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4:1-34 형들을 시험하는 요셉 /김동휘

들어가는 말

요셉의 형제들은 막내아우 베냐민을 애굽에 데려옴으로 요셉과의 화해가 이루어지고 함께 식사를 한 것으로 즐거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곡식을 사서 가나안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되어가는 줄로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들을 시험하여 그들의 마음을 알아보려합니다.


1. 애굽으로 다시 돌아오는 형제들(1-13)

요셉은 청지기에게 명하여 양식을 각사람의 자루에 실을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인의 돈을 그 자루에 넣을 것을 명합니다. 요셉의 마음과 관심은 항상 그의 부친과 온 가족에게 가 있었습니다. 즉 요셉은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족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다 한 것입니다. 요셉은 이어서 베냐민의 자루에 자신이 은잔을 넣고 양식값을 도로 넣으라고 명합니다.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넣으라고 한 것은 베냐민에게 도둑 누명을 씌워 애굽에 억류시키기 위한 요셉의 의도적이고 계획된 행동입니다. 즉 이 사건을 통해 요셉은 베냐민에 대한 형제들의 태도와 형제간의 우애<43:34>를 다시 한번 확인하려 한 것입니다.

개동시에 사람들과 나귀를 보냅니다. ‘개동시에’는 문자적으로는 ‘아침이 밝아오자’입니다. 그들은 먼 길을 가야 했기 때문에 아침 일찍 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애굽 총리의 환대와 시므온의 석방 그리고 많은 곡식을 살 수 있었으므로 아마 기쁜 마음을 가지고 출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에서 나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이 청지기에게 일러 그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고 말하게 합니다. 이 말은 70인역과 벌게이트역에는 너희가 어찌하여 나의 은잔을 훔쳤느냐 는 말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그 잔은 요셉이 점을 치는데 쓰는 것이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점을 치다’란 말은 본래 뱀이 기어 다닐 때 내는 소리를 가리키나 여기서 ‘속삭이다’ ‘주문을 외우다’란 의미가 파생되었습니다. 이는 점(占)의 사단적 속성을 암시헤 주는데 특히 애굽에서는 술잔에 물을 채우고 악령께 기도한 후 물을 관찰하여 점을 쳤습니다. 이러한 점술은 하나님의 뜻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므로 훗날 모세 율법은 이를 엄격히 금하였습니다(레 19:26; 신 18:9-14).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사람 요셉이 실제로 에굽의 미신적 행위인 점술을 행하였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는 자신이 애굽인인 양 신분을 철저히 은폐시키기 위한 목적과 애굽인들은 점치는 술잔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짐짓 그랬을 것입니다.

청지기는 그들을 따라가서 요셉이 이른 그대로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유능하고 성실한 청지기상(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요셉이 의도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으며 요셉이 그 형제들을 대하는데 있어서도 언제나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마치 과거에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였던 것과 유사합니다(39:1,2). 이와 같이 충실한 청지기의 모습은 만유의 주 되신 주님을 섬기는 성도의 역할에 대한 암시가 되기도 합니다(눅 12:42).

요셉의 형제들은 청지기가 자신들의 뒤를 따라와서 요셉의 잔을 훔쳐갔다는 말을 듣자, 그에 대하여 대답합니다. “우리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이런 일은 종들이 결단코 하지 아니하다이다” 요셉의 형제들은 자신들의 결백함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종의 말에 대하여 단호히 부인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나안에서 돈을 가져왔는데 어째서 당신 주인의 집에서 은, 금을 도적질하겠는가고 반문합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결백하므로 “종들 중 뉘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주의 종의 되리이다”고 말합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가나안 땅을 떠날 때 가져온 돈으로 그들의 정직성을 증명하면서 자기들이 결백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결백을 확신하면서 하였던 이 말은 요셉이 행한 시험의 중요한 초점이었습니다. 즉 이 상황은 그들이 베냐민을 버리고도(어떤 의미에서 죽이고)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베냐민과 생사(生死)를 같이 할 정도로 과거를 뉘우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들의 말에 대하여 청지기는 새로운 제안을 합니다. 그것은 주인의 잔이 그의 짐속에서 발견된 자만이 주인의 종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책망이 없을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은잔이 발견된 자에게만 개인적인 책임을 물을 뿐 연대(連帶)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는 베냐민만이 도적 협의를 받고 애굽에 억류케 되었을 경우 자유의 몸인 다른 형들이 과연 어떻게 나올 것인가를 알기 위한 조처입니다. 청지기는 그들의 짐을 나이 많은 자에게서부터 조사합니다. 청지기는 가장 나이 어린 베냐민의 자루 속에 은잔이 들어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들의 계획을 요셉의 형제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도록 짐짓 연장자 순으로 수색합니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자 형제들은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여 몹시 놀라며 슬퍼하였는데 옷을 찢는 것은 당시 근동 지방에서 자신의 극한 슬픔을 나타내는 행위였습니다 (37:24; 왕상 21:27). 형제들은 요셉의 종의 제안에 따라 베냐민만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으나(10절) 그들은 다시 짐을 꾸려 베냐민과 같이 요셉에게로 갔습니다. 즉 그들은 베냐민을 위하여 자신들의 자유와 생명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사랑이 있음을 행동으로 증명한 것입니다.


