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32:1-10 온전한 기다림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의 강팍한 바로의 마음을 결국은 꺾으시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를 들어 기도하게 하시고 홍해를 육지같이 열어주셨습니다. 목말라하는 백성들에게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함으로 넉넉하게 짐승까지도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적과 은혜의 순간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춤추었던 그런 장면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일하실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다짐했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겠습니다" 사실 그때의 분위기는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 중심적인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32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테스트해 볼 만한 중요한 계기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시내산은 풀 한 포기, 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아주 메마른 산입니다. 그러나 그 산은 지금도 세계의 크리스챤들과 일반인들에게도 신비로운 산으로 여겨져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오르는 신기록을 매년 경신하고 있습니다. 성지순례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시내산이고, 시내산에 올라보면 전 세계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정상은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인기있는 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세 당시의 시내산은 그렇게 아무나 올라갈 수 있는 산이 아니었습니다. 백성의 장로들도 중간에서 머물러 있으라고 했고 모세만 단독으로 올라오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지 40일이 가까워 오자 백성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분위기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백성들이 모세의 대변인 격인 아론을 향해 아주 심각한 재촉을 하고 있습니다. "일어나라" 이것은 아론을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까지 모세만 의지하고 살았던 우리가 이제 더 이상 모세만 바라보고 살 수 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네가 우리를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 되지 않겠느냐?"라는 어떤 행동을 촉구하는 말입니다.

통역하는 사람의 약점이 하나 있지요. 얼마 전에 일본선교회에서 한국에서 유명한 부흥 강사님과 함께 일본 교회에 가서 집회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일본에 거주하시는 한국 목사님이 통역을 하셨습니다. 저는 통역을 그렇게 은혜롭고 정확하고 빠르게 하는 분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어요. 재스츄어나 억양이 물 흐르듯이 어쩌면 통역을 저렇게 잘 할 수 있을까?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한국인들과 일본인들 모두가 은혜를 충만하게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일은 그렇게 은혜롭게 통역을 잘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친 그 목사님 교회는 너무나도 교회가 부흥이 안되는 거예요. "저렇게 통역을 통해 은혜를 끼칠 수 있는 분이라면 당신 교회에서도 목회도 설교도 잘할텐데 왜 그럴까?" 그것이 바로 통역이 가지는 한계입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전하는 달란트는 뛰어난데 자기 것은 없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과 일을 해보면 회장감이 있고 총무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총무는 잘하는데 회장을 시켜놓으면 언제나 일을 죽을 쑵니다.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아서 그 일을 행하는 것은 잘하는데 자신이 결정하고 자신이 계획하고 자신이 리더하는 자리에 가면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론을 통해 오늘 그러한 한계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와 함께 있는 아론은 능력의 사람이고 은혜의 사람이고 신비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없는 아론은 너무나도 무기력한 거예요. 백성들이 아론을 향해서 "일어나라. 당신이 이제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요구했을 때 거침없이 무너지는 아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모세가 없는 아론은 너무나 무기력한 모습이었습니다.


