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의 만남
여러분 아주 절박한 상황에 빠진 꿈을 꾼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데 꿈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 삶에도 아주 절박하고 다급한 상황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신앙인, 그리스도인이지만, 막상 어려운 일이 닥쳐오면 당황하게 됩니다. 꿈이라면 깨어나면 되지만, 실제 상황이면 잠을 자기도 힘들고 잠에서 깨어도 그대로입니다. 심각한 상황이 전개될 때는 아주 절박하고 다급한 심정이 되고 어떻게 할 줄 몰라서 막막해집니다. 너무 어려우면 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그냥 멍하니 있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주 다급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께 나와 도움을 구하는 한 사람이 나오는데, 그의 이름은 야이로입니다. 그에게 닥친 어려운 상황을 살펴보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함께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1. 야이로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또 많은 비유로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가로질러, 동쪽에 있는 거라사 지역에 가셨습니다. 거기서 군대귀신 들린 한 사람을 만나 고쳐주셨고, 이제 다시 북서쪽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40절을 보면, 예수님이 가버나움 해변에 돌아와 배에서 내리시는데, 이미 많은 사람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그 무리 가운데 바로 이 야이로가 있었습니다.
41절에 보면, 그는 회당장입니다. 그러니까 가버나움에서 그는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회당장은 회당의 행정 책임자입니다. 지금의 목회자 같은 것이 아니라, 회당을 잘 관리하도록 책임을 맡은 장로회의 의장쯤 되는 사람입니다. 큰 회당에는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회당장을 했습니다. 이 회당에는 회당장이 여러 명이었을 것이고, 야이로는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야이로는 지위가 높고 부자이며 그곳에서 잘 알려진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가 처음 예수에 대해서 들었을 때, 아마 예수가 그저 어쩌다 인기를 끄는 사람 정도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큰 능력으로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낸다는 말을 듣고는 신기해서 직접 가서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야이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자기의 사랑하는 딸이 아파서 죽게 된 겁니다.
지난번 42절에 보면, 야이로의 딸은 겨우 열두 살이었습니다. 내 아들이나 딸이 열두 살이었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다운 나이입니까? 이제 아이에서 청소년기로 들어가는 그런 나이 아닙니까?
열두 살은 유대인들의 문화에 따르면, 아이가 여인으로 되는 나이였습니다. 열두 살 때 유대 여자들은 정혼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앞으로 결혼할 사람과 짝을 미리 맺어주고 아직 결혼식만 하지 않은 정혼기에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열두 살은 아주 좋은 나이이고, 성인으로 들어가는 나이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야이로의 유일한 자녀(외딸)였습니다(42). 그의 딸 나이로 짐작해 보면, 야이로가 일찍 결혼해서 딸을 낳았으면 대략 30대 초중반이었을 것이고, 조금 늦게 낳았어도 40대 초중반 정도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야이로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성공한 가버나움의 종교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그동안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였습니다. 모든 것이 좋았고 다 성공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삶의 어떤 부분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잘 믿고 영적으로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외동딸이 아파서 침상 위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자기 외딸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야이로에게 큰 슬픔과 절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는 당연히 많은 의사들을 데려다가 자기 딸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겠습니까? 어느 아빠가, 특히 이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 지금 자기 딸이 죽어가고 있는데 가만히 두었겠습니까? 용하다는 의사는 다 불러다 보게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딸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지금이 야이로는 아무리 자기가 애를 써도 딸에 대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게 되었습니다. 완전한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는 막막한 현실 속에서, 누군가가 야이로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말해주었던지 예수님에 대해 생각난 겁니다.
예수라는 분은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낼 뿐 아니라, 심지어 나인이라는 성의 과부에게 있던 아들이 죽었을 때 불쌍히 여기며 그 아들을 살려내셨습니다(7:11-17). 누군가 그 소식을 전해주었을지 모릅니다. “그분이라면 당신의 딸을 살릴 수 있을 겁니다.”라고 누군가가 말해준 겁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사실 주저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는 가난하고 집도 없는 떠돌이 랍비가 아닌가? 게다가 그는 아무런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하는 나사렛 출신인데.’ 또 자기 같이 ‘고상하고 높은 사람이 저런 사람에게 간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저 사람에게 가면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나?’라는 생각 때문에 주저되는 겁니다.
