무 길었고 또 너무나 더웠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기록적인 여름’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름을 잘 이겨내었으니 여러분들은 정말 대단한 분들입니다.

지난여름은 제게도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대상포진이라는 질병 때문이었지요. 오른쪽 머리만 아픈 두통은 두통약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거기다가 두통이 심해지면 두 눈이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빵빵해지면서 먹먹해지고, 머리는 연신 ‘아찔아찔’해지면서 어지러웠습니다. 덥고 땀이 나면 두통과 어지럼증은 더 심해졌고, 대상포진 치료약 때문에 밤에는 잠도 못 잤습니다. 그래서 여름이 빨리 지나가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 가을이 오기를 얼마나 鶴首苦待했는지 모릅니다. 그런 가운데 여름은 갔고, 이렇게 9월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9월은 단순히 좋아하기만 할 달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비록 기록적인 무더위와 씨름하다가 9월을 맞았지만, 그 무더위 속에서도 잘 영근 과일이나 잘 익은 穀食처럼, ‘열매’ 혹은 ‘성숙’을 떠올리는 것이 9월이요, 가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9월이 되어 우리는 ‘열매’, 혹은 ‘성숙’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섰습니다. 성숙(成熟)이 무엇입니까? 사전적으로 성숙은 ‘나이를 먹어 어른스럽게 되다’는 기본적인 뜻에서부터 ‘어떤 단계를 거쳐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정도에 다다름’, ‘충분히 자람’, ‘사물이 자신의 특성을 완전히 드러내는 단계에 이름’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성숙’은 어떤 것일까요?


2. 성숙의 세 가지 모습

오늘 본문은 형들에 의해 이집트에 팔려가 노예로 지내던 요셉이 20여년 만에 그 형제들을 만난 장면입니다.

형들 입장에서 보면, 이집트로 무역차 가는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11번째 동생 요셉을 팔았는데, 그 후 그가 살았을지 죽었을지, 설사 살았대도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전혀 알 수 없었지요. 그런데,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집트의 제2인자’ 總理가 되어 만났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셉은 자신을 몰라보는 형제들에게 자신을 알리기까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1) 성숙, 자신을 알고 죄를 고백하는 것

이집트를 중심으로 最惡의 凶年이 들어 아시아-아프리카 全域이 굶주림에 고통하고 있을 때, 견디다 못한 야곱의 가족들도 解決 方案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饑饉 7년 전부터 미리 식량을 비축해 둔 이집트로 가서 양식을 사오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식량을 구입하러 온 형제들을 본 요셉은 자신을 숨긴 채 그들을 시험했습니다.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창42:9).” 요셉은 형들을 ‘간첩’, ‘스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형들은 자신들은 스파이가 아니라면서, 자신들의 형편, 특히 가족 관계를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요셉은 ‘너희의 말이 사실이라면 막내를 데려오라, 그러면 스파이라고 의심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3일 후, 시므온을 볼모로 사로잡아두고는 나머지 형제들을 모두 돌려보내었고, 각자의 곡물 자루에 그들이 가져온 돈을 그대로 넣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형제들 입장에서는 아주 큰일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돈이 곡식자루에 그대로 들어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근이 이 상태로 계속 되어 곡식을 구하기 위해 다시 이집트로 와야 할 경우, 돈은 두 배로, 거기다가 이집트 총리의 요구대로 막내 베냐민까지 데리고 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야 시므온도 구하고 곡식도 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죠.

불길한 豫感은 그대로 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기근은 그 이후로도 계속 되었고, 이집트에서 구해간 양식은 다 떨어져, 다시 이집트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아들들은 이집트로 가야했고, 그것을 야곱에게 말했습니다. 야곱으로서는 아들들의 말이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오래 전 요셉을 잃었을 때도 사자에게 잡아먹혔다면서 피 묻은 옷을 보여줄 때 뭔가 석연찮았습니다. 그리고 양식 구하러 간 아들들이 시므온을 이집트에 남겨두고 온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막내 베냐민을 데려가야 시므온도 구하고 양식도 구한다니 그 역시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라헬이 낳은 아들 요셉을 이미 잃은 야곱은 또 다른 라헬의 아들 베냐민마저 잃을 상황이 되었으니 만약 베냐민마저 잃으면 자신도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아버지 야곱을 설득하면서 나선 사람은 유다였습니다. 유다는 자신을 담보로 했습니다. 유다가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함으로서 베냐민을 데리고 이집트로 갈 수 있었습니다(창43:9).

