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4:33-34 회개의 처음과 끝 (2) /박일우

오늘은 성령강림절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주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50일 만에,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으로 이 땅에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 역사적 예수의 사명은 일단 끝나고, 드디어 성령 하나님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주님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에게는, 성령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그를 도우시며 그를 인도하시면서 그와 함께 동거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오신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을 떠나 천국에 이를 때까지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우리를 소망 가운데 지키시며 떠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은 이로써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은 빛이시므로, 우리들의 죄악을 드러내십니다. 직면하게 하십니다. 또한 이를 회개하게 하십니다. 회개의 삶은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창세기 43장과 44장은 요셉의 형님들의 회개의 삶을 보여주는 귀한 부분입니다. 물론 이 때는 아직 그리스도도 성령도 이 땅에 찾아오신 때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임하면서 희미하게나마 회개의 삶이 어떤 삶인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형님들의 회개를 조금씩 확인해 나가게 됩니다. 요셉의 깊은 마음 속에서 솟구쳐 밖으로 터져 나오는 울음은, 바로 이 형님들의 회개 때문입니다. 형님들의 회개 앞에서 요셉은 참지 못하고 통곡합니다. 이집트 총리 동생으로 하여금 활화산처럼 울음을 터뜨리게 하는 이 형님들의 회개는, 오늘 성령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회개가 가지는 몇 가지 본질을 보여 줍니다.

 

첫째로, 회개는 하나님의 빛 안에서 이미 범한 죄악을 통렬하게 뉘우치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님들의 깊은 마음 속에서 통렬한 회개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20여 년 전, 동생을 팔아 버린 그 일은 누가 뭐라 해도 참 잘못한 것이요, 무서운 죄악이요, 돌이킬 수 없는 허물임을, 가슴 아프게들 느끼며 뉘우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회개는 자기가 범한 죄악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 앞에서 그런 죄악을 범한 자신에게 실망하고, 자기의 죄인됨을 가슴 아파하며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된 뉘우침은 단순히 이기적으로 후회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가롯 유다는 스승 예수님을 팔아 버린 것을 후회합니다. 양심의 가책을 크게 받습니다. 그러나 이 죄악으로부터 돌이켜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살하고 맙니다.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유다가 예수님을 팔고 나서 회개하지 못하고 후회와 가책에 그쳐 자살한 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어거스틴이 회개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임종 직전 회개의 기록이 있다. 이는 십자가 강도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라도 절망은 없다.” 회개는 늦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오른 편에 흉악한 강도 한 사람도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주님을 바라보며 회개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바로 그 순간 구원을 얻습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간경화로 죽어 가던 어떤 분은 돌아가시기 삼십 분 전까지, 간절한 복음을 듣고도 끝까지 고개를 흔듭니다. 회개하지 못합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그러나 폐암으로 고생하시던 어떤 분은. 수십 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삶을 사셨지만, 돌아가시기 두 달 전에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가 응급실에서 산소마스크를 쓰고 회개의 눈물을 조용히 흘리던 광경을 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며칠 후 그는 소천하셨습니다. 작년이던가요? 급히 복음을 제시하기 위하여 어떤 분의 병실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딸과 사위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언제나 핍박하고 빈정대는 어르신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도 병상에서, 성령의 강력한 역사에 의하여,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따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틀 후 그 분의 임종 소식을 들었습니다. 위기일발이었지요. 회개와 예수영접은 늦었다는 법이 없습니다.

회개는 자기가 범한 죄를 미워하고 싫어하며 괴로워하되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시는 그런 죄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런 유의 죄를 대적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시기 질투로 인한 이 무서운 죄를 회개하지 않았다면, 형들은 요셉의 동생 베냐민을 또 미워할 수도 있었습니다. 만일에 형들의 마음 속에 요셉에게 품었던 시기와 질투가 회개되지 않고 그대로 잔존했다면, 베냐민조차 또한 어떤 봉변을 형들로부터 당하게 되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형들이 아닙니다. 철저히 회개하는 형들이 된 것입니다. 삶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째로, 회개는 삶의 방향을 새롭게 설정하는 것입니다.

