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된 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그 해방의 기쁨을 소유한 백성들은 누구나 '생명의 속전'을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속전을 요구하신 주님은 몇 가지 기준을 주셨는데 그 첫째는 만 20세 이상이 되는 사람은 누구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반세겔의 속전입니다. 세겔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낮은 단위의 화폐입니다. 그러나 그 낮은 단위의 세겔의 절반을 내라고 하신 것은 부담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넓혀 주신 것입니다.
셋째는 빈부에 관계없이 속전을 내도록 하신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부자라고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곧 예외가 없는 참여를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이 생명의 속전을 드리라고 하신 말씀의 깊은 뜻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먼저,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을 대속의 죽음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죽으심이 죄의 결과나 혹은 그분의 허물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리를 십자가에서 대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생명의 속전을 반 세겔씩 내야 하는 것처럼, 주님께서 생명의 속전으로 보혈의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입니다. 반 세겔이 아닌 십자가로 주님은 우리 자신을 위해 생명의 속전이 되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남미의 '이과수폭포'가 멋진 배경으로 나오는 영화 '미션'은 그 내용이 아주 감동적인데, 인디안 원주민을 잡아 파는 노예상인 '로드리게'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는 인디언들을 무자비하게 잡아서 외국 상인들에게 팔아 많은 돈을 벌었고, 정욕에 눈이 어두워 자기의 형제를 무참히 칼로 죽이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전형적인 노예상인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깊은 좌절에 빠져 절망에서 헤매고 있을 때, 한 사제의 끈질긴 권면으로 인디안 사역에 동참하게 됩니다. 동행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인디언을 사냥할 때 사용하던 도구들을 망태기에 집어넣고 그것을 밧줄로 몸에 묶고서 끌고 다닙니다. 평탄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절벽을 오르면서도 그는 망태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마치 죄악의 질고를 망태기에 담고서 끌고 가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사실 그가 주님을 영접했을 때 이미 그 죄악의 질고에서 해방이 되었지만 그는 그것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망태기를 끌고 절벽을 올라갑니다. 처음에는 원주민들이 그를 보고서 기겁을 합니다. 자기들의 원수인 그를 알아보고 죽이려고 하지만 회개하고 사제와 함께 사역에 동참한 사실을 알고 나서는 오히려 원주민들이 로드리게의 밧줄을 끊어줍니다. 큰 소리와 함께 망태기가 절벽아래로 굴러 떨어집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망태기가 자기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끼면서 비로소 그는 해방감을 확인합니다. 이미 구원의 은혜를 입었지만 자기의 죄악된 증거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확인하면서 비로소 그는 해방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로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죄악의 질고를 지고 여전히 고통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다가 나중에야 주님의 은혜를, 주님의 구원을 확인하고 그제서야 비로소 해방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은 이미 우리에게 죄악의 멍에를 끊어 해방의 은혜를 선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그 구원의 사실을 우리 모든 성도들이 이 시간 다시한번 확인하고 기뻐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주님의 죽으심의 능력은 오늘 본문 말씀처럼 '철저하게 개인적'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들이 있으면 그 일에서 빠지기를 원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더운 날씨에는 예배를 드리는 일 조차도 누가 대표해서 했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 들지도 모릅니다. "오늘 저녁예배는 당신이 대표로 갔다 와. 나는 오늘 시원한 수박이나 먹으면서 텔레비젼 중계나 볼테니까..." 혹시 그런 마음을 갖고 예배를 빠지지는 않습니까?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당번이 있습니다. 아침 일찍 가서 청소하고, 시간마다 지우개 털어야 하고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반에서 힘 꽤나 쓰는 친구들이 꼭 당번을 하려는 시간이 있어요. 바로 뜨거운 여름날 체육시간입니다. 뙤약볕에서 고생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당번을 소중히 여겨서가 아니라 자기에게 무엇인가 이득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체육시간이 끝나면 당번의 특권(?)도 다시 돌려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생명의 속전을 드려야 한다는 이 말씀에는 누구든지 예외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가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임하지만 그 구원의 은혜를 얻는 결단은 언제나 개별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정치적으로 출세한 사람들이나 경제적인 부를 누리는 사람들 중에는 부모의 후광이나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일부 교회에서 부모의 후광으로 큰 교회를 그대로 인수 맡는 소위 '대물림'으로 인해 많은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행위를 비도덕적이고 반사회적인것으로 여겨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터텟방송 'C 3 TV '에서는 "교회의 세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사이버 투표가 한창인데 약 85%가 반대한다는 의견으로 압도적입니다. 