그렇게 해서 11명의 형제들과 요셉, 즉 야곱의 열 두 아들들이 20년 만에 한 자리에서 만났습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여전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울음을 감추어가면서 그들과 식사를 한 후, 그들을 가나안으로 돌려보내면서 또 한 번의 ‘테스트’를 했습니다. 그것은 형제들에게 곡식을 주어서 돌려보내되 베냐민의 곡식 자루에 자신의 ‘은잔’을 넣어 도둑으로 모는 일이었습니다(1~3). 베냐민이 곤경에 빠졌을 때 그 형들이 어쩌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이번에도 20년 전 자신을 버릴 때처럼 베냐민을 버릴는지, 아니면 어떤 수로든 베냐민을 구하려고 노력할는지, 다시 말하면 20년 전과 똑같은지, 아니면 그동안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곡식을 사서 고향으로 돌아가던 11명의 형제들은 요셉의 청지기 일행이 뒤쫓아 와서 ‘누군가 총리의 은잔을 훔쳐갔다’고 말하자, 엄청나게 당황해 하면서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9)”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豪言壯談했지만 이집트 총리의 은잔은 막내 베냐민의 곡식 자루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아버지의 생명과 연결된 베냐민에게서 은잔이 발견된단 말입니까? 그들 스스로 ‘은잔이 발견된 자는 죽을 것이고, 나머지 10명은 이집트 총리의 종이 되겠다’ 했으니 이제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가나안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되돌려 죄인이요 죽을 자가 되어 이집트로 돌아갔습니다(13).


이집트 총리 요셉 앞에 엎드린 11명의 형제들! 그들을 대신하여 변명한 사람은 ‘유다’였습니다. 유다는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 어떤 설명도 못하겠습니다. 저희들이 無罪하고 正直하다는 것을 보여드릴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말을 시작했습니다(16). 유다는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훔치지 않았는데 도대체 왜 이것이 곡식 자루 속에 있는지 알 수 없다’며 抗辯하지 않았습니다. 또 ‘왜 하필이면 베냐민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없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너 하나 때문에 우리 모두 다 죽게 생겼다’며 베냐민을 몰아세우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뭐라고 말했습니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 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16)”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의 상황, 즉 베냐민이 죽게 되거나, 종이 될 이 상황이 견딜 수 없는 ‘苦痛’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통은 20년 전 자신들이 또 한 명의 동생을 팔아버린 ‘죄의 懲罰’이라는 말입니다. 

보십시오! 요셉의 형들이 변했습니다. 어떤 변화입니까? 자신들의 죄를 아파하고, 이집트 총리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이 요셉이 알고 싶었던 것이고, 하나님께서 확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지난날의 죄를 아파하고, 지금의 위기상황이 그 죄를 찾아내신 하나님의 징벌이라라고 인정하는 모습! 바로 이것이 성숙의 한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숙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을 모릅니다. 자신을 감춥니다. 그리고 자신의 허물과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피하려 하고, 변명, 혹 합리화합니다. 어떤 허물이 발견되면 ‘누구 때문’이라며 떠넘깁니다. 성숙은 자신을 돌아보고, 지난날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들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과 사람과 자신의 인생 앞에서 謙虛해지는 것입니다. “…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란 시의 한 대목처럼, 이제는 자신을 살피고, 허물을 인정하고, 그 허물의 댓가라면 달게 받겠다는 모습이 성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숙은 눈이 시리고, 그리고 가슴 아프도록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허물과 죄를 고백합니다. 힘들고 아픈 그 모든 일들을 ‘죄의 열매’로 받아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2) 성숙,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성숙의 두 번째 모습이 있습니다. 20절, “우리에게 아버지가 있으니 노인이요 또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 청년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가 남긴 것은 그뿐이므로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22절, “그 아이는 그의 아버지를 떠나지 못할지니 떠나면 그의 아버지가 죽겠나이다.” 30절 이하,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30~31).” 무슨 말입니까? 이전에는 偏愛하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고, 아버지의 사랑을 자신들보다 더 많이 받는다는 이유로 요셉이나 베냐민을 싫어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이제는 늙은 아버지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아버지가 힘드실까 염려하고, 충격받으실까 勞心焦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로운 베냐민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숙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그의 마음과 태도로 알 수 있습니다.

