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은혜 중 하나는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가 얻는 일입니다.
종종 사극을 보면 왕이 밤중에 민간 복장을 하고 시찰을 다니는 경우가 있는데 후에 자기 가정을 방문했던 사람이 왕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가정은 당 대 뿐만 아니라 후손 대대로 영광된 경험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왕이 우리 가정에 왕림하셨다"
지방마다 좋은 특산품들을 소개하고 그것을 판매하는 일이 지방 자치 시대가 된 이후 더욱 치열한 판촉활동에 시장들도 앞장서고 있습니다 만은 그럴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김포 시장이 쌀을 광고할 때 반드시 "임금님에게 진상하던 쌀이다"라는 내용입니다.
요즘 CCM 찬양을 보면 "왕 되신 하나님을 경배하자"는 것이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정말 그분이 우리의 왕이시라면, 왕 되신 그분에게 우리가 나아가는 것과 우리가 그분을 만나는 것과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것으로 그분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실제로 우리 자신들이 느끼고 체험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왕 되신 하나님, 구약에서 하나님에 대한 가장 특징적인 표현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 표현도 부족해서 나중에는 "하나님은 왕 중의 왕입니다"라고 까지 표현합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모습들, 그 왕 되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가장 중요한 그들의 삶의 자리는 '성막'이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며 특별히 왕 되신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여러분은 성전에 오실 때 왕 되신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과 감격으로 교회에 발걸음을 옮기시는지 저는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왕 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가장 크고 복된 은혜를 누리고 사는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늦게나마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모세의 눈물의 기도 덕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사실 광야 백성을 포기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이 백성을 가지고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셨고 하나님은 모세를 보고 "나를 말리지 말라"고 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말리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진 또 다른 하나님의 애정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자녀들로 인해 어려움을 많이 받는 경험들을 특별히 청소년을 두신 가정들은 느끼실 것입니다. 너무 속상할 때는 아버지들이 몽둥이를 가지고 때립니다. 분노가 앞서기 때문이지요. 그럴 때 옆에서 어머니가 "그 녀석 좀 맞아도 싸요. 실컷 죽어라고 패줘요" 이렇게 말하는 어머니는 없을 것입니다. 똑같이 고통을 느끼고 속상함을 느꼈지만 아버지가 몽둥이로 아들을 때리려고 할 때 오히려 어머니가 몽둥이를 붙잡고 매달리면서 나를 봐서라도 한번 좀 참아달라고 애원할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어머니의 모습일 거예요. 요즘은 역할이 바뀐 가정도 있는 것 같아요. 어머니가 무섭고 아버지는 새벽에 나가고 밤늦게 들어오니까 그저 자식들에게 미안해서 용돈 달라면 다 주고 뭐 부탁하면 다 들어주고 그러지요. 어쨌든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분노하면 누군가는 분노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집안 꼴이 되는 거예요. 자식을 보고서가 아니라 아내의 호소를 듣고 아버지는 분노를 푸는 거예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은 안되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 그러나 모세의 눈물의 중보기도가 하나님의 심판 계획을 철회하도록 만든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백성들은 큰 은혜의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성막을 지으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귀하고 복된 일을 불순종하고 교만하고 금송아지나 만들어서 춤추고 먹고 마시던 그런 백성들에게 기회를 주신다고 하는 것은 분에 넘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고 전지하신 분이라면 굳이 그 속썩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한 성막을 지으라고 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한번 기회를 주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계획에 부름을 받은 우리가 부름 받은 대로 살지 않고 딴 길로 가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되어진 직분을 빼앗길 때가 있어요. 구약에서 대표적인 경우가 사울 왕입니다. 그는 왕으로 임명받을 당시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준수하고 겸손한 왕이 될 모든 덕목을 내외적으로 갖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왕이 된 이후에 달라지기 시작을 했어요. 많이 변했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을 어렵게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종의 일을 자기가 함부로 하는 그런 경솔함까지 행했을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를 버렸노라" 그를 버렸다고 하는 말은 그에게 주셨던 왕의 지위나 지혜와 명철과 부귀와 영화를 거두어 가신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느껴졌던 것들이 여러분의 삶의 자리를 떠나기 시작할 때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갖습니까? "내가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있구나. 