요즘 그래서 부모의 교회를 대물림한 목회자들은 얼굴 들 곳도 없이 따가운 시선 속에 살고 있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대안이라면, 먼저 세례받은 성도들의 공동체인 '당회'에서 신임투표를 하는 방법이 좋을 듯 싶습니다. 장로 몇사람으로 구성된 '기획위원회'가 아닌 전체 성도의 의사를 묻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방법은 은퇴하는 목회자의 자녀가 훌륭한 자질을 지녔다면 그에게 개척의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교회건축을 위한 대지나 기금을 넉넉히 제공해 주어 그 자신으로 하여금 훌륭한 목회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원치않게도 세상을 닮아갑니다. 사실 교회는 세상과는 달리 감사가 넘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감사보다는 일 중심으로, 업적 중심으로 변질되어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큰 교회를 건축중인 한 목회자가 안타까움으로 하소연을 합니다. 가는 곳곳마다 질문을 받는데, 새 성전의 비젼을 묻기보다는 교회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좌석 수가 얼마나 되는지, 실내 장식은 얼마나 들었는지, 교인 수는 얼마나 되고, 예산은 얼마나 되는지, 그러한 질문을 받으면서 그는 매우 곤혹스러워했습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이런 질문의 수준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여러분이라면 다른 교회를 방문하실 때 제일 먼저 무엇을 생각하며, 그 교회의 목회자를 만났을 때 무엇을 먼저 질문하시겠습니까? 입주 예배를 마치자 마자 우르르 일어나 "이거 몇 평짜리야? 얼마줬어?"라고 묻는 사람들을 보게됩니다. 그런 질문은 나중에 해도 가능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이제 새 집을 장만했으니 여기서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하고 찬송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겠느냐?"라는 권면과 칭찬일 것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이제 우리는 자유로워야 할텐데 "왜 이런 질문들이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만족하지 못하거나 끊임없이 비교하는 사람들에게 필연적으로 생기는 결과는 열등감입니다. 그리고 정당하지 못한 경쟁의식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나 목회자의 문제가 여기서부터 생깁니다.
반면에 감사는 어떤 것입니까? 자신의 현재의 형편에 만족할 때부터 감사가 생깁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을 때에 진정한 감사가 생깁니다. 비교하지 않으니 시기도 질투도 열등감도 틈탈 수 없습니다. 열등감이나 시기가 틈타지 않으니 그는 다른 사람 앞에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윗은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어도 넘치는 감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대인의 모습이지요.
우리는 지난 주일 맥추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모처럼 '소인'된 우리가 '대인'이 한번 되어보는 날이었습니다. 진정한 감사를 한다고 하는 것은 대인이 되는 날입니다. "하나님, 그전에는 몰랐는데 이런 어려움과 이런 시련도 감사의 조건이 되는군요"하고 감사를 드리는 모처럼 대인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백성들이 드린 속전은 16절에 보면, 회막의 봉사를 위해서 사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드리는 헌금은 성전의 여러 부분에서 사용됩니다. 교회의 지상과제인 선교와 교육과 봉사와 친교를 위해서, 교역자들의 생활비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그 예물이 가장 먼저 쓰여져야 할 곳은 회막입니다. 성전의 운영을 위한 지출의 근거를 분명히 해주신 이 말씀은, 예배의 원만한 환경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도들의 헌신이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헌신은 하지 않으면서 늘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시설이 어떠니, 더운데 에어컨이 없느니, 추운데 온풍기가 없느니, 수양회에 가면 간식이 시원치 않으니" 하고 늘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용돈을 펑펑 주십니까? 그러면 천원짜리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도 아까워하지 않을꺼예요.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해본다면 천원의 수입이 얼마나 귀하고 어려운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의무를 제대로 감당한다면,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절약을 원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헌신이 없는 곳에는 모든 것이 넉넉해도 불평이나 원망이 있기 마련입니다. 회막에 봉사하는 일에 쓰임을 위해서 모든 백성들이 반세겔을 드리지만 그것은 예외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교회를 세우시고, 자기의 피로 이 교회를 사시고 그 성도들을 만나기를 기뻐하시는 주님, 주님이 세우셨기에 그 교회는 영원하고, 주님께서 피로 사셨기에 그 교회에 출입하는 모든 자들은 감사로서의 삶을 살게 된 줄 믿습니다. 생명의 속전 되신 그리스도께서 사신 이 교회를 정성을 다해 사랑하고, 섬기면서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어가는 평안의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생명의 속전을 이루신 아버지여,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제 우리가 의무로서가 아니라 감사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살기를 원합니다.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마땅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살기를 원합니다. 아버지여, 이 마땅한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시옵소서. 이제 그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의 남은 삶을 주님을 위하여 살게 하시고, 아직도 주님의 은혜를 모르는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이제 우리가 생명의 속전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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