문제는 40일이었습니다. 40일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의미를 많이 부여해주고 있는데 예를 들면, 모세가 40년을 광야에서 있었다든지, 주님께서 시험산에서 40일 동안 금식을 하셨다든지, 부활하신 후 백성들에게 40일 동안 함께 하셨다든지 하는 많은 신앙적인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회를 해도 40일 기도회가 훨씬 더 마음에 들고, 금식기도를 해도 40일 한번 해보았으면 하고 기도생활을 사모하는 분들은 그것이 평생의 소원일 것입니다. 저도 아직 부족해서 그런지 40일 금식기도는 아직 결심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기도를 해야 할 때가 올 지는 모르겠지만 쉽지 않지요. 40일 금식기도는 생명을 내어놓고 해야 합니다. 그만큼 그것이 귀하다 보니까 가짜들도 많이 생깁니다. 그래서 40일 기도 들어간다면서 미숫가루도 가지고 가고, 또 가끔씩 기도원에서 내려와서 통닭도 먹는 그런 엉터리들도 있다고 들립니다. 왜냐하면 40일 금식 기도했다고 하는 영향력이 워낙 크다보니까, 그 영향력은 갖고 싶고 그렇게 하기는 어려우니 그런 엉터리들이 종종 생기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40일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온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도 40일이라는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처음부터 모세를 만나주신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은 산 아래서 모세를 40일 동안 기다려야 했습니다. 모세는 온전한 기다림으로 하나님을 뵈었는데 백성들은 온전히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40일입니다. 모세에게 40일은 하나님을 뵙는 복된 기간이 되었지만 백성들에게 있어서 40일은 신앙적으로 형편없이 추락하는 기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모세가 없다는 사실은 그들로 하여금 방종의 길로 빗나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모세는 누구입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이 의지하는 모세가 여러분 곁을 잠시 떠났을 때, 여러분들은 어떠한 신앙의 모습으로 살아가실 수 있습니까? 40일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뒤돌아볼 수 있게 하는 대단히 귀중한 시간입니다. 앞으로만 달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뒤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휴가는 그래서 분주한 삶을 좀 쉴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시간입니다. 이젠 우리 한국인들에게도 돈보다도 쉼이 훨씬 가치있는 일이라는 통계가 나와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크게 둘로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 또 하나는 자기 중심의 신앙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신앙이 하나님 중심이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한 사람일수록 더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소위 '메시아 신드롬'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은 다 옳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저는 그래서 새신자가 와도 처음 예수 믿는 사람이 오면 좀 안심이 됩니다. 물론 그가 당장 교회의 여러 부분에서 헌신할 수 없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지만 그러나 한 걸음 한 걸음을 바르게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저는 대단히 기뻐요.

그러나 오래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 오면 우선 마음에 긴장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나름대로의 굳어진 신앙의 뼈대가 바른 신앙의 뼈대라면 문제가 없지만 휘어버린 신앙의 뼈대라면 그것은 아주 힘이 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옳다라고 생각하는 '메시아 신드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 방법, 자기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그래서 선교회에서 속회에서 더 심하게는 목회자하고도 부딪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옳은 것인데 자기 중심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생각은 하나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오늘의 모습을 한번 보기를 원합니다. 모세와 함께 있는 동안은 언제나 그들은 하나님 중심이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 중심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도자 모세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애굽에서 보고 배웠던 것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고 축제를 벌이는 일이었습니다. 어렵게 모여서 회의할 것도 없었습니다. 삼삼오오 모여 모세가 내려오지 않는 것을 걱정하면서 각 지파의 족장들이나 대표들이 아론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아론에게 요구하기를 "일어나라. 이제는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 신을 만들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 신앙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신앙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불교나 힌두교 등 대부분의 종교들이 종교 철학적 입장에서 볼 때 하등 종교로 구별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필요에 의하여 인간을 위해서 신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신의 의지에 의하여 출발된 종교를 고등 종교라고 하는데 유일하게 기독교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고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였노라" 다시 말하면 우리의 예배 행위는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내가 너희를 지은 것은 너희로 하여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에서도 그런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신을 만들자" 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평가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저들이 자기들을 위해서 신을 만들었다" 하나님의 평가나 백성들의 요구나 똑같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러분들은 신앙의 발걸음이 혹 여러분을 위하여는 아닙니까? 물론 신앙의 결과가 우리에게 유익되는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앙의 유익된 축복의 약속을 하셨지만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구별해야 할 것은 그것은 신앙의 결과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을 위하여'이지 우리를 위하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출발이 다른 것이지요.

