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절에 예수님께서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보고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실 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을 하시며 그의 믿음을 보시고 병을 고쳐 주실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본문에서는 이러한 말씀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것은 누구의 믿음을 보시고 행하신 이적이 아닙니다. 아버지인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을 보시고 살리신 것도 아닙니다. 죽어 가는 딸의 믿음을 보신 것도 아닙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것은 그의 아버지 야이로의 불완전한 믿음을 완전한 믿음으로 성장시켜 주시려는 의도에서 행하신 이적입니다. 딸이 죽어가는 것을 예수님께 살려달라고 한 야이로의 믿음은 어쩌면 당시 회당장으로서 대단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이로의 믿음은 어느 한계에서 멈추고 맙니다. 야이로의 불완전한 믿음을 구원받을 수 있는 완전한 믿음으로 성장시켜 주시려고 행하신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고쳤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불완전한 믿음을 완전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이적을 행하시기도 하십니다. 야이로의 딸이 살아나게 된 것도 딸의 믿음으로 살리신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의 믿음으로 딸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믿음도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의 한계에서 넘어서지 못하는 불완전한 믿음이었습니다.
야이로는 회당장입니다. 지역마다 회당이 있습니다. 회당은 율법을 토론하고 배우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끔 회당에 들어가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기도 하셨습니다. 회당장은 유대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율법에 속한 사람이요 지성인입니다. 이러한 회당장은 나사렛의 한 젊은 청년 예수를 찾고 무릎을 꿇을 사람이 아닙니다. 콧대가 높은 사람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를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했습니다. 회당장이 사람들로부터 비난 받는 한 젊은 사람에게 흥미를 가질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와 무릎을 꿇고 자기 집에 와 달라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회당장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하나 밖에 없는 딸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불행이 예수를 찾게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인간적인 불행이 예수를 찾게 만듭니다. 불행한 일로 인해 더욱 간절하게 되고, 진실하게 되고, 겸손하게 되고, 온유하게 됩니다. 불행으로 인해 그리스도께로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성도들도 어려운 지경이 되면 같은 기도도 더욱 간절하게 합니다. 기도하다가 조금 풀리면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를 찾게 된 것은 사랑하는 딸이 병들어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고칠 수 있는 병 이었다면 예수님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그 방법으로 고쳐 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방법을 다 해 봐도 아이는 점점 더 체온이 떨어지고 숨이 넘어 가는 것입니다. 하다하다 안되니 마지막으로 예수님께로 가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딸이 병들어 죽어가기 때문에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야이로는 자신의 문제로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딸의 문제로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자녀의 문제로 교회를 찾아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문제로 기도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녀들의 문제를 안고 기도하는 부모가 많습니다. 자녀는 자기의 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가문의 미래입니다. 어린 아이가 아파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면 부모는 자신이 아픈 것보다 더 마음의 아픈 고통을 느낍니다. 죽어가는 자식을 살릴 수만 있다면 부모로서는 못할것이 없습니다. 대신 죽어서라도 살리고 싶은 마음이 부모입니다.
하나 밖에 없는 딸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가만있을 부모가 없을 것입니다. 열두 살이면 다 키운 딸입니다. 스스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나이입니다. 성인으로 대접을 받아야 할 나이입니다. 다 키웠다 싶었더니 죽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절박한 현실을 당한 회당장은 예수님을 찾았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야이로가 예수님 앞에서 회당장이라는 권위를 내 세우며 예수님께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엎드렸습니다. 이것은 회당장으로서는 파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회당장은 주변에 보고 있는 무리를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찾고 발아래 엎드린 것은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이로에게 병들어 죽어가는 딸을 살릴 수 있는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딸을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예수님 발아래 엎드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은 내 딸을 고치고 살릴 수 있는 분이심을 확신할 수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야이로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대단했습니다.
예수님은 기다리던 무리를 두고 곧 바로 회당장을 따라 그의 집으로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시는 무리 가운데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한 여인이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므로 고침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가시던 길을 멈추고 고침을 받은 여인과 대화를 하시고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이렇게 혈루증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여인에게 축복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당신의 딸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딸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중에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회당장 야이로는 난처했습니다.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집에서 온 사람이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라고 말합니다. 딸이 죽었으니 가 봐야 헛일이니까 더 이상 예수님을 모시고 가지 말라는 말을 합니다.