야이로는 예수에게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상당히 고민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갈까 말까 하고 있는데 갑자기 예수가 배를 타고 그곳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예수님이 안 계신 동안 수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 것입니다. 언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지 알 수 없고, 그렇다고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가서 찾아올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다시 온다면 그에게 가서 부탁해야 할 것인지, 상당한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예수가 배를 타고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순간 야이로는 다시 고민이 시작됩니다. 자신의 지위와 자존심은 자기가 예수라는 저 가난한 랍비에게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지만, 자존심으로는 가지 못하겠지만, 그토록 귀중하고 사랑하는 외동딸이 핏기 없는 얼굴로 ‘아빠, 너무 아파요.’ 하는 것을 들을 때 마음이 찢어집니다. 그래서 드디어 그는 결단을 내립니다. 사랑이 자존심을 이깁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가 가버나움으로 다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해변으로 달려갑니다.
야이로가 나타나니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고 길을 내어줍니다. 예수님이 배에서 내리자마자 그렇게 자존심이 강하던 야이로가, 그토록 고상하고 높은 지위의 야이로가 놀랍게도 예수의 발아래 무릎을 꿇습니다. 그냥 와도 되는데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예수님께 죽어가는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요청합니다(42).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떠돌이 랍비니까 옷이 싸구려이고 대충 찢어지거나 낡은 옷이었을 것입니다. 반면 야이로의 옷은 분명 비싸고 좋은 옷, 요즘 말로 명품이었을 겁니다. 명품 옷을 입고 호숫가 모래 사장에 무릎을 꿇습니다. 이제 야이로는 더 이상 자신의 자존심이나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존심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혹시 내가 주님께로 오는 것을 막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있다면 무엇입니까? 아직 예수님을 안 믿는 분들은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하는 것을 막는 그것이 무엇인지, 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분들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존심도, 세상의 명예나 지위나 부귀도, 다른 그 어느 것도, 우리가 주님께로 가는 것을 막도록 놓아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주님께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 삶에 어떤 어려움이 있으십니까? 매어 달려야 합니다. 그냥 있지 마시고 매달려야 합니다. 정말 매달리면서 오직 주님만 외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왜 못합니까? 그렇게 어렵고 힘든데 이것 따지고 저것 따지고, 그럴 때가 아닙니다. 울부짖으며 외칠 때 주님이 들어 주십니다.
2. 예수님
야이로가 진실한 마음으로 같이 가주시기를 요청하자 예수님은 그와 함께 가십니다(42). 그런데 예수님이 왜 가십니까? 야이로의 믿음이 대단해서? 명품 옷을 입고 온 사람이 자기에게 무릎을 꿇어서?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은혜와 사랑과 긍휼로 가득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야이로의 믿음은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것이었습니다. 야이로가 예수님께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 집에 오셔서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했습니다(41). 사실 예수님은 직접 가서 자기 딸을 만질 필요도 없이, 먼 거리에서도 얼마든지 병을 고치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야이로는 몰랐습니다.
이전에 로마 백부장의 종을 고치실 때 고쳐 주겠다고 하며 가시는데 집에 안 들어오셔도 되고 그냥 멀리서 말씀만 하셔도 괜찮다고 하는 것을 보시고, “이스라엘에서도 이런 믿음을 내가 본 적이 없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이미 그렇게 하셨는데 그것을 야이로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구원자)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와 함께 가십니다.
우리가 엉터리 같은 기도를 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알아서 우리에게 잘 대처해 주십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예수님이 어떻게 나오실까?’ 그런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기도하면 됩니다.
이렇게 믿음이 부족하고 연약해도 함께 가주십니다. 왜 그러십니까? 예수님은 자기 외동딸을 지극히 사랑하는 야이로의 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력한 인물인 그가 자신 앞에 이렇게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예수님은 잘 아십니다.