하나님께서 왜 내게 주신 은혜들을 거두어가실까?"라는 정말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그런 마음은 들지 않으십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끊임없이 주시지만 그 기회를 선용하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면 결국 거두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한 사람을 들라면 받고 제자로 부름을 받았던 가롯인 유다를 들 수 있습니다. 사실 열두 제자 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 가롯인 유다였습니다. 가장 많이 배운 사람이고 사회적인, 정치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니다. 하지만 머리가 좋다고 해서 더 헌신적이지 않고 많이 배웠다고 해서 더 충성스럽지 않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가롯 유다를 통하여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하는 그 일을 통해서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을까? 하나님의 깊은 의도를 헤아려 보기를 원합니다. 전능한 하나님이라면 복잡하게 일하실 것이 아니라 풍성한 하늘의 것들을 가지고 성막을 지으셔도 될텐데, 더구나 하늘의 천군 천사를 동원해서 하루아침에 기초공사하고 하루아침에 토목공사 끝내고 하루아침에 인테리어 끝나면 될 것을 구차하게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실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모세를 통해서 성막을 지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중에 첫 번째 깨달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충성할 기회가 주어질 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9월이니까 넉달만 지나가면 난 올 해 일은 끝난다고 넉달이 빨리 가기를 기다리는 분들이 있다면 참 세월이 아까운 사람입니다. "주님, 내게 주신 이 충성의 기회가 벌써 다 지나가고 넉달 밖에 안남았는데 이 넉달을 선용해서 넉달이 4년보다도 더 보람있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그런 마음을 갖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백성의 가장 큰 기쁨은 자기 것으로 왕을 섬기는 것입니다. 자기가 만든 음식으로 왕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영광이겠어요.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을 여러분의 왕으로 인정한다면 그 왕께 헌신하고, 그 왕을 섬기고, 그 왕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입으로는 하나님을 왕이라고 하면서 실제로 하나님을 대우하는 것을 보면 자기 친구만도 못하게 대우하는 그런 여러분들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입으로가 아닌 생활에서 하나님을 왕 되게 하라고 말씀하고 싶어요.
부모님들이 자식을 키우는 기쁨 중의 하나는 자식이 다 자라고 나서 직장생활하고 돈을 벌어서 음식을 대접하고 선물을 하고 그럴 때 기쁨이 크지요. 자식이 커서 부모가 잘 섬긴다고 하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섬기는 것을 잘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어떤 집은 말로 잘 가르치는 집도 있고 어떤 집은 생활로 가르치는 집이 있어요. 예를 들면 부모님이 할아버지 할머니를 잘 섬기는 것을 자식이 보면 자신이 부모가 되었을 때 자식들이 부모를 잘 섬길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를 박대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으면 자기 자식도 자신에게 그렇게 할 것입니다.
아주 간단하지만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우스개 얘기가 하나 있지요. 홍시를 좋아하는 어머니가 늘 홍시를 시장에서 삽니다. 살 때는 아이들 생각도 하지만 사실은 자기도 먹고 싶어서 산 거예요. 그렇지만 막상 아이들 앞에 풀어놓을 때에는 아이들이 너무나도 그것을 맛있게 먹으면서 "엄마, 이거 어디서 났어. 왜 이렇게 맛있지?" 그리고 먹어대니까 차마 어머니 것을 먹을 수 없어요. "그렇게 맛있니? 이거 하나 더 먹어라" "이거 엄마 거 아니예요?" "엄마는 이거 별로 안좋아해" 그리고 아이들에게 떼어줍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미안해 하면서 반쪽을 나누어 먹든가 그렇게 시작을 하다가 점점 그런 일이 반복되면 나중에는 아이들이 홍시를 사다 먹으면서도 "어머니, 잡숴보실래요?"라고 묻지도 않게 됩니다. 그때는 어머니가 정말 먹고 싶어서 물어만 본다면 "그래. 나도 좀 다오"라고 대답할 준비를 하고 있지만 아이들은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벌써 오랫동안 그렇게 해 왔기 때문이지요. 자식이 나쁘다기 보다는 부모의 양육방법이 잘못된 것입니다. 섬기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결국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담임목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역 중의 하나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를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잘 가르치는 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섬기는 대상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믿어야 할 대상이요, 성령은 받아 체험 신앙을 가지고 주신 능력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섬겨야 하는데 그 섬기는 방법들을 잘 모르는 성도들에게 목사가 가르쳐야지요. 쓰던 것을 가지고 오면 "쓰던 것을 드리면 안됩니다" 상한 것을 가지고 오면 "상한 것을 드리면 안됩니다" 그 당시는 좀 기분이 나쁘더라도 바로 가르쳐야지요.
