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7:19절에 보면 요셉을 향하여 꿈 쟁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기에 꿈 쟁이가 오는도다" 별명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어린 시절부터 꿈을 꾸었고 또 그 꿈대로 살았고 그리고 마지막에 그 꿈대로 이루어지는 사람입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있는데 세 가지를 가진 사람이고 그랬습니다. 첫째는 꿈을 가진 사람, 두 번째로는 무소유의 사람, 마음을 비우고 사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로 죽음을 각오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아마 요셉이 이런 사람이지 않는가? 하는 이런 생각을 갖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꿈을 가지고 사는데 중요한 것은 그 꿈을 이루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꿈에 있지를 않고 그 꿈을 이루어 가는 사람의 마음과 삶의 태도에 따라서 꿈을 이룰 수도 있고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하버드 대학과 애일 대학에 한번은 하버드 대학에서 이런 조사를 했답니다. 30년 동안 기업을 통해서 성공한 사람들을 놓고 조사를 했습니다. 학생들을 통해서 조사, 분석 연구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통계가 나왔습니다. 첫째로는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자기보다는 이타주의로 사는 사람들이었고, 자기 절제, 사랑, 이해심, 성실, 정직, 열정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성공했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상대적으로 애일 대학에서는 1953년에 졸업한 학생들에게 이런 숙제를 냈습니다. 너희들이 학교를 마치고 세상에 나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 너희들의 비전이 무엇인지를 리포트로 써 내놓으라고 그랬습니다. 이것은 학점과 관계없는 숙제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숙제를 대부분이 내지를 않았습니다. 그래도 착하게 리포트를 낸 학생은 5%도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을 받아놓고 22년이 지난 다음에 1975년도에 그 당시에 학생들이 리포트를 써 내놓았던 내용과 그리고 졸업했던 모든 학생들을 조사를 했습니다. 어느 만큼 세상에서 영향력을 주고 사는지를 분석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것은 자기의 비전을 분명히 제시하고 나갔던, 그리고 그 비전을 성실히 살았던 3%의 사람이 써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던 3%의 사람이 이루어놓은 업적이 막연하게 사는 95%의 사람들이 다 합쳐놓아도 따를 수 없는 정도로 큰 업적을 이루어놓았다는 그런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무엇을 증명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어떤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바른 자세를 가지고 바르게 인생을 사는 것이 나의 꿈을 이룰 수도 있고, 이룰 수도 없다고 하는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특별히 하나님이 주시는 꿈, 하나님이 주시는 그 믿음을 어떻게 이룰 수 있겠습니까? 이것도 마찬가지로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기본 자세가 중요합니다. 특별히 믿음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어떻게 순종해 나가느냐, 하는 바른 믿음의 자세가 하나님의 꿈을 성취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꿈을 묻어둘 수도 있다는 그런 교훈을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듣게 됩니다.