다시는 죄의 방향이 아니라 의의 방향으로 삶을 추진해 나가는 것입니다. 형들의 회개는, 저들의 삶의 방향을 바꿉니다. 이제는 아버지 야곱에게 진심으로 효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남은 동생 베냐민을 아끼고 돌보는 쪽으로 가닥을 잡게 됩니다. 이집트의 총리 요셉이 의도적으로 막내 동생을 거론하며 서슬시퍼렇게 데려오라고 호통치면서, 그렇게만 하면 첩자가 아님을, 정직한 사람들임을 인정하겠다고 하자, 난감해 합니다. 급기야 시므온이 인질로 잡히고, 아홉 형들이 낭패한 마음으로 가나안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 야곱을 설득하는 과정에서도, 형들의 달라진 모습이 나타납니다. 아버지 야곱의 어렵고 어려운 허락을 겨우 받아, 베냐민과 더불어 다시 이집트로 옵니다. 그리고는 총리 요셉을 그 앞에 엎디어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문제가 더 심각해 집니다. 불안한 대접도 융숭히 받고, 또 충분한 식량도 얻어 다시 귀향길에 오르는데, 난데없이 추격을 받습니다. 총리 요셉이 아끼는 개인 은잔이 없어졌다는 모함을 당합니다. 무슨 점도 치는, 그런 은잔입니다. 그러나 이미 요셉이 베냐민의 쌀 자루 속에서 은잔이 나오도록 연극을 꾸며 놓은 상태입니다. 형들로서는 큰 일이 난 겁니다. 옷을 찢으며 울면서, 모두들 요셉 앞에 다시 되돌아 오게 됩니다. 유대땅에서의 저간의 이야기가 다시 한번 토로됩니다. 자세한 집안 사정과 그 동안의 내막을 이야기하며, 베냐민을 어찌하든 보호하려 합니다. 그리고 아버님 이스라엘의 베냐민을 향한 사랑을 절대화하고 존중하려 합니다. 베냐민을 잃게 되면 아버지도 잃게 됨을 탄원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형들의 회개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게 됩니다.

여기서 셋째 형 유다는 모든 형들이 회개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역할을 하게 합니다. 자기가 막내 동생 베냐민 대신 인질로 잡히겠다는 겁니다. 그 대신, 다른 형제들과 베냐민을 아버지에게 돌아가게 해 달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달라졌습니다. 요셉 자기를 팔아치우며 아무렇지도 않게 낄낄거리던 형들이 아닙니다. 효성이 지극할 뿐 아니라, 어린 동생을 위하여 자기 몸을 인질로 볼모로 내 놓기까지 하는 희생과 헌신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이제는 더 이상 볼 것이 없다는 판단에 이릅니다.

회개는 이와 같이 삶의 방향을 바꾸게 합니다. 삶은 바꿀 생각이 추호도 없이, 입으로만 주님을 영접했다느니, 말로만 회개했다고 하면서, 여전히 즐거이 죄를 범하며 죄 가운데 있는 것은, 아직 믿음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아직 천국 백성이 된 것이 아닙니다. 아직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아직 성령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아닙니다. 회개는 자기만을 주목하고 자기의 행복과 쾌락을 중시하던 삶에서, 주님을 주목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중시하는 삶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일입니다. 자기의 자존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뜻이 더 중요하게 됩니다. 시기와 질투의 감정에서 사태를 처리해 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위하여 헌신하고 희생하는 데까지 삶의 방향을 확실히 잡아 나가는, 방향의 큰 선회, 그레이트 유턴이 회개에는 반드시 있습니다.

회개하는 자의 삶은 그러므로 새로운 삶입니다. 그래야 무슨 일이든 형통하게 됩니다. 회개하지 않고 죄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더러운 그릇에 어찌 최고의 요리를 담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지려면 나 자신을 송두리째 주님의 가슴 안으로 올려 드려야 합니다. 우리 안에 오신 성령께서 이 일을 도와 주십니다. 지나친 돈이나 화려하고 멋진 환상을 좇다 보면 잘못된 길을 달리기 쉽습니다.

 

셋째로, 회개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어우러지며 통합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열 사람의 형이 요셉을 팔아 치울 때 그 중에는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맏형 르우벤은 어찌하든 생명은 건져 주려 했습니다. 맏형답게 나중에 빼돌려 살려 보려 했습니다. 셋째 형 유다는, 구덩이에서 굶어 죽거나 짐승에게 공격받아 죽게 하느니, 차라리 사람 사는 동네로 노예로라도 파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일에는 모두 실패합니다. 결국 공범이 된 것입니다. 결사적으로 막으며 무슨 수를 쓰더라도 요셉을 구해 내지 못한 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죄를 범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공동행위로 죄를 범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제는, 세월이 흘러, 기근을 대비하기 위하여 식량을 얻기 위하여 함께 이집트까지 온 형들입니다. 시므온이 포로로 잡히기도 하고, 유다가 인질이 되겠다고 다짐하기도 하는, 고통과 운명을 함께 하는 공동체로 변모되었습니다. 이 감동적인 광경을 요셉은 지금 눈 앞에서 보고 있습니다. 똘똘 뭉쳐서 아버지의 지시에 따르고, 늙으신 아버지를 설득하고 봉양하며, 아버지가 총애하시는 막내 아들을 같은 마음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성숙한 공동체로 바뀐 것입니다. 이 정겨운 공동체를 요셉은 지금 보고 있습니다.

회개는 ‘나’의 죄만을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에는 중보기도로서의 회개도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사람의 죄를 내가 회개하는 것도 회개입니다. 내 가족이 범한 죄를 내가 회개하기도 하고, 내 교회 공동체의 지체가 범한 죄를 내가 회개하는 것도 회개입니다.