하나님께서 성막을 그들에게 지으라고 하신 두 번째 이유는 우리에게 주신 재물을 값어치있게 쓰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물질을 주셨을 때 그것을 정상적으로 바로 쓰도록 주님은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재물이 있어도 함부로 써서는 안됩니다. 혹 어떤 분들은 "십일조만 드리면 나머지는 내가 마음대로 쓰는 거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것도 잘못된 것이지요. 10의 9도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써야 됩니다. 내가 쓰지만 소용되는 목적들은 부끄럽지 않아야 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10의 1은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드리고 10의 9는 죄짓는 데 쓴다고 하면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광야에 살면서도 그들은 은과 금과 각종 가죽이나 보석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그것이 다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인들이 그들에게 준 선물입니다. 애굽 사람들이 무엇이 부족해서 노예로 부리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 귀한 금은 보화를 주겠어요. 그런데 모세가 나타나 바로 왕과 대결하면서 10가지 재앙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때 처음에는 우리도 할 수 있다고 대결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 앞에 두 손을 들고 바로 왕까지도 "이제는 가라"면서 그냥 보내지 않았고 각종 귀한 보화들을 챙겨주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430년 동안 노예살이 한 일종의 퇴직금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광야에서는 쓸 일이 없어요. 광야에서는 먹을 것과 마실 것만 있으면 됐지 금은 보화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고민합니다. 도대체 광야에서 이것을 어떻게 쓸까? 그렇게 고민하다가 생각해 낸 것이 큰 금송아지를 순금으로 만드는 것이었지요. 광장 위에 큰 금송아지를 만들려면 금이 얼마나 필요하겠어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든다고 금을 가져오라고 하니까 손가락에 있는 것까지 다 빼서 순식간에 가지고 왔는데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분해 하셨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귀한 것들을 저렇게 잘못 쓰다니... "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성소를 지으라고 말씀하신 깊은 의도는 그들의 자연스러운 헌신을 기뻐하셨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너희들이 가진 것으로 지으라"는 말씀입니다. 내 시간 귀합니다. 내 물질 귀합니다. 내 재능 귀합니다. 밖에 나가서 내 재능 한 시간만 써도 몇 십만원, 몇 백만원 받을 수 있는 재능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기쁘게 사용하라는 것이지요. 주님은 그것을 원합니다. 내가 가진 시간으로, 내가 가진 재능으로, 내가 가진 것으로 하나님 앞에 사용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용에는 3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세 가지 기준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몇 번씩 반복해 나오는 말씀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시간과 재물과 재능을 드리려면 "먼저 마음에 감동된 자"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꽃꽂이 봉사하는 분들에게도 부탁하는 말이 "이왕 주님 앞에 헌신하려면 자투리 시간을 쓰지말라" 자기 볼 일 다보고 하나님의 일을 자투리 시간에 하지 말라는 거예요. 시간을 성별하고 해야지 이것 저것 다하다가 자투리 시간을 내가지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받지를 않아요. 사람들은 결과만 보고서 잘했다고 할 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줄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이 나면 교사를 한다고 그럽니다. 그러다가 가을이 되면 목사님, 빼 달라고 그럽니다. 헌신이 고무줄 늘어났다 줄었다 하듯이 해선 곤란해요. 하나님께서는 결국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거예요. 정말 왕 되신 하나님을 섬기려는 마음이 있는가? 아니면 형식적이고 습관적인가? 우리의 중심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 앞에 시간으로 헌신하든지, 물질로 헌신하든지, 재능으로 헌신하든지, 어떤 경우든지 그것은 귀한 것이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음의 감동이 된 상태에서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기준은 자원하는 것입니다. 올림픽을 하면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하지요? 사실 그 자원봉사자의 수고는 눈물겨운 것입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지만 자원봉사자는 기꺼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봉급을 받고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헌신적으로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봉급에 자신의 의지가 얽메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기준은 무엇입니까? 마음이 슬기로운 자입니다. 마음이 슬기롭다고 하는 것은 IQ가 높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지혜, 그것은 학력이 문제가 아니고 그것은 젊음과 나이듦의 문제가 아닙니다. 슬기롭다고 하는 것은 순종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주님이 오시니까 등불 기름을 준비하고 기다려라" 그러면 그냥 바보같이 기름 넉넉히 준비해서 밤새도록 기다리는 거예요. 그것이 슬기로운 사람이예요. 그러나 "나는 주유소가 가까우니까 아무때든지 기름 준비할 수 있어. 나는 달리기가 빠르니까 주님이 저기쯤 오시면 그 사이에 가서도 기름 채울 수 있어"라며 혼자 똑똑하게 생각한 사람들은 다 주님 오실 때 문이 닫혀져서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세속적으로 똑똑한 사람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여러분, 똑똑하다고 신앙생활 잘하는 것 아닙니다. 머리 좋다고 돈 많이 버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허락해 주셔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마음이 감동된 자, 자원하는 자, 그리고 마음이 슬기로운 자들을 선택하셔서 당신이 백성들과 만날 성소를 짓게 하셨습니다.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들이 그와 같은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의 인간의 지혜로움을 자랑하고 살았던 어리석은 시간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없이도 건강도 자신있고 물질도 자신있다고 생각했던 지난 시간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아버지 하나님, 왕 되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노라고 고백하는 저희들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우리에게 재능을 주셔서 기쁨으로 주님을 만날 귀하고 복된 장소를 이루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 기쁨 이 감격을 가지고 언제나 변함없이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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