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9장, 막 5장, 눅 8장
예수님께서 거라사(가다라)에 가시사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셨지만, 군대 귀신이 돼지 2천 마리에게 들어가 물에 뛰어들어 몰사하는 바람에 거라사인들이 예수님에게 떠나달라고 요청했다. 예수님은 거라사 지역을 떠나 다시 예수님의 주 활동 무대인 갈릴리가 있는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다. 이미 가버나움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환영하고 나섰는데, 이 때 야이로라 하는 회당장이 예수님 발앞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청하였다. 그 이유는 야이로의 12살 난 외동딸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당장 야이로의 슬픔
야이로(Ἰάειρος)는 히브리어 야일(יאיר, enlightener)을 헬라식으로 바꾼 이름인데, ‘계몽가’라는 뜻이 있다. 야이로는 아마도 가버나움에 있는 유대인 회당의 회당장인 것 같다. 회당장은 산헤드린 공회나 종교 법정에 속한 회원이 아니라 그저 회당을 관리하는 장로로 보인다. 마가는 그가 회당장들 중에 하나라고 말했는데, 가버나움은 큰 도시였으므로 회당이 여러 개 있었고, 그 회당을 총관리하는 회당장 중 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 같다. 또는 회당장이 한 사람이 아니라 세 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회당장들 중 한 사람이라고 기록했을 수도 있다.
회당장은 무슨 일을 할까?
회당장은 회당의 공적 예배에 참석하고 주관하며, 회당에서 논의되는 여러 가지 논쟁들을 결정하는 일을 한다. 회당장은 모세의 율법을 주요한 원칙으로 회당을 운영하기 때문에 그 당시 예수님의 말씀과는 충돌적이며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야이로는 어떻게 예수님에게 와서 도움을 청했을까?
그 당시 상황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야이로에게는 큰 슬픔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외동딸이 죽어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율법적으로 질병은 범죄자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이며 징계이다. 회당장은 당연히 모세의 율법을 잘 지켜야 했고, 그러므로 그들의 정서대로 한다면 집안에 우환이 없어야 했을 것이다. 만일 그에게 딸이 죽어가는 일이 없었다면 과연 예수님에게 와서 엎드려 기도를 청했을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고명한 딸의 죽음 앞에서 완벽한 율법주의자이고 모세의 추종자인 회당장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모세의 율법이 그의 딸을 지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죽음을 이길 장사는 없기 때문이다.
깨어진 율법주의
율법주의가 예수님의 발앞에 엎드렸다. 야이로가 예수님의 발앞에 엎드려 했던 말이 무엇이었던가?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이 세상에 누가 자신의 고명한 딸이 죽어가고 있는데 자신의 체면과 고집을 부릴 수 있을까? 물론 종종 그런 사람들이 있다. 자식이 아니라 자신이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자신의 믿음과 신조를 버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만일 목숨보다 귀하고 목숨을 잃어도 바꿀 수 없는 신조가 있다면 그 신조는 분명히 생명을 넘어선 가치가 있을 것이다.
목숨보다 고귀하고 값진 신조는 무엇일까?
서머나 교회의 감독인 폴리갑은 예수 믿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 베드로, 바울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목숨뿐 아니라 가족의 목숨까지도 버리면서 예수 믿음을 택하고 붙잡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믿음은 육체의 목숨보다 영혼의 영광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죽어도 살고 살아서 영원히 사는 믿음이 예수 믿음이다.
그런데 야이로는 율법에 대한 신조를 고명한 딸의 죽음 앞에서 버리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율법 믿음을 예수 믿음으로 바꾼 것이다. 회당장 야이로는 어린 딸의 죽음 앞에서 율법주의의 벽에 부딪혔을 것이다.
야이로의 믿음은 무엇일까?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손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손을 얼마나 원했을까? 간곡히 구하여(And besought him greatly), 구하여(παρεκαλει, 미완료형)는 과거 사건이지만 그 당시에는 반복되는 간구, 즉 구하고 구했다는 뜻이다. 야이로는 예수님에게 와서 그저 한 번 요청을 해본 것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심각하고 위중하게 간청을 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자신의 외동딸의 생명과 깊이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야이로는 예수님이 죽어가는,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 어린 딸을 살려줄 수 있다고 믿었을까? 그럴 것이다.