종교적으로 뛰어나다고 하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제사장 같은 사람들은 자기에게 나와서 이렇게 무릎 꿇어 간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렇게 절박한 마음으로 무릎까지 꿇으면서 나왔습니다. 이 마음이 얼마나 참 귀한 마음입니까?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향한 사랑과 겸손해진 마음을 보시고 함께 가시는 것입니다. 그토록 강하고 빈틈없던 야이로의 마음이 무너져 내려서 이제 상한 마음이 된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함께 가주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완전합니까? 제가 저의 믿음을 봐도 너무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우리 믿음은 참 약하고 어리석습니다. ‘나는 완벽한 믿음이야.’ 이럴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일이 잘 풀린다면, 우리의 믿음이 좋아서 잘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아주 세게 기도해서 주님이 들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우리의 믿음이 기적의 원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믿음이 있어야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된 원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은 기적이 일어나는 데 쓰이는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문제를 도와주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크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은혜이고 자비입니다. 사실 우리가 벌 받을 게 더 많은데도 안 주시는 그 자비, 또 우리가 받을 상이 없는데도 막 부어주시는 그 은혜로, 우리의 안타까운 마음을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그렇기에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는 우리가 외치고 울부짖으며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외치지 않고 금식하지 않고 울부짖어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단 한 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뭔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데가 있으니까 그렇게 절박하게 기도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 외에 정말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또 있습니까? 내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데 그게 정말 나를 살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오늘 바로 이런 상한 마음, 가난한 심령을 찾으십니다.
이제 예수님이 함께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데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십니다. 수많은 사람이 밀고 당기는 가운데 걸어가다가 갑자기 멈추시더니 주변을 둘러보시면서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45) 하고 물으시면서 자기를 만진 사람을 찾으시는 겁니다. 지금 모든 사람이 만졌는데 누가 만졌느냐고 하십니다. 그리고 무리 중에서 한 여인이 나와 예수님과 대화를 하는 동안 시간이 지체됩니다.
이때 야이로는 혀가 바짝 타들어 가고 식은땀이 줄줄 흐릅니다. 지금 1초가 급한데 왜 저런 부정한 여자와 이야기를 하느냐는 겁니다. 1초가 급한 이때 예수님은 저 여자와 만나느라 금 같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48)라고 하시는 바로 그 순간 야이로의 집에서 종들이 도착합니다.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49절)
야이로는 조금 전에 딸이 죽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습니다. 이 순간 야이로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앞이 노래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어떤 소식을 들었을 때 하늘이 노래지고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쿵 쓰러지는 겁니다.
야이로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저 여자만 나타나지만 않았더라도... 예수님이 그냥 나와 함께 가 주기만 했더라도...’ 슬픔과 후회와 원망이 올라오고 슬슬 분노도 올라오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으시고 전혀 동요하지 않으시면서 오히려 확신 있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50절)
지금 예수님이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라고 하셨는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지금 야이로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두려워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진 않습니다. 그런데 왜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라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이 종들이 그다음 한 말 때문입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이게 문제입니다. 옆에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그냥 죽었다는 소식만 전하면 되지, ‘그러니까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할 필요가 없다.’라는 말을 뭐 하러 합니까?
그런데 우리에게 꼭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일이 탁 벌어졌을 때, 그냥 그 사실을 전할 뿐만 아니라 해석이 들어갑니다. 이게 해석입니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그 상황을 해석하는데, 주변에서 이런 이상한 해석을 하는 것을 들으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들으면 흔들리는 겁니다. 두려워하는 겁니다. 괴로운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석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지금 상황은 벌어졌습니다. 그에 대한 해석은 ‘이제 더 이상 선생님을 괴롭게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죽었으니까. 끝났으니까.’입니다. 이게 그들의 해석입니다. 그 말을 듣고 지금 야이로는 상심하고 두려워하는 겁니다. 지금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는 게 아니라, 굉장히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야이로는 사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어떻게 죽은 딸이 구원을 얻겠습니까? “믿기만 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하셨는데, 죽은 아이가 무슨 구원을 얻습니까? 그러니까 살아난다는 말인데, 이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그럼에도 그는 예수님과 함께 집을 향해 계속 가는데, 이게 참 놀라운 것입니다.
만일 자기 딸이 죽었으니까 예수님이 더 이상 같이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며 거부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 사람들의 말대로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라는 해석을 듣고 그 해석을 받아들였으면 어땠겠습니까? ‘그래, 끝났다. 이제 다 끝났다.’ 생각하며 예수님 ‘안 가셔도 됩니다.’라고 그렇게 결정했으면 어떤 일이 있었겠습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의 딸도 다시 살아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 비록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해도, 그는 예수님의 해석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지금 상황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는 눈이 다릅니다. 지금 종들은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다 끝났습니다.”라고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라고 해석하십니다. “그러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해석을 내리십니다. 같은 상황인데 야이로는 이 둘 중에 예수님의 해석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합니다.
이것이 야이로의 믿음입니다. 무슨 대단한 믿음은 아닌데 올바른 결정을 한 것입니다. 사실 이해가 안 가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죽었는데 살아납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래, 뭔가 있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 그냥 이분을 따르기로 결정하자. 내 종들의 말을 따르는 게 아니고 이분을 따르기로 결정하자.’라는 그 결정을 내린 겁니다.