꿈 쟁이 요셉은 어떻게 그 꿈을 이루었습니까? 요셉이 어떤 사람인지를 우리는 인간적인 차원에서 오늘 말씀을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요셉이 꾸었던 꿈의 내용을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37장에 보면 요셉이 꾸었던 꿈의 내용이 상세하게 설명이 되어있습니다. 17세에 두 가지의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는 밭에서 곡식 단을 다 베어서 단으로 묶어놓았는데 열 두 명의 형제가 있는데 각기 하나씩 다 묶어놓았는데 요셉의 그 곡식 단이 가운데 서고 나머지 열 한 개가 자기를 둘러서더니 자기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절을 하더라는 겁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꿈은 하늘의 해 달 열 두별이 있는데 그때는 해 달까지도 자기가 있는 중심으로 둘러서더니 자기에게 절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을 말합니까? 꿈은 둘이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주신 환상은 하나입니다. 앞으로 요셉의 열 한 형제가 그리고 부모님까지도 요셉에게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앞으로 미래의 환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은 한 가정에 주는 꿈만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성경에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 같은 사람 속에서 어떻게 이삭이 나오고, 이삭같이 마음이 고운 아버지의 품속에서 어떻게 에서 같고 야곱 같은 두 아들이 나왔는지, 그리고 야곱 같은 간교한 그 아버지의 품속에서 요셉 같은 구약에서 가장 예수를 닮은 그렇게 훌륭한 아들을 낳았는지, 이해가 안돼요. 우리가 한 가지 깨달은 것은 아 이게 하나님의 은혜인가보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가문이 아무리 잘못 되었을지라도 일단 하나님의 은혜가 어느 한 가족에게 임하면 그 가족의 흘러 내려오는 저주를 끊고 그 아들 때문에 온 가문이 축복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복음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제시해주면 야곱의 열 두 아들이 있는데 장남인 르우벤은 자기 아버지의 계모를 범했어요. 그런 패륜아 못난 자식입니다. 그 다음에 네 번째 아들 유다는 자기 며느리를 범했습니다. 먼 동네를 가다가 창녀인 줄을 알고 하룻밤을 잤는데 나중에 보니까 며느리였습니다. 윤리 도덕성이 결여된 유다입니다. 레위와 시몬은 자기 누이 디나가 세겜족에 의해서 강간을 당했는데 세겜족들에게 할례를 행하도록 하면 우리 동생을 주겠다고 하고 할례를 행하니까 남자들은 다 죽인 사람들입니다. 잔인하기 짝이 없는 형제들입니다. 물론 요셉과 다른 열 한 형제는 배다른 어머니가 달라요. 아무리 요셉이가 눈에 가시 같고 좀 마음에 안 맞더라도 동생을 팔아먹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게 성경에 나오는 요셉의 형제요, 가정의 이야깁니다. 아주 역기능 중에 역기능적인 가정입니다. 이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아주 못된 가정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십시오. 요셉을 죽이고 했던 열 한 형제를 무엇으로 표현하고 있습니까?
가시나무로 표현하지 않고 있다는 것, 원수로 표현하지 않고 있다는 것, 사람에게는 가장 소중한 곡식 단, 그것도 설익은 곡식 단이고 추수해서 곡간에 들어가기 직전에 누렇게 완벽하게 익은 곡식 단으로, 생명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열 한 단이 야곱에게 원수로 싸운 것이 아니고,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을 가운데 놓고 원수 같은 열 한 형제가 고개를 숙이고 절한다는 이야깁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이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신 그 언약이 장차 이스라엘 나라의 열 두 지파의 족장들 대표적인 사람들이 아무리 못난 짓을 했을지라도 하나님이 한번 그들에게 축복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그들을 가시로 보여주지 않고 원수로 보여준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살아갈 생명을 공유한 곡식 단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거는 앞으로 장차 이루어질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를 환상으로 보여주니까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것입니다. 이거는 한 가정의 성경의 스토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된 한 나라의 백성의 스토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늘의 별로 보여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여기 나오는 열 두 형제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로 보여줄 스타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태양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부모님은 하늘의 해와 달로 보여주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어떻게 요셉를 죽이려고 했던 그 열 한 형제를 스타로 별로 보여줄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아무리 부족하고 못났을지라도 하나님의 선택에 들어와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가시나무로 보지를 않고 완전히 누렇게 익은 생명을 소유한 씨알로 보십니다. 이 땅을 가득 채울 생명의 씨로 본 거라고 그랬습니다. 우리의 본질, 우리의 정체는 생명을 간직한 씨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하늘의 스타입니다. 이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별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런 환상을 보여 주셨어요.