막간에 나오는 혈루증에 걸린 여인은 수많은 치료에도 불구하고 혈루병으로 죽어가고 있었고, 그래서 마지막 치료법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택한 것이었다.
야이로는 그 여인과 무엇이 다를까?
그는 회당장답게 항상 대중 앞에 나서서 회당 예배를 맡아서 진행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청하는 것이 쉬웠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자존심 또는 위신, 체면을 생각한다면 회당과 적대적인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몇 번이나 간청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자신의 딸에게 손을 대어 살려달라고 했다. 이렇게 직접 예수님의 손으로 안수하여 살려달라고 간청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손(lay hands on)
사람들은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에게 와서 안수하여 주시기를 부탁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러한 자들을 꾸짖고 아이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금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아이들에게 안수해 주셨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실 때 손을 얹으셨다.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고치실 때 눈에 안수하셨다. 예수님은 18년 동안 귀신 들려 꼬부라져 펴지 못하는 한 여자에게 안수하시며 펴져서 고침을 받았다.
안수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했다. 그런데 안수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 당시에는 축복할 때 말로만 했을까? 역시 야곱이 그의 아들들에게 축복할 때도 축복의 말(benediction)만 했다. 구체적으로 안수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희생 제사를 바칠 때 희생물의 머리에 먼저 안수하라고 하셨다. 죄인이 희생 제물에게 안수함으로 죄를 전가하고, 죄가 전가된 짐승이 죽으므로 죄가 사해지는 원리이다. 그 후에 안수는 죄의 전가뿐 아니라 복의 전가의 상징이 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하고 온 이스라엘 자손이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고 했다.
시 139: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안수하셨다(laid thine hand upon me)고 하였다. 이 말씀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능력을 입혀주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안수를 자주 하셨다. 손(χείρ, יָד)은 히브리 사상에서 수단이나 방법(a means or instrument), 비유적으로는 힘(power)을 뜻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떠올렸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손을 홍해 위로 내밀었을 때 바다가 갈라졌다.
야이로는 자신의 죽어가는 딸을 위해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만져주시기를 간청했다. 그는 예수님의 손을 하나님의 손, 모세와 함께 역사하신 능력의 손으로 믿었을 것이다. 그는 히브리적 사고로 예수님의 손이 딸의 몸에 닿을 때 어떤 능력이 임할 것을 믿었던 것이다. 마치 모세의 손이 홍해를 가르듯이 예수님의 손이 구원과 생명을 가져다 줄 것을 믿었을 것이다.
지체되는 믿음
인간의 믿음은 생각보다 견고하지 못하다. 믿음은 지체되면 불신앙으로 변질될 수 있다.
야이로의 겸손하고 확고한 믿음이 방해를 받게 되는 사건이 생긴다. 그것은 혈루증 걸린 여인이 중간에 끼어든 것이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벼랑 끝에 선 믿음을 받으시고 무리들과 함께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셨다. 그런데 갑자기 혈루증 걸린 여인의 사건으로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셨던 것이다.
얼마나 지체되었을까?
아마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은 1분 1초가 1시간이 될 수도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혈루증 걸린 여인과의 주님의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연락이 왔다. 이미 딸이 죽었다고, 선생님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그래서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야이로는 절망감으로 가슴이 철렁했을 것이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예수님을 더 이상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괴롭게 하지 말라(μὴ σκύλλε, 명령형)는 희망을 더 이상 갖지 말라는 뜻이다. 헛된 소망을 품지 말고 기대해봤자 실망이니까 그만 포기하라는 뜻이다. 얼마나 절망적이고 비참한 말인가?
