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4:33-34 회개의 처음과 끝 (3) - 용서 /박일우

(설교가 시작되기 전, 한 편의 짧은 영상을 관람한다. 세 사람의 심사 위원과 그들 앞 무대 위에 선 한 청년과의 대화. 티비 tvN에서 주말마다 방영되는 Korea's Got Talent 대회의 한 모습. 청년의 이름은 최성봉. 응모 신청서에 아무런 기록이 없는 그에게 심사위원의 질문이 시작된다.

직업이 무엇이냐? 노동직입니다. 가족사항에 아무런 기록도 없는데? 사연인즉, 3살 때 고아원에 맡겨진 한 그는, 5살 때 고아원을 탈출한다. 구타 당하는 것이 너무 싫어서.

그래서 그로부터 근 10년간, 아파트 층계 밑에서, 화장실 복도에서, 아무 데서나 뒹굴며 자고, 껌도 팔고 박카스도 팔면서. 이리 저리 팔려 다니던 악몽과 같은 일도 겪으면서. 그래도 죽지 않고 산다.

철이 들고,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검정고시를 거쳐 마치고, 고등학교를 다녔다. 지금의 직업은 막노동꾼. 무표정의 눈빛으로 자기의 생애를 회고하는 청년은 하루살이라는 단어를 유독 많이 쓴다.

노래할 것이냐? 고 묻는 심사위원의 요청에, 그는 마이크 앞으로 다가선다. 모두들 긴장한다. 어떤 노래일까? 그런데 모두들 입을 벌린다. 눈을 동그랗게 뜬다. 박수가 터져 나온다. Nella Fantasia 라는 노래가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왜일까?

그의 노래는 그 힘들고 어렵고 고독했던 생애, 상처투성이의 세월이었을 그 생애를 압도하는 놀라운 노래였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미성(美聲), 영혼을 전율케 하는 고성(高聲), 어디서 저런 소리, 저런 음악이 나올까? 스테파노가 아닌데, 마리오 란자가 아닌데, 엄정행이 아닌데, 어디서 저런 음빛깔, 저런 옥같은 선율이 흘러 나올까?

그런데 그의 눈은 표정이 없다. 지난 세월을 모두 이 발성 이 음악으로 삼켜 버린 듯,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 온 듯, 그의 음악은 그가 못다한 수많은 이야기를 내뱉고 있다.

곡이 끝나자, 눈물 흘리던 배우 심사위원이 이렇게 말한다. “최성봉 씨를 지금 안아 주고 싶다.” 또 심사위원 박칼린의 질문이 정곡을 찌른다. “왜 노래하게 되었느냐?” “술집에서 요란한 노래들이 많은데 한 번은 누군가가 진지한 성악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에 매료 되었다.” “누구에게 배운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혼자서 흉내낸 것입니다.” “그대 안에 악기가 하나 들어 있다.” 그는 합격되었다. 그는 이제 유명인이 되었다.)

 

역경을 뛰어넘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뭉클하게 전달되어 옵니다. 생각해 봅니다. 이 청년의 부모님은 누구일까요? 아니면 그는 어떤 미혼모가 감추고 감추면서 3살 될 때까지 기르다가, 이제는 어쩔 수 없어, 고아원에 맡긴 것일까요? 어쨌든 그는 한 평생을 엄마가 누군지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고 힘들고 서럽게 살아 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자기를 그렇게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놓고 떠나 버린 부모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그에게 음악과 아름다운 목소리를 주시며 그를 보호하시고 지키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만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설사 그가 이제는 부모를 용서했다 하더라도, 그의 세월 속 그의 잠재의식, 그의 마음 속에 뿌리내리고 있을 상처들과 쓴뿌리들은, 칡넝쿨처럼 엉켜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이 그를 쓰다듬으시고 이제 그가 새로운 삶 치유된 삶의 여정을, 힘차게 살아가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수 정도가 아니라, 이제 그가 예수 우리 주님 안에서 참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되어 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가 고통 받던 지난 긴 세월, 예수님이 그와 동행하셨음을 우리는 압니다. 계단 한 모퉁이에 웅크리고 잠들어 있을 때에도 우리 주 예수님은 그와 함께 웅크리고 그를 보호하고 계셨습니다. 축복합니다. 그를 돕는 따뜻한 손길이 실제적으로 그의 삶을 위로하게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요셉도, 사실은 그 청년 못지 않은 고난과 역경을 겪은 자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20여 년 만에 자기의 원수들을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게 됩니다. 자기를 죽이기까지 하려 했던 사람들, 자기를 팔아버린 사람들, 자기에게 충격적인 상처, 엄청난 고난의 삶을 시작하게 한 그 장본인들을, 지금 눈앞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들을 호령할 수 있는 권좌에 앉아 만나고 있습니다. 그 형들이 이제는 자기 앞에 엎드려 벌벌 떨고 있습니다. 동생 요셉이 의도적으로 펼치는 드라마에 잡히어, 형들은 전전긍긍, 어쩌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책감과 죄의식에 시달려 온 지난 세월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형들의 달라진 모습이 아울러 드러납니다. 참된 회개가 형들의 삶 속에 거목처럼 뿌리내리고 있음을 요셉은 이제 알게 됩니다. 여기서 요셉의 울음이 터집니다. 동생 베냐민을 아끼는 형들의 모습과 아버지를 공경하는 형들의 모습 속에서, 이제는 요셉은 더 견딜 수 없이 울음을 터뜨립니다(창 45:2).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형들이 겁이 나서, 인편에 거짓 유언을 전해 오면서, 죄의 용서를 또 간절히 빌 때(창 50:17)에도, 요셉은 울음을 터뜨립니다. 