그런데 다른 열 한 형제들은 어머니 첩을 범하고, 며느리를 범하고, 거룩한 종교의식을 보복하는데 악용하고, 동생을 팔아먹고, 하나님이 주신 그 생명의 씨알, 하늘의 스타, 이 환상의 비전을 전혀 생각지도 않고 그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인간의 본능적으로 타락한 본성대로 살았습니다. 아주 못나게 삽니다. 성경에 보면 37장 이후에 이 형제가 못된 짓을 다해요. 타락한 인간은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부터 시작합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타락의 시작이에요.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하면 반드시 결과는 정욕으로 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계모를 범하고, 며느리로 범하는, 패륜아로 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게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꿈을 마음에 간직하고 나는 생명의 씨알이야, 나는 하늘의 스타야, 별이야, 그 꿈을 품고 일생을 살았기 때문에 요셉이 된 줄로 믿습니다. 꿈을 이룬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느냐? 어떤 꿈을 꾸느냐? 무엇을 보고 사느냐?가 우리 인간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이게 성경이 저희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신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이게 우리들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내가 꾸었든지, 다른 분이 꾸었든지, 내 가족 중에 다른 사람이 꾸었든지, 일단 주신 꿈은 개인에게만 주신 꿈이 아니에요. 가족의 공동체,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다 주는 꿈이에요. 그 꿈을 마음에 품고 그 꿈을 성취하기 위해서 열심히 인생을 살아보십시오. 반드시 그 꿈대로 될 것입니다.
잠언서에 말씀하시기를 "꿈이 있는 백성은 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냐? 그 꿈대로 살기 때문에 타락할 겨를이 없고 죄 지을 시간이 없어요. 술집에 가서 술이나 마시고, 도박이나 하고,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지 않아요. 꿈이 있고 인생의 목표가 있어요. 하나님의 부름이 있어요. 이 믿음에 사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하고 승리할 것을 믿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주는 언약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은 그렇게 살아야 돼요. 계모나 범하고, 며느리나 범하고, 형제나 미워하고, 은 이십에 동생을 팔아먹고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들은 꿈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살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한 꿈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 꿈을 버리지 마십시오.
먼저 말씀을 드립니다만 멍청한 사람은 꿈을 깨라고 합니다. 꿈대로 된 게 뭐가 있느냐고?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꿈을 꾸라고, 꿈이 없으면 돈을 주고도 사라고 합니다. 남의 꿈을 사 가지고 자식까지 난 사람이 있어요. 대가를 지불하고도 꿈을 가지십시오. 왜냐하면, 꿈이 내 인생을 만들어가기 때문이에요. 꿈을 포기하면 망하게 되어있어요. 꿈을 포기하면 그때부터 타락하기 시작한 거예요. 왜 자살해죽습니까? 왜 방탕합니까? 왜 문제아가 됩니까? 다 꿈을 포기한 아이들이 문제아가 됩니다. 꿈을 포기한 가장이 허랑 방탕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꿈을 주시는 영인 것을 믿습니다.
그러면 요셉을 그 꿈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습니까?
첫째로 요셉은 한 평생을 정직과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꿈을 성취하기 위해서 목표가 분명했어요. 어떤 분은 말하기를 창세기 37장 2절에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그래서 역시 요셉도 별 볼일 없었다. 어렸을 적에 고자질을 하는 기질이었다고 합니다. 요셉이 고자질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냐? 못난 성품의 소유자냐? 저는 그렇게 보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정직했기 때문에, 거짓말 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형들의 일을 아버지에게 그대로 이야기를 했어요.
여러분, 보세요. 정직한 사람이 정직한 기도를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한답시고 얼마나 거짓말을 많이 한지를 몰라요. 내 양심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정욕으로 구하려고 하는 것은 거짓되게 구하는 것입니다. 정직한 사람이라야 정직하게 기도할 수 있고, 정직한 사람이라야 정직하게 예배할 수 있습니다. 정직한 사람이 인간관계를 정직하게 대할 수가 있습니다. 일을 맡더라도 그 일을 정직하게 합니다. 꾀를 부리지 않고 모사를 쓰지 않습니다. 바보같이 정직해요.