모세가 없다는 사실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방종하게 만들었습니다. "자, 너희들 손가락의 금가락지를 다 가져와라" 이상하게도 우상을 만들자고 하는데 왜 그렇게 협조들을 잘하는지 몰라요. 우상을 만들어놓고는 마치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듯이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화목제를 드리고 먹고 마시고 뛰놀았다고 그랬습니다. 예배의 대상은 금송아지인데 방법은 마치 하나님 앞에 하듯이 행동을 한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도 아침 일찍 일어나지요. 목욕까지 합니다. 한 겨울에 찬물로 머리까지 감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여러분들이 얼마나 정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오는가를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도전받으셔야 합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의 그 마음보다도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마음이 더 순결하고 더 준비된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아론에게 이제는 더 이상 모세만 기다릴 수 없다고, 이제는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만들자고 했을 때 아론은 "이왕 무너질 바에야 철저하게 무너지자" 그렇게 마음이라도 먹었는지 앞장서서 우상을 만드는 일에 힘을 다합니다. 마지못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앞장서서 나가고 있습니다. 처세는 철저하게 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아론과 같이 신앙적인 위기가 왔을 때, 그래도 믿음의 사람 모세를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의 생각을 따라가야 할 것인지 중요한 갈림길에서 어떻게 결정하시겠습니까? 아론처럼 약삭빠르고 철저하게 사람들의 기분과 분위기를 맞춰가면서 이왕 할 거 앞장서서 하시겠느냐 그 말입니다. 아론의 한계를 극복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을 편하게만 살고 눈치만 보면서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요즘 처세술의 가장 상징적인 말이 있지요.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어떤 교수가 텔레비젼 토크쇼를 진행하면서 했던 말입니다. 속은 어떻든지 피할 수 없다면 앞장서서 즐기라는 것입니다. 처세에서는 탁월한 교훈이 될지 모르겠지만, 아론을 보는 우리는 너무나도 마음속에 비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자존심, 그 믿음의 지조가 이렇게 여지없이 무너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요구는 무엇입니까? 자기 안에 있는 종교적인 욕구를 한번 마음껏 발산해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축제를 한번 벌여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춤추는 것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해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요즘 '예배의 갱신'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특히 미국쪽에서 그런 운동이 많이 일어납니다. '열린 예배'라는 말도 많이 사용합니다만 사실 그 말의 의미도 모르면서 쓰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예배를 갱신하자'하면서 갱신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막 갱신하면서 그것이 앞서가는 교회인양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날 예배를 갱신한다는 이들의 화두는 단연 이제는 예배를 듣는 예배에서 보는 예배로 바꾸자고 하는 것입니다. 성가대도 저 자리에 있으면 답답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앞자리에다가 앉히는 교회도 있고, 어느 교회는 강단 뒤에다 높이 앉히기도 합니다. 성도들이 좀 더 설교자를 크게 보게 하기 위해서 멀티비젼을 설치해서 그렇게 설교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긍정적인 부분들도 많이 있는 반면에 우리는 한가지 중요한 정신을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현대 과학을 예배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유인물을 가지고 경배와 찬양을 따라하는 것보다는 저 큰 스크린을 내려서 O.H.P로 큰 글씨를 보면서 찬양하면 훨씬 찬양의 분위기도 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긍정적인 부분으로 우리가 사용을 하면 좋지만 그것이 단지 우리의 시각을 즐겁게 하는 차원에서 시작이 되면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동기가 순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성장하는 교회를 방문해 보면 동기가 순수한 교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교회들도 참 많이 있습니다. 듣는 것보다 보는 것 위주로 교회가 가는 것은 우리가 목숨을 걸고 막아야 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향해서 끊임없이 수백번 수천번 강조하는 것은 "너희가 내 말을 듣고 지키면" 성경에서 이 말씀은 결코 빼앗길 수 없는 놓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신명기 6장 4절에 유명한 '쉐마'가 나옵니다. '쉐마'는 히브리어로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니,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승에 의하면 아침 저녁으로 그 말씀을 외워야만 했습니다.