요셉의 울음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복합적인 감정이겠지요. 지난 세월의 억울함, 그리고 형들의 당황하는 모습, 죄책감과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는 불쌍한 모습, 그러나 형들의 무척이나 달라진 모습, 또한 그런 형들을 이용하여 지금 이 보좌에 오르기까지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손길, 요셉이 어릴 때 꾼 꿈을 이루어주시기 위하여 펼쳐 오신 하나님의 슬프도록 치밀한 계획과 인도하심, 그리고 기근 가운데서 요셉의 가문을 구원하시기 위한 놀랍고 신기한 섭리.. 이런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서슬 시퍼런 총리가 자기들이 팔아버린 바로 그 동생 요셉이라는 사실 앞에, 형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얼마나 사시나무 떨 듯 떨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형들에게 요셉이 던지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 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창 45:5-7). 그리고는 이제 아버지까지 모시고 와서 이집트에서 함께 아쉬운 것이 없이 살자고 제안합니다. 모두들 입을 맞추고, 부둥켜 안고 울면서, 회개와 용서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나중에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나자, 덜컥 겁이 난 형들은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엎드립니다. 이 때 요셉은 다시 간곡한 말로 형들을 위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진정한 회개와 진정한 위로의 만남이, 감동적인 눈물 바다가 되면서, 창세기를 장식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죄많은 우리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역하고 모욕하는 우리들을 용서하시려고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말할 수 없는 수치와 고통 가운데서, 우리들의 모든 죄를 다 짐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십자가 고통의 끝에는 부활이 있었습니다. 요셉의 긴 고난과 인내의 여정 끝에 영광의 보좌가 기다리고 있었듯이. 주님은 생명의 왕 답게, 생명의 주인 답게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으로, 다시 영광과 빛의 세계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우리들에게 마지막 가장 중요한 부탁을 남기셨습니다. 그것은 부탁이기도 하지만 계획이기도 합니다. 이 죄사함의 은총, 이 용서의 소식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해 달라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를 불러 세우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해, 회개와 용서의 소식, 놀라운 화해의 소식을 전하라고 말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이디오피아 이기형 선교사님으로부터 “에티오피아 소식” 선교 편지가 6월 8일 날짜로 날아 왔습니다. 거기 소개된 한 할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에티오피아는 1976년부터 1991년까지 공산주의 정권에 의해 다스려졌으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념의 제물이 되었는데 이 할아버지 역시 그 중의 한 분이십니다. 이기형 선교사님이 사역하시는 지역의 하나인 야벨로에서 북쪽으로 약 300킬로미터 떨어져 넓게 분포하고 있는 ‘시다모’ 종족에서 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의 정확한 성함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아바바(어른에 대한 존칭)’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약 30년 전에 공산주의가 에티오피아 땅을 휩쓸고 있을 때 할아버지는 부인, 아이들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있었답니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남부럽지 않은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 청년으로 구성된 공산당원들이 갑자기 집에 들이닥쳐 동생을 군대로 끌고 가려고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함께 한 마을에서 자라온 붉은 완장을 찬 청년과 몸싸움을 했고 그 와중에 자신도 모르게 주위에 있는 돌을 들어 그 청년의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검붉은 피를 흘리며 그 청년은 쓰러져 그 자리에서 직사했습니다. 다급해진 할아버지는 사랑하는 모든 가족들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이 사건으로 할아버지는 도망자 신세가 되어 가족들과 영원히 헤어지게 됩니다. 사람을 피해 산 속으로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아다니신지 10여년이 되었을 즈음에, 어느 분을 통해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재혼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그렇지만 고향에는 죽은 청년의 가족들이 그를 보복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감히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늘 떠돌아다니는 신세이었기에 다시 한 가정을 이룰 수도 없었습니다.

약 15년 전에는 야벨로까지 흘러 들어오게 됩니다. 그의 딱한 처지를 전해들은 야벨로 교회 지도자들이 그에게 예수님을 전하면서 교회의 작은 방을 그의 처소로 내어 줍니다. 그 때부터 할아버지는 교회의 모든 허드레 일을 하면서 열심히 말씀을 배우며 믿음 안에서 사시게 되었습니다.