요셉이 꿈을 꾸었습니다. 형들에게 이야기를 했어요. 이 이야기를 하면 그렇지 않더라도 열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한 줄을 아는데 그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이가 얼마나 지혜로웠으면 애굽나라의 총리가 되었겠습니까? 가정까지 구원했고 한 민족을 살렸겠습니까? 대단한 사람입니다. 인생을 깨뜨려보고, 사람의 심령을 깨뜨려보고, 하나님 마음까지 읽은 사람이 요셉입니다. 그럼에도 불구고 내가 이 이야기를 하면 어떤 불이익이 올 것이라는 것을 요셉은 알지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너무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꿈을 주었는지, 가슴에 묻어두라고 이 꿈을 준 것이 아니라, 내가 이 꿈을 이야기함으로 어떤 핍박을 받고, 어떤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이 나에게 이 꿈을 주신 것은 우리 가족과 형제들에게 이야기를 하라고 주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다 설명한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정직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요셉이는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에요. 애굽의 총리가 되었지만 그는 정치적인 모사꾼이 아닙니다. 정치는 계산을 하고 내가 이렇게 처세를 하고 이렇게 말하면 어떤 이익이 오고 불이익이 오고 다 재보고 이야기를 하고 행동을 해요.
예수님은 정치꾼이 아니었습니다. 하늘로부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메시야였습니다. 주님은 정직한 것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적당하게 살았더라면, 바리새인과 제사장과 적당히 타협했더라면,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같이 누리면서 호강을 하면서, 대접받으면서 살 수 있지를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살지를 않았어요.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렇다. 너무 정직했기 때문에 불의한 사람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모함을 받고 십자가에 죽게 된 것입니다. 요셉도 형들과 적당하게 타협하고 꿈 이야기를 않고 묻어두고 눈치를 보아가면서 형들에게 마음에 없지만 잘 따라다니고 그랬으면 귀여움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좋은 아내를 만나고 자식을 낳고 그렇게 살았겠지요. 편안하게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셉이 꿈 이야기를 하지 아니하고 묻어두었더라면 정직하게 말하지를 않았더라면 요셉이는 오늘 성경에 나오는 주인공이 못되는 거예요. 평범한 농부로 끝났을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멋있는 꿈 이야기가 어떻게 꿈이 성취되었는지, 이런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평범하게 사는 것도 좋고 편안하게 사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비전을 받은 자인 것을 믿습니다. 비전 앞에 정직하십시오. 꿈 이야기를 말할 때 는 말하십시오. 마음에 묻어두지 마십시오.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았으면 말씀하십시오.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말씀하시고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십시오. 이게 정직한 것입니다. 정직한 사람이 성공합니다. 정직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꿈을 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요셉은 무서우리만큼 절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제력을 가지고 있어요. 잠언서에 말씀하시기를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더 낫고" 성공한 사람의 특징은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마지막까지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은 자기 감정관리, 마음관리, 이성관리를 철저하게 했던 사람입니다. 제일 어려운 게 사람의 마음관리가 참 어려워요. 정서적인 감정관리가 참 어렵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은 사울 왕입니다. 그도 똑같이 하나님께 존귀하게 들림을 받았어요. 그런데 사울은 감정처리를 잘 못했습니다. 그래서 미쳐버렸고 귀신들렸습니다. 감정을 다스리지를 못하고 심지어는 자기 사위까지 죽이려고 했습니다. 감정이 불안정하면 사람을 믿지를 못합니다. 모든 사람을 의심하고 자기의 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살아간다고 사람이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못하지요.