인간들의 생각을 이렇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입니다. 의사들이 이런저런 약을 쓰고 시술을 하면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려고 하다가도 맥박이 멈추면 더 이상 시술하던 손을 멈추고 시트로 덮어버리고 맙니다. 모든 것은 살아 있을 때의 이야기지 숨이 끊어지면 더 이상 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한계가 여기까지입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죽음이 한계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 입니다.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야이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입니다.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 발아래 무릎을 꿇고 엎드렸던 그의 믿음은 여기까지입니다. 야이로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부활의 신앙이 있었더라면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어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딸이 죽었다’고 해도 예수님은 살릴 수 있다고 믿고 ‘예수님 갑시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이로의 믿음은 거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야이로의 믿음은 예수님을 병든 자를 고치는 의사 정도로 알고 모셔가는 것입니다. 살아 숨을 쉬고 있을 때 고칠 수 있는 분이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심을 믿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야이로는 난처합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50). 죽음을 앞에 놓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야이로의 믿음의 한계를 넘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상상을 넘는 초월적인 능력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죽은 자는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부활의 진리를 깨달아 알게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병든 자나 죽은 자나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죽었으면 살리면 되고, 병들었으면 고치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네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들었지만 온전히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를 알아들지 못했지만 야이로는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을 모두 포기하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깁니다. 자신의 소원을 예수님께 맡겨버렸습니다. 딸을 살리시든지 말든지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야이로의 믿음이 성장되는 과정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다 이해하고 믿고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말씀은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고, 믿을 수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은 듣고도 더 이상 따르지 않습니다. 말씀을 이해하고 따르려고 하지만 이해가 안되는 것은 따르지를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한계가 바로 여기까지입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말씀이 믿어지지 않을지라도 믿고 따랐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지 못해도, 이해가 안 되어도 맡기는 믿음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요셉이 약혼한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약혼한 마리아가 ‘그런 여자가 아닌데’ 하며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요셉을 의인이라고 했습니다(마1:19). 야이로는 딸이 죽었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고 말을 듣고 믿음에 혼란이 왔을 때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을 듣고 더 이상 우왕좌왕하지 않고 믿고 기다렸습니다. 말씀을 이해할 수 없어도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고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집에 왔습니다. 집안에는 사람들이 울며 통곡하며 야단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죽으면 날씨가 덥기 때문에 빨리 부패하기 때문에 곧 바로 장례를 치룹니다. 이러한 현실을 본 야이로는 또 다시 믿음에 혼란이 옵니다.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서도 집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가느냐 마느냐 혼란이 있었지만 그래도 예수님께서 ‘두려워말고 믿으라’는 말씀을 듣고 집에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집안에 모든 사람들이 울며 통곡하는 것을 보았을 때 또 다시 그의 믿음은 흔들립니다. 우는 사람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옵니다.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 죽었지만 그의 가족들이 슬퍼하며 우는 것을 보면 함께 슬퍼하게 됩니다.
야이로가 지금까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왔지만 가족들과 사람들이 울며 통곡하는 것을 보았을 때 야이로 죽은 딸을 위해 낙담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5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죽은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모드 어이없어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딸을 ‘잔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살려내실 것이라는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딸이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다시 살려내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활을 믿는 믿음은 죽음을 자는 것으로 믿는다는 말씀입니다. 죽음은 잠입니다. 그러나 비웃는 사람들의 눈에는 죽은 것이 확실합니다. 살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보고 잔다고 하는 사람을 보고 비웃습니다. 어리석고 한심스러워 보일 것입니다. 잔다는 말씀을 비웃는 사람은 더 이상 살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웃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그리고 아이의 부모와 함께 방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딸의 손을 잡고 “아이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딸은 즉시 영이 돌아와 살아 일어났습니다. 죽음은 영과 육의 분리입니다. 육신에서 영이 떠나는 것을 죽음이라고 하고, 떠난 영이 다시 육신으로 돌아오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들에게는 죽음은 잠자는 것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의 무덤에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씀하셨을 때 나사로는 살아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주안에서 죽은 자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깨우실 때 모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야이로의 불완전한 믿음을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을 믿게 되는 완전한 믿음까지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신 이적은 야이로의 불완전한 믿음을 완전한 믿음으로 성장시켜 주기위한 사건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야이로는 유대교의 신실한 신자이요 율법을 존중하게 여기는 율법주의자입니다. 많은 율법주의자들이 예수님을 모함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야이로 역시 율법주의자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사람입니다. 딸이 병들어 죽게 됨으로 예수님을 찾게 되었고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 발아래 엎드리기까지 했습니다.
야이로는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불완전한 믿음은 죽음을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불완전한 믿음을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완전한 믿음으로 성장시켜 주셨습니다. 야이로의 불완전한 믿음을 완전한 믿음으로 성장시켜 주시기 위해서 사랑하는 딸을 병들어 죽게 하신 것입니다. 아주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완전한 믿음으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디까지 입니까?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고 발아래 엎드린 것도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믿음은 흔들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듣고 이해가 안되어도 믿고 기다렸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이해를 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믿고 순종하면 죽은 자를 살리는 것과 같은 기적과도 같은 축복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한계가 어디까지 입니까? 이해가 된다고 믿고 이해가 안 된다고 안 믿는 믿음은 더 이상 축복이 없습니다. 오늘의 많은 성도들이 여기까지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도 여러분을 향하여 “두려워말고 믿고 기다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 말씀을 듣고 믿고 기다립시다.
https://cafe.daum.net/huhcs48/5rx8/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