지난 목요일부터 3일동안 중고등부, 대학부 수련회가 강화에서 있었는데 제가 금요일 저녁 시간에 가보니까 식사시간에 성경 요절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5번째 식사시간이 되어서 처음부터 5번째까지의 성경을 암송해야만 식당으로 들여보내 주었습니다. 입구에 전도사님이 서서 확인을 하는데 개인별로가 아니라 조별로 그것을 암송하게 하다 보니 어떤 조는 빨리 외워 밥을 다 먹고 나올 동안에도 어떤 조는 입구에 들어가지도 못했어요. 하지만 아주 좋은 훈련을 한 것 같았습니다. 집에서도 그러면 좋겠어요. 우리 부모들이 먼저 본을 보이면서 하루에 한 요절씩만 외우고 식사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강조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왜 예배가 죽습니까? 오늘날 예배가 왜 곳곳에서 죽어갑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이예요. 시각적으로 예배가 화려해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줄 믿습니다.(롬 10:17) 그러나 믿기를 원치않는 사람들이 자꾸 요구하는 것이 뭐예요? 말씀을 듣는 시간을 자꾸 줄이자는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없애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고 즐기고 먹고 춤추는 것으로 대신하자는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을 중심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그들이 먹고 마시며 춤추는 것은 그동안 자기들의 종교적인 본성을 한번 마음껏 통제받지 않고 표출해 보자고 하는 거예요. 신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들이 말한 그대로 자기를 위한 신앙이지 하나님을 위한 예배는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목적은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을 높이고 왕되신 그분을 우리가 섬기면서 그분과 함께 살겠다고 고백하고 다짐하는 것이 예배가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의 욕구를 분출해서 우리의 만족을 느끼겠다고 한다면 이미 그것은 예배가 아닌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예배가 죽은 이유를 바로 찾아야 합니다.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래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 교회가 정상적으로 간다면 이 말씀의 시간이 점점 길어져야 돼요. 본래 말씀의 시간이 길었습니다. 그것이 점점 짧아졌다가 요즘에 말씀의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교회가 있어요.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주일 말씀의 시간은 말씀만 한시간은 해야 합니다. 사실 20-25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고 깊이 있게 전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들이 이제는 간단하고 짧은 것을 좋아하다 보니 어떤 이는 설교와 치마는 짧을수록 좋다고 까지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바로 거울을 보듯이 우리들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일에 최선을 다했는가? 아니면 내 삶의 종교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여기에 나와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6장 4절의 쉐마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으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먹고 마시고 뛰놀고 있는 동안 26절에 보면 모세가 내려옵니다. 내려와서 보니까 기가막힙니다. 가운데는 황금빛 찬란한 금송아지가 있고 그리고 백성들은 술을 먹고 마시고 뛰놀고 정신이 없어요. 그때에 모세가 소리를 지릅니다. "너희들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은 내게로 나오라" 그때에 한 지파가 모세에게 나옵니다. 레위지파였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은 지파였습니다. 그 혼란한 가운데에도 신앙의 순결을 지킨 지파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어지럽고 순결을 지키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여러분이 살아가면서도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편에 선 사람들은 나오라고 할 때에 누가 나와야 되겠습니까? 레위지파가 나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구별된 레위지파인 우리가 나와야 되지 않겠느냐 그 말이예요.

모세가 명령합니다. "너희들은 전부 허리에 칼을 차라. 칼을 차고 저 술 먹고 금송아지 우상 앞에서 뛰노는 자들을 가차없이 죽여라" 무려 3000명이나 죽였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순결을 지키지 못하고 세상과 짝하고 재미있게 사는 동안 하나님은 신앙의 순결한 사람들을 택해서 심판을 선언할 날이 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언제 주님이 오실런지 아는 이가 없지만 믿음의 순결을 가지고 그 날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사람들이 승리할 때가 올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 모세가 내려오는 그 시간을 온전히 기다리지 못한 그들에게 우리 주님께서 참으로 안타까운 말씀을 하십니다. "이 백성이 너무나도 빨리 나를 떠나는구나" 신실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관이 너무나 천박함을 하나님께서 한탄하셨습니다. 어떻게 송아지가 그들을 인도할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9절에서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한탄하십니다. 교만한 백성, 고집이 센 백성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들 뜻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곧 자기 중심의 신앙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평가를 우리 마음속 깊이 새기면서 내게 40일이라고 하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그 혼란과 혼돈의 상황이 다가올 때, 순결한 백성들을 쓰시는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며 기다렸던 레위지파들 같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신앙의 사람으로 온전한 기다림을 소유한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때때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에서 자리를 비웠듯이, 40일이라고 하는 시간적 공간이 우리를 유혹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순결을 지키며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승리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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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32:1-10 온전한 기다림 출32:1-10 온전한 기다림 Reviewed by □□□ on December 13, 2025 Rating: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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