요셉은 얼마나 자기 감정을 철저하게 관리했는지요. 43:31절에 보면 "그 정을 억제하고" 요셉은 22년만에 형제를 만났습니다. 그렇게 꿈에도 보고싶었던 베냐민을 만납니다. 요셉이가 열 형제를 보고 베냐민을 보면서 머리 속에 번개처럼 떠오르는 게 열 여섯 살 먹었을 때 꿈이 이제야 비로소 그 꿈이 이루어졌어요. 사람은 마음이 기쁠 때 감정처리를 하기가 참 어려워요. 영광스러울 때, 너무너무 귀한 일을 보았을 때, 그것을 마음에 묻어두기가 정말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하나님이 내 꿈을 이루어주었어 하는 생각이 들면서 성경은 말합니다. 요셉은 그 정을 억제하고 자기 절제를 해요. 의도적으로 형제가 아닌척하고 모른척합니다. 아버지를 모시고 올 때까지 자기의 감정을 감춥니다. 그 자기절제력이 하루아침에 된 게 아니에요. 요셉이 20년 동안 그 고난의 생활을 하면서 함정에 들어가고, 노예로 팔리고, 감옥살이를 하고, 이 모든 역경을 통해서 인생을 승리하기 위해서는 얼마큼 자기를 콘트롤을 해야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훈련을 받았어요. 이 훈련을 되지 않으면 우리는 사역자가 될 수 없습니다. 훌륭한 인간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건강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무서운 면만 있는 게 아닙니다. 대개 이렇게 고생을 많이 하고 살면 사랑하지 말자. 느끼지 말자. 왜냐하면 느껴보았자 별 볼일이 없으니까, 그러고 자기를 다독거립니다. 그런 사람은 무서워요. 기쁜 일을 보나, 슬픈 일을 보나, 눈물 한 방울도 없어요. 냉혈동물이라고 하는 감정이 전혀 없는 사람, 요셉이 그런 사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45:2 "요셉이 방성 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요셉은 마음이 복받쳐올 때는 무서울 만큼 자기 마음을 자제합니다. 그러나 울어도 된다고 생각할 때는 방성 대곡을 합니다. 어떻게 크게 울었든지 왕궁까지 들렸다고 합니다. 20년 동안 참았던 눈물을 형제들 앞에서 다 쏟아내었습니다. 요셉은 냉혈동물처럼 자기 감정을 조절할 줄도 아는 사람이고 울 때는 두 다리를 뻗고 대성통곡하고 울 줄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게 건강한 정서를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 울고싶을 때는 우십시오. 웃고 싶을 때 웃으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어야 건강한 정서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노래를 부를 줄 모르고 왜곡해도 같이 눈물을 흘릴 수 없는 그것은 병든 감정이에요. 그것은 좋지가 않아요. 요셉이 얼마나 자기 감정을 다스리는 사람인지를 압니다.
하나를 더 예를 드리면 애굽과 팔레스탄은 멀리 잡고 일주일이면 오고가요. 요셉이 총리가 되었으면 빨리 자기 고향에 이 소식을 보낼 수가 있었겠습니까? 없었겠습니까? 얼마든지 있어요. 휴가를 내어서도 갔다올 수도 있는 거리예요. 그런데도 안 갔어요. 정말 놀랍습니다. 아버지를 모시고 올 때 요셉이가 갈 수가 있지만 가지를 않았습니다. 우리 같으면 과시하려고 마차를 타고 형제를 거느리고 멋있게 갔을 것이에요. 자기의 모든 능력을 100% 할애하면서 과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아버지가 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가지를 않았어요. 애굽의 총리라는 이 명칭을 이 권세를 자기 사적으로는 한치도 쓰지를 않고 자기를 절제해요. 그러니까 왕이 믿고 권력을 맡긴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 크리스천에게는 이런 절제력이 있어야 되어요. 공과 사를 구별할 줄을 알아야 되어요. 조그만 실력을 가지고 과시하려고 그러고, 실력을 행사하려고 그러고, 이거는 못난 사람들이 하는 거예요. 정말 성숙한 사람은 자기를 절제하고, 왜냐하면 자기 감정에 타이밍을 맞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타이밍에 맞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요. 이게 믿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큰 꿈을 이루게 됩니다.
세 번째로 요셉은 원수를 사랑할 만큼 넓은 가슴을 가졌습니다.