누군가 죄를 범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정죄하고 비판하고 수군수군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이때 우리 안에 오신 성령님이 아파하십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정죄할 때 성령님의 그런 아파하심이 느껴지지 않으세요? 형제의 범죄함을 목도할 때 우리는 중보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의 죄를 내가 대신 아파하며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의 기도를 기뻐하며 들어 주십니다.

내 가문의 오래 된 죄를 내가 대신 회개하면서 중보하는 것도 회개기도에 들어갑니다. 우리들의 조상들은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죄악을 범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종류의 우상숭배, 미신, 잡신을 섬긴 것, 굿, 타종교를 믿은 것, 마술, 주술, 사술, 점과 점성술에 참여한 것, 악령에 의한 마법, 사주팔자, 관상, 점, 제사, 간음, 호색, 타인을 학대한 것, 살인, 기만, 거짓말 등의 죄를 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죄들을 지금 내가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와 죄씻음을 구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더 범위를 넓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죄, 조상들의 죄를 후손인 우리가 아픈 마음으로 회개하는 것도, 회개입니다. 사색당파로 인한 죄, 지역색을 가지고 서로를 미워하며 질시하던 죄, 남과 북이 총부리를 겨누며 피를 흘리던 동족 상잔의 죄, 잘못된 정치 권력으로 무고한 백성을 탄압하며 도적질한 죄, 툭하면 숙청을 감행하면서 인간의 생명을 파리 목숨보다 경하게 여기는 북한 땅 정권의 죄, 등등. 내 탓, 네 탓,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 죄를 범할 수 있는 죄인들이기에, 중보하며 기도하여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중보회개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는 진노의 현장에서, 롯과 그 가족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모세의 중보회개기도를 하나님은 그 때마다 들으셨습니다. 광야 40년 동안의 그 숱한 배신과 원망과 불평의 죄악들도, 모세의 중보기도 중보회개기도의 덕분으로 그 때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움직임을 봅니다. 진노의 불길이 진 끝을 사루기 시작할 때에도, 불뱀에 물렸을 때도, 하나님은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심판의 손을 멈추시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네 명의 친구들이 지붕을 뜯으며 들것에 실어내리는 중풍병자를, 예수님은 친구들의 믿음과 중보의 마음을 보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중풍병자의 죄가 사해졌음을 선포하는 죄사함의 은총도 선포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높이 달리셔서 운명하시면서. 예수님은, 희롱하고 비난하며 야유하는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은 중보의 신비가 언제나 담겨 있습니다. 그 어떤 흉악한 우리들의 죄악도 다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흘리신 보혈은, 지금도 성령 안에서 우리들의 중보기도 중보회개기도를 기다리고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이제 다같이 눈을 감으시고, 묵상해 봅니다. 나는 참된 회개를 거쳤는가? 내 안에 혹 지난 세월 저지른 죄악을 충분히 회개하지 못한 죄가 없는가? 내 삶의 방향을 나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완전히 유턴하고 있는가? 주님이 내 삶의 주인이시오, 주님의 뜻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는 삶으로 나는 삶의 방향을 확고히 잡고 있는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나의 가족의 죄, 나의 교회 공동체 지체들의 허물, 나의 직장 동료들의 약함, 내 가문 대대로 내려 오는 조상의 죄, 나의 민족 동포와 역사적인 죄를 대신 통회하며 기도하기를 원하는가? 묵상하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감사, 회개, 중보, 간구의 시간을 갖습니다. 한 2분간 침묵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면서 온전한 회개를 거치게 하시고 날마다 회개의 삶을 모두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지은 죄 통렬히 회개하게 하시고 그 죄 미워하며 싫어하며 대적하게 하시고, 새로운 삶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중심의 삶이 아니라 주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의 혁신을 날마다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중보회개의 마음도 더욱 뜨겁게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설교 묵상 질문(소그룹 모임의 나눔으로 활용하세요)

1. 죄악을 범하고 나서 이를 통렬히 회개하는 사람과 그저 건성으로 후회하는 사람은 그 삶에 어떤 차이가 나타나게 될까요? 삶의 주인이 자기인 경우와 주님인 경우에 자기가 범한 죄를 향한 태도는 어떻게 다를까요?

2. 같은 죄를 반복하여 범하면서도 자꾸만 둔하여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죄책감만 느끼면서도 삶의 변화가 주어지지 않고 있다면 어디서부터 점검하기 시작해야 합니까?

3. 우리들의 조상이 범한 죄에 대하여 나는 기도 가운데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까? 회개의 기도가 나의 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이웃의 죄, 내가 속한 공동체의 죄, 내 조상의 죄, 심지어 나의 민족과 조국의 죄까지 포함된다면, 내 기도의 내용은 어떤 변화를 경험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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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4:33-34 회개의 처음과 끝 (2) /박일우 창44:33-34 회개의 처음과 끝 (2) /박일우 Reviewed by □□□ on March 19, 2025 Rating: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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