3년 반 전 이기형 선교사님이 처음 그 분을 뵈었을 때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파여, 지나온 세월이 그리 녹녹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답니다. 그렇지만 평안이 가득 찬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오신 어느 손님이 그 분에게 송아지 한 마리 정도 사실 수 있는 목돈을 주시면서 삶이 더욱 활기차지셨습니다. 송아지를 구입해 교회의 넓은 땅에 풀어 놓아 자식처럼 애지중지 하게 키우고는 다시 시장에 내다 파시므로, 조금씩 저축도 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음과 정을 붙일 곳이 있다는 것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 보다 더 큰 하나님의 위로가 할아버지에게 찾아왔습니다. 약 1년 전에 자신의 고향에서 대형 집회를 인도하시기로 되어 있는 어느 목사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집회 기간에 자신의 가족을 찾기 위한 광고를 부탁드립니다. 마침 연락이 됩니다. 동생들이 할아버지를 찾아 왔습니다. 젊은 시절 때 헤어진 형제들은 이미 백발이 다 된 모습입니다. 눈물로 재회를 하고 난후 서로의 안부를 묻습니다. 고향에서는 이미 타지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반가운 소식은 90을 넘기신 어머니께서 아직 살아 계시다는 소식입니다. 어머니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했지만 죄책감과 보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선뜻 고향에 달려가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몇 달 전에 고향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자신이 살해한 청년의 가족들 모두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뵙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그 동안 애지중지하게 키워오시던 소를 팔아 30년 만에 고향을 방문합니다. 그 동안 꿈에서만 그리워하시던 어머니를 만납니다. 동생들은 함께 살기를 권합니다. 그러나 그 동생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본인의 삶의 터전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비록 부인과 자식들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지만, 지금도 어머니의 사진을 품에 품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 사진을 꺼내 보여주며 자랑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로 인한 화해. 죄사함과 용서의 사건. 살인자와 피해자 가족 간의 화해. 용서하고 용서받는 사건이 지금 아프리카 땅 뿐 아니라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회개의 삶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일흔에 일흔 번이라도 새출발하며 용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수천 년 전, 동생을 팔아버린 형들을 만났지만, 통곡하며 이들을 용서하는 동생 요셉. 이 아름다운 화해는, 이 천년 전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름다운 화해의 그림자였음이 분명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회개와 용서와 화해는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끌어낼 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각 가정 안에서도 이런 역사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길고 긴 고난과 인내의 터널을 감당하고 돌파하면서, 예수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삶 가까이에도 이런 화해, 그리스도로 인한 화해의 이야기가 계속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한 주간,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용서의 소식, 주님의 사랑 앞에서 철저한 회개를 통한 우리들의 새 기쁨, 이 새로운 삶의 소식들이, 가까운 이웃에게 기쁨으로 전해지는, 또 한 주간 되실 수 있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시간, 다 같이 눈을 감으시고, 죄인인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우리 주님 앞에 나아갑시다. 그리고 감사합시다. 찬양합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아무 죄도 짓지 않은 것처럼 간주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는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채, 우리들의 가슴 한 구석에 묻어 두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떠 올립시다. 그리고 용서합시다. 용서를 결단합시다. 용서를 선포합시다. 이제 우리는 죄의 종이 아닙니다. 죄값을 치룰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죄를 미워하고 대적하는 삶을 살게 해 주신 주님 앞에서 간절히 우리들의 감사와 결심을 기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한 2분간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모든 죄를 회개합니다. 우리들이 범한 모든 죄를 씻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용서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이 한 주간도, 날마다 죄를 회개하고 고백하는 회개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용서한다고 선포한 그 이름들을 이제는 날마다 우리 입술로 단호하게 날마다 용서함을 선포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용서의 은혜를 묵상하면서, 죄를 극복하고 대적하는 승리의 삶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을 기도합니다. 아멘.

 

설교 묵상 질문(소그룹 모임의 나눔으로 활용하세요)

1. 세 살 때 고아원에 맡겨지고 그로부터 고독과 고난의 이십 수 년이 흐른 후, 그 험난한 삶을 극복하고 유명한 청년 가수가 되었을 때, 부모를 만나게 되었다면, 회개와 용서의 문제가 어떻게 다루어져야 할까요?

2. 형님들의 상황을 수차례 살피고 난 요셉이 통곡하는 바, 이 통곡에는 어떤 의미가 실려 있는 것일까요? 요셉이 형들을 용서한 배경에는 어떤 점들이 전제되고 있습니까?

3. 피해자이든 가해자이든 예수님을 구주로 주님으로 고백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 옵니까? 이디오피아의 아바바 할아버지의 경우는 어떤 화해의 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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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4:33-34 회개의 처음과 끝 (3) - 용서 /박일우 창44:33-34 회개의 처음과 끝 (3) - 용서 /박일우 Reviewed by □□□ on March 19, 2025 Rating: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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