성경에 4절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판 자라" 요셉이 형들을 만났을 때 가까이 오소서. 요셉은 이런 점에서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세상의 보통 사람은 원수를 갚기 위해서 칼을 갈지요. 어디 보자 네가 나를 그때 그렇게 했지. 너도 그럴 날이 올 것이야. 그러고 마음에 은근히 칼을 가는 것입니다. 요셉은 20년 동안 칼을 갈지를 않았어요. 무엇을 갈았느냐 하면, 언젠가는 내 꿈이 이루어지고 형제를 만나고 부모를 만날 거야. 그때는 내 입에서 한시라도 가시 돋친 말을 하지 말아야지. 사랑하는 말을 해야되지. 원수라도 사랑해야지. 하고 자기 마음에 원수라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요? 이것도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원수를 용서하는 것은 가슴이 넓어서 하는 게 아닙니다. 마음이 넓어서가 아닙니다. 그거는 누구도 못하는 것입니다. 깨달은 만큼 용서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깨달았느냐 만큼 남을 용서하고, 수용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송곳만큼 깨달으니까 모든 것을 송곳으로 찌르기만 하지, 크게 깨달은 자가 우주를 품고 열방을 품고 나아갈 수 있음을 믿습니다. 원수라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로 9-10절에 아버지, 아버지.... 호칭이 쏟아져 나오지요. 2절에 6번이나 나와요. 요셉이 20년을 살면서 한 순간이라도 아버지를 잊어본 적이 있었겠습니까? 못 잊지요. 나 때문에 아버지가 얼마나 고생을 하셨을까? 누구보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 줄을 알지요. 별나게 요셉이를 사랑했어요. 그러니 내가 하루아침에 없어졌을 때 우리 아버지는 20년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을 거야. 그 생각을 하면 요셉인들 잠을 제대로 잤겠어요? 그 동안 속으로만 불렀던 아버지를 형제들 앞에서 아버지를 봇물처럼 쏟아지는 말을 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의 부모도 사랑하시되 영의 아버지도 사랑하십시다. 나 하나를 위해서 둘도 없는 독생자를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신 가시 같은 나를 알곡으로 보시고 어둠의 자식처럼 행한 나를 하늘의 스타로 보신 그 좋은 아버지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버지 하나님, 육신의 아버지, 육신의 부모, 육신의 형제, 영의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고 그분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하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5절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자기 안에 이루어진 모든 사건을 믿음의 눈으로 보아요.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을 냉철하게 보아야 됩니다. 분석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냉철하게 모든 것을 분석하되 그 위에 믿음의 눈을 가지고 보십시오. 믿음으로 해석하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신 꿈이 이룰 수가 있습니다. 형들이 나를 파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나를 보내주셨어요. 내 가족의 생명을 구원하라고, 민족을 구원하라고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습니다. 형들은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데 도구로 쓰임을 받았을 뿐입니다. 고맙습니다. 형들이 나를 팔지를 않았더라면 나를 미워하지를 않았더라면 내가 어찌 애굽 땅에 올 수 있었으며 꿈을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우리 안에 이런 안목이 있을 지어다. 크고 작은 내 인생에 일어난 모든 사건을 신앙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꿈을 꾸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왜 꿈이 소중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언약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왜 내 헌신이 귀중합니까? 세상의 일에 우리보다 더 헌신하는 분이 많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에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내 생각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요셉처럼 모든 사건을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대로 자기를 내맡기고 따라가요. 감옥으로 가면 감옥으로 가고 구렁텅이로 가면 빠져요. 힘이 없어서 들어간 게 아니에요. 주어진 현실에 자기를 100% 다 내맡기고 적용합니다.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느냐, 그래서 로마서 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리라"
우리는 결론으로 생각하면 보는 것만큼 살수가 있습니다. 무엇을 보십니까? 생명의 씨알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보여주신 비전인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생명을 쥐는 자요 이 생명을 이 땅에 번식할 자라는 것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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