기사를 작성한 사람은 바람이 꽤 쌀쌀하게 부는 어느 겨울 밤 시골버스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해가 일찍 저문 뒤라 제법 캄캄했습니다. 버스 안에는 추위 때문에 몸을 잔뜩 움츠린 승객들이 드문드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윽고 버스가 비탈길로 접어들자, 산기슭 정거장에서 중학생 한 명이 내렸습니다. 자율학습을 하다가 늦게 귀가하는 학생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 일이 자주 있는 듯 그 학생은 어두운 버스 정류장에서 마을 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학생을 내려놓은 버스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인가?”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 버스는 여전히 헤드라이트를 켠 채 멈추어 서 있었습니다.

기사는 물론 승객들 누구 한 사람 출발을 재촉하기는커녕 말 한마디 없이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윽고 그 학생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을 때쯤 버스는 부르릉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 앞자리에 앉은 중년 아주머니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아주머니, 왜 기사 아저씨가 버스를 출발시키지 않는 겁니까? 배차 시간을 맞추려고 그러는 건가요?” 그러자 아주머니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아까 그 학생이 걸어간 길이 몹시 좁고 가파르거든요.” 그제야 기사를 쓴 이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버스 기사 아저씨는 좁고 가파른데다 어두운 길을 걷는 그 학생을 위해 얼마 동안 헤드라이트로 길을 환하게 밝혀 준 것이었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그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진심으로 긍휼히 여깁니다. 반면 미성숙한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자기중심적이고 일방적입니다. 그렇다 보니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쉽게 비판하고,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마음에서 내버리거나, 머리와 가슴으로 그를 죽여 버립니다. 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 민감하고 그들을 먼저 배려합니다. 그래서 성숙한 사람이 옆에 있으면 편하고 즐겁습니다. 반면 미성숙한 사람이 옆에 있으면 어색하고 불편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완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세상이 公正하지도 公平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고, 삶에는 늘 위험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사람들은 생존욕구에 의해서 살아가고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상처 받을 준비도 하고 있습니다. 理想이 높을수록 현실이 비참해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사는 것이 갈등의 연속이고 그것 때문에 몸과 마음이 편할 날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돈이 필요하지만 내가 필요한 때는 꼭 없다는 것을 알고, 돈 때문에 친밀한 사람들과 갈등하게 된다는 것을 압니다. 건강은 늘 한결같지 않아 몇 번은 건강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건강을 과신하지 않지요. 성숙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은 믿을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다를 비롯한 요셉의 형들, 아직 어릴 나이에 이미 아버지의 사랑을 자기들보다 더 많이 받는다는 이유로 또 다른 동생인 요셉을 죽이려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제는 다른 사람을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아파하고, 몸으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성숙에 이르렀습니다. 요셉이 確認하고 싶었던 것, 하나님께서 確認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에게서 確認하고 싶어 하시는 것도 이것입니다. 성숙은 理解해주고, 共感해주고, 配慮해주고, 품어주고, 함께 해주는 것입니다. 이 가을에 그런 성숙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성숙,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성숙의 마지막 모습은 ‘犧牲’입니다. 32절,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擔保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이것은 43장 9절 상황을 다시 언급한 것입니다. 유다는 원래 자기 慾望, 慾求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일찍 이방 여인과 결혼하여 3형제를 낳았고,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의 세 아들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습니다(창38:7,10). 道德的으로 人格的으로 信仰的으로 악했습니다. 유다의 부인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요(38:12). 부인이 죽자 곧바로 女色을 탐해서 신분을 숨긴 며느리와 있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른 것이 유다입니다(38:12~18).