2. 베냐민을 보내주시기를 청하는 유다(14-34)

유다와 형제들은 요셉의 집에 이르자 요셉에게 엎드립니다. 이 구절부터는 유다가 형제들을 대표하는 자격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아마 유다는 재차 애굽을 방문할 때에 인솔자로 인정된 것 같습니다(43:1-15). 요셉은 그의 종과 형제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일의 추이(推移)에 대하여 세심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일을 지체하지 않고 바로 처리하기 위하여 계속 집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록 형제들은 베냐민의 죄에 대하여 용서를 빌기 위해 요셉의 앞에 엎드렸지만 이는 요셉의 꿈이 거듭 성취되는 순간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37:5-10).

요셉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찌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 잘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애굽에서 요셉은 제사장 계급으로 형성된 상류층의 일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잘 알려진 꿈 해몽가였음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실제로 이방의 미신에 따라 점을 쳤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아마 그는 여기서도 형제들을 속이기 위하여 은잔 도난 사건을 점괘에 의하여 알게 된 것인양 위장하였을 것입니다(5절).

유다는 자신들이 무슨 말로 설명하여야 자신들의 정직을 나타낼 것인가 말하며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적발하였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의 죄악은 그들이 오래 전에 요셉에게 행하였던 악한 행동(37:18-28)을 염두에 둔 말입니다. 즉 그들은 지금 당하는 고난이 전날 요셉에게 저질렀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으로 간주하여 자신들의 허물을 시인하고 있는 것입니다(42:21,22). 그들은 이전에 요셉이 꿈 이야기를 할 때 ‘네가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37:8)면서 요셉을 힐난하고 그의 꿈을 비웃었지만 정작 20여 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그들의 말 그대로 요셉의 꿈이 완전히 성취되는 순간입니다. 이런 점에서 여호와 신앙이란 어떠한 역경과 환란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오늘날 성도들은 그 무엇보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고 비웃음사고 있는 복음의 진리를 굳게 파수해야 할 것입니다(요이 1:10).

유다의 말에 대해서 요셉은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합니다. 유다의 제의에 대하여 요셉은 베냐민을 제외하고 모두 풀어 주겠다고 말함으로써 마지막으로 그들을 시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형제들은 아버지가 베냐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 때문에(42:36-38) 요셉의 말에 따를 수 없었습니다. 요셉은 이어서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나의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요셉의 이 제의는 형제들에게 큰 유혹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처자식이 딸린 몸으로서(46:8-25) 자칫하면 평생을 그들과 헤어져 먼 이국땅에서 노예 신세로 억류될 위기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셉은 이러한 제의에 대하여 형제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자못 궁금하면서도 초조하였을 것입니다.

그러자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말합니다. 유다가 베냐민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걸고 대국의 총리인 요셉 앞으로 나와서 간청하는 내용(18-34절)은 히브리 산문 문학 중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입니다. 특히 베냐민의 벌을 자기가 대신 받겠다는 희생 의지를 보이고 있는 33절은 절정에 이르는 감동스런 구절입니다. 유다는 요셉에게 “내 주여 청컨대 종으로 내 주의 귀에 한 말씀 고하게 하소서”라고 말하며 정중하게 협상을 요청합니다. 이는 유다가 요셉에게 자기를 극도로 낮추어 이야기함으로써 긍휼을 얻으려 하는 것입니다. 특히 원문에는 내 주여 라는 말 앞에 ‘오’ 라는 감탄사가 첨가되어 있으므로 그 분위기가 더욱 선명하게 부각됩니다. 유다는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고 말하며 요셉에게는 바로에 버금가는 큰 권력이 있음을 들어(41:44) 부디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말합니다.