아마 수많은 사람이 이런 순간에 종들 쪽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들의 해석을 선택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이런 상황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믿음은 결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알아서 믿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이 나와 있기 때문에, 내가 믿음으로 이것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받는 믿음입니다.
그렇게 믿고 나면 체험적인 지식이 생기는 겁니다. 믿고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내가 의문을 가졌던 부분들이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예수님을 따를 때, 먼저는 이렇게 믿기로 결정해서 따릅니다. 그리고 믿음에 지식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에 도착해보니 많은 사람들이 울며 통곡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가족과 친척들뿐 아니라 전문 애곡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와서 울어주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울지 말라고 하시며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53절)
너무나 당연한 반응입니다. 사람들은 야이로의 딸이 죽은 것을 알기 때문에 죽은 게 아니라 잔다고 말하는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사람들에게 이 소녀는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는 자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곧 살려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몰랐습니다. 그저 위대한 선생이나 선지자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사람들은 소녀가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잔다고 선언하십니다. 물론 죽었지만 이제 살아날 거라는 눈으로 보시기 때문에 잔다고 표현하신 것뿐입니다. 진짜 자는 게 아니라 죽었지만, 자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이제 일어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도 이런 순간에 우리가 어느 눈으로 볼 거냐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일반적으로 죽었다고 보는 것이 안 믿는 사람들의 시각인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자꾸 안 믿는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내 삶을 본다면 많은 문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보시는 대로 보고 해석하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들어가셔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십니다. “아이야, 일어나라.” 그러자 그 부모는 깜짝 놀랍니다(56). 마가복음에 보면 ‘달리다굼’이라는 아람어를 사용하시면서 살려내시는데, 아이의 부모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고 놀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방금까지도 예수님을 비웃던 사람들입니다. 야이로의 아내도 비웃었을 것이고 ‘죽었는데 무슨 잔다고 하느냐? 놀리느냐?’라고 하며 분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직접 목격한 다음에는, 그들의 태도가 바뀝니다. 더 이상 비웃지 않습니다. 더 이상 아무 비꼬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아이가 살아나자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는데(55) 왜 그렇습니까? 살아난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부흥회나 철야기도를 하는 게 아니라 먹을 것을 먹고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영적 체험이 지금 필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영적 체험이 필요하지만, 이 순간에 필요한 것은 육적인 양식입니다. 일단 먹어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체험한 다음에 할 일은 더 많은 신비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하고 일상적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당연한 일을 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연한 일을 잘하면서 영적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 식사를 잘하고, 잠을 잘 자고, 화장실을 잘 가고, 운동도 하고, 그래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고 또 영적인 생활도 잘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이 좋다고 해서 몇 시간이고 연속적으로 예배하고 또 예배하고 또 예배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몸을 혹사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꼭 좋은 게 아닙니다. 조화가 필요합니다.
육체와 영을 분리시켜 육체를 나쁜 것으로 보는 시각이 고대 헬라 사람들의 사고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우리 육체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의 몸을 잘 돌보는 일도 영적인 일입니다. 몸이 건강해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일도 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프신 분들을 위해서 낫기를 같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아서 건강한 몸으로 무슨 이상한 데 가서 죄를 짓고 그러면 안 되고,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라고 로마서 12장(1절)에서도 말씀합니다.
야이로와 그의 아내와 또 그의 딸은 죽는 날까지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틀림없이 예수님을 증거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특히 열두 살이던 당사자 야이로의 딸의 인생에 평생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스스로 자기 능력으로 살겠다고 혈기 왕성하게 움직일 때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틈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해주시려고 다 열어놓아 주시는데, 내가 해보겠다고 여기 부딪치고 저기 부딪치고 하면서 그게 보이질 않는 겁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하기를 포기하고 엎드릴 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우리의 삶에는 우리의 능력 밖의 일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물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가능한 영역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또 가능한 영역에서는 나의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먼저 신뢰하며 내 삶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면 그것은 게으름입니다. 반면 할 수 없는 것에 있어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자기가 하겠다고 하면 교만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지만, 동시에 엄청난 능력의 주님, 온 우주만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나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런 능력의 하나님에게 나의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문제가 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걱정과 염려가 들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2천 년 전 야이로에게 말씀하셨던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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