그런 유다가 자기 생명을 동생 베냐민의 무사 귀환을 위한 擔保物, 犧牲祭物로 내어놓습니다. 33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큰 형님 르우벤을 비롯하여 열 명의 형제들이 있지만, 유다는 모든 책임을 자신이 안고 이집트에 남겠으니, 베냐민을 비롯하여 다른 형제들은 돌려보내 달라고 사정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일을 열 명이 나누어지면 좋지 않습니까? 그것이 兄弟愛 아닙니까? 그러나 유다는 혼자서 모든 것을 떠안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에게도 자신의 생명을 담보물로 내놓았었고, 지금은 이집트 총리 앞에서 자신의 생명을 담보물로 내놓고 있습니다. 이것이 成熟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숙의 최고 頂點은 예수님처럼, 그리고 유다처럼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는 말씀처럼 사랑의 最高峰이자 성숙의 最高峰은 희생하는 것입니다. 자기 욕구, 자기 정욕에 사로잡혀서 이방 동네를 휩쓸고 다니던 유다가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으로 변화된 이러한 변화가 예수님의 희생으로 성도된 저와 여러분에게도 일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희생시키신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희생이 우리를 변화시켰느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누군가를 대신하여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 곤충학자가 개미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개미들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곳에 나무젓가락을 넣고 그 곳에 불을 붙였습니다. 불이 났을 경우 개미들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연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자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불을 끄는 방법을 몰라 당황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개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불을 발견한 개미가 자신의 몸을 불 속으로 내던졌고, 다음 개미들도 마찬가지로 불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자 불꽃이 점점 약해졌습니다. 개미의 몸을 이루고 있는 키틴질이 불에 타면서 불꽃을 줄이는 소화물질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작가 지오반니 파피니(Giovanni Papini, 1881~1956)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파피니는 철저한 무신론자였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어머니는 아들 파피니를 위하여 계속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파피니는 무서운 병에 걸렸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어떤 사람이 그의 어머니에게 ‘인육을 먹여 보라’고 했습니다. 물론 미신적인 속설에 의한 말이었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들을 살리고 싶었던 어머니는 칼로 자신의 허벅지 살을 잘라 요리를 해서는 아들에게 먹였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아들이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파피니는 그 고기를 한 번 더 먹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 몰래 자기의 살을 베려다가 그만 너무 많은 피를 흘려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외출에서 돌아온 파피니는 충격적인 장면을 보고는 嗚咽을 터트렸습니다. “어머니, 지난번에 제가 먹은 것이 어머니의 살이었군요!” 아들의 목소리를 들은 어머니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당부했습니다. “나는 죄 많은 몸으로 너를 구했지만, 예수님은 죄 없는 몸으로 우리를 위해서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단다. 그러니 너는 반드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그 후 파피니는 <그리스도의 이야기>, <떡과 포도주> 등의 저서를 썼고, 남은 인생을 복음을 전하며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숙은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가 하는 것 보고…’, ‘그가 나에게 잘해 주었기 때문에…’, ‘그와 나 사이에 사랑의 빚이 있어서… ’가 아닙니다. 모르는 사람, 때로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때로는 원수를 위해서까지 희생할 수 있는 것이 성숙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3. 성숙해 가기를!

말씀을 맺겠습니다. 형제들에 대한 요셉의 시험은 유다의 희생을 확인하는 순간 끝이 났습니다. 오늘 본문 다음 장에 나오겠습니다만, 유다의 고백을 들은 요셉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형제들에게 자신을 밝혔습니다(45:1). 잘잘못을 모르던 형들,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어린 자신을 매정하게 팔아버린 형들이 지금은 자신들의 잘못을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들로 변했음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偏愛와 자신의 꿈 때문에 자신을 죽일 만큼 미워했던 형들이 아버지와 베냐민, 나아가 다른 사람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들로 변한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위해 犧牲해 주기를 바라던 형들이 이제는 스스로를 犧牲하는 사람들로 변한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요셉이 그 형들에게 그러했듯이 하나님도 여러분에게서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을 바로 알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허물과 죄를 인정하는가? 다른 사람을 머리, 가슴, 몸으로 이해하고 함께 해주가? 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이 가진 것으로 뿐 아니라, 목숨까지 버려 희생할 수 있는가? 바로 이런 것들을 성숙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9월, 가을의 문턱에 서서 우리는 성숙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자리에 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시인 윤동주는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 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나는 후회 없이 말 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겁니다.
나는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놓아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인생의 가을에는 누구나 <성숙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도무지 변할 것 같지 않던 요셉의 형들도 저마다 변화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이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처럼, 요셉의 형제들처럼, 그리고 요셉처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성숙을 이루어가는 여러분 모두 되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어른스러워지십시오! 나이만 먹은 어린아이 모습을 버리십시오!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버리십시오! 감정 조절 못하고, 자기 생각을 말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버리십시오! 손해 보지 않으려는 모습도 버리십시오! 대신에 요셉처럼 죄 없이 팔려 갑시다. 요셉처럼 죄 없이 갇힙시다. 요셉처럼 죄 없이 외로움도 당해 봅시다. 그리고 희생도 당해 봅시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면, 그것이 천국의 방법이요, 그렇게 사는 것이 성숙한 신자의 모습이라면, 그렇게 살기를 주저하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갚아주실 것입니다. 요셉이 그렇게 살았더니 하나님께서 놀랍게 갚아주셨잖아요! 유다가 그렇게 성숙하게 살았더니 장남 르우벤과 나머지 형제들을 제치고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 長子 지파가 되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러한 성숙을 이루어 영육간의 복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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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4:1-34(32-34) 가을에는 성숙하게 하소서 /진창설 창44:1-34(32-34) 가을에는 성숙하게 하소서 /진창설 Reviewed by □□□ on March 19, 2025 Rating: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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