유다는 이전에 요셉을 처음 만났을 때 자신들에게 질문하는 요셉에게 대답한 말을 회상하며 말합니다. 아비가 ‘노년에 얻은 아들 소년’은 베냐민을 가리키는데 그는 야곱이 107세경에 가나안땅 에브라임에서 얻은 아들입니다. 이때 베냐민을 낳던 라헬은 난산 끝에 그만 죽고 말았으니(35:16-18) 야곱에게 있어서 베냐민은 아내의 생명을 대신하여 얻은 아들인 셈입니다. 유다는 “그 아비가 그를 사랑하나이다”고 말하며 베냐민을 야곱이 기다리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유다는 베냐민이 죽은 형과 어머니로 인하여 아버지로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는 자이므로 그의 죽음은 곧 아비의 죽음과 같다는 점을 들어 요셉에게 자비를 구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베냐민을 애굽에 데려오라고 말할 때도 그들이 분명히 “그 아이가 아비를 떠나지 못하니 떠나면 아비가 죽겠나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아이’와 유사한 표현으로 아우(19절), 소년(20절), 말째 아우(23절), 아이(30절) 등이 있는데 모두 다 베냐민에 대한 형들의 뜨거운 애정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떠나면 아비가 죽겠나이다’는 야곱과 베냐민의 관계가 갖는 의미로 핵심을 찌르는 문학적 표현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생명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는 베냐민을 요셉에게로 데려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요셉의 준엄한 명령 때문이었음을 상기시켜 선처를 구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요셉이 그들에게 막내아우를 데려오지 않으면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므로, 그들이 가나안에 올라가 야곱에게 그일을 말하여 베냐민을 데려 오게 된 배경을 설명합니다. 유다가 비록 은연중이었을지라도 요셉에게 거듭 아버지 야곱을 ‘주의 종 우리 아비’라고 말한 것은 요셉의 꿈을 확정해 줍니다. 유다는 야곱이 자신들에게 들려준 말을 통하여 야곱의 베냐민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야곱의 아내 는 라헬 을 가리킵니다. 라헬은 야곱에게서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라헬이 낳은 두 아들 은 요셉과 베냐민을 가리킵니다(46:19). 그러나 요셉은 형들의 계략으로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고 아비 야곱에게는 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요셉이 짐승에게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이 광야에 있는 맹수에 의해서 찢겨 죽은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37:33). 이 말을 통하여 요셉은 야곱이 자기 때문에 상심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하였습니다. 야곱은 베냐민의 몸에 만일 해가 미치면 “나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하리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요셉에게 자비를 요청합니다.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아비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비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다’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영혼 속에 영혼이 묶여 있다는 말로, 아비 야곱과 아들 베냐민과의 끊지 못할 유대성을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유다는 자신이 베냐민의 안전에 대해서 자신이 담보하였으므로 아이를 데려가지 아니하면 아비에게 영영히 죄를 지을 것이라고 말하며 요셉의 자비를 거듭 간청합니다. 유다의 담보는 베냐민의 신변에 일어날지도 모를 불상사에 대하여서는 유다 자신이 평생 동안 책임을 지기로 약조한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유다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베냐민의 신변을 안전하게 지켜야 하였습니다.

유다는 최종적으로 요셉에게 협상안을 제시합니다.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이것은 야곱에 대한 효심에서 뿐 아니라 베냐민에 대한 뜨거운 형제애에서 우러나온 자기희생적인 제안입니다. 이는 곧 요셉이 형들에게서 찾아보기를 기대한 마음이자 자세였으니 이로써 요셉의 시험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풀기 어려운 인간사(人間事)라 할지라도 어느 한편이 자기희생을 감수하려고만 든다면 봄눈 녹듯이 쉽게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랑을 수반하지 않는 꽹과리 같은 말만 난무하는 시대이니 각자 자신부터 유다의 행동 의지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약 2:15,16). 유다는 자신이 아이를 데려가지 않은 채 가나안에 올라갔을 때 아비 야곱이 당할 고통을 차마 보지 못할 것입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뜻하지 않게 시험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당황하여 그 자리를 모면하려합니다.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의 탓인양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결코 우리가 시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시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방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을 당할 때 먼저 자신을 바라보아야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유다가 자신들의 과거의 죄를 기억하고 회개하는 모습과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자기희생을 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유다가 자신을 희생하면서라도 동생 베냐민을 아버지 야곱에게 돌려보내려 할 때 요셉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뜨거운 화해를 맞고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문제의 해결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우리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서라도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하시어 문제를 해결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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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4:1-34 형들을 시험하는 요셉 /김동휘 창44:1-34 형들을 시험하는 요셉 /김동휘 Reviewed by □□□ on March 19, 2025 Rating: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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