회당장은 자신이 믿고 수종했던 모세의 율법 대신 율법을 거스르는 예수의 손을 의지하여 모든 체면과 자존심을 버리고 나왔는데,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서 시도도 해보지 못하고 어린 딸이 죽었다는 전갈을 받았을 때 아마도 정신이 휘청하여 현기증에 쓰러질 것 같았을 것이다.
우리들의 딸이 병원에서 생사를 다투다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어떨까? 상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다 부질없는 일이다. 예수님이 가셔도 소용없다. 혹시 숨이 조금이라도 붙어 있다면 한 가닥의 희망이 있을 텐데, 이제 숨이 끊어졌는데 무슨 가망이 있겠는가?
회당장은 순간적으로 혈루증 걸린 여인을 원망했을까? 아니면 길에서 지체하셨던 예수님이 미웠을까? 우리는 여러 가지로 상상할 수 있지만, 기록된 말씀에 회당장은 숨죽이고 침묵한다.
이제는 주님의 말씀만 남아 있다. 회당장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는 뜻이다. 모세 대신 예수님을 바라보았고, 율법 대신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고, 힘을 다해 성품을 다해 예수님 앞에 엎드려 능력의 손길을 간절히 간구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길에는 장애물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일 수도 있지만, 믿음 앞에 놓인 수많은 변수들 때문이기도 하다. 믿음 앞에 놓인 변수들은 상황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시간일 수도 있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
어떤 이는 믿음을 방해하는 것들을 마귀의 역사라고 한다. 그래서 믿음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들을 마귀의 장난으로 보고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치기도 한다. 그러나 믿음이 지체되어질 때, 방해를 받을 때 우리는 그 방해물이나 지체하게 만드는 변수들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마귀의 짓이라고 여기며 분노하고 흥분하게 된다.
그러나 믿음이 방해받고 있는 야이로에게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들어보라.
믿음은 손에서 말씀으로
혹시 야이로가 그의 딸이 죽었다는 말에 휘둘릴 것을 주님은 걱정하셔서 급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눅 8:50)
이 후로 야이로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 의지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다.
Fear not: believe only, and she shall be made whole.
믿음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의 반대는 두려움이다.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믿으라”고 반복으로 말씀하시면서 “그러면 네 딸이 온전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온전하게 된다는 것은 병이 나아서 살아날 것이란 뜻이다. 이제부터 야이로는 집으로부터 온 사망 소식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 믿어야 한다. 그는 예수님의 손이 죽어가는 딸의 몸에 닿아 낫기를 바랐는데, 이제는 예수님의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할 때인 것이다.
실상 예수님은 손을 얹고 병을 고치시기도 했고 그냥 말씀으로 병을 고치시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손을 얹든 얹지 않든 항상 말씀이 나갔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 구원의 능력은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야이로도 모세의 손 대신 예수님의 손을 의지했지만, 능력은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말씀에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모세가 손을 들어 홍해를 가리켰지만 그 손 위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는 집중하지 않는다. 단지 기적과 표적을 사모하지만 주님의 말씀 안에 능력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이제부터 야이로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명이며 구원이며 능력이며 기적이 된다.
말씀을 따라가는 야이로
주님의 첫 번째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믿으라. 그러면 그녀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은 “더 이상 선생님을 괴롭게 하지 말라”, 즉 더 이상 헛된 소망을 가지지 말라는 사람의 말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다.
죽음에 대해 사람들은 담담히 처연히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다 죽게 되어 있고 죽으면 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은 끝이 아니고 죄의 열매이며,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아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신다.
초상집에 들어가자 이미 곡하는 자들이 와서 울며 애통해하고 있었다. 마태는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자들이 이미 와서 집안은 야단법석이었다고 기록한다. 12살짜리 어린 아이가 죽었으니 얼마나 더 곡을 하고 슬퍼해야 할까? 피리 부는 자들은 초상집에 와서 슬픈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인데, 근동에서는 살을 베고 머리를 자르고 방탕하게 울므로 고인을 위로한다. 가족이 죽으면 여자들은 비명을 지르거나 낮은 소리로 쉬임없이 우는 소리를 낸다. 가족들의 곡으로 모자라서 곡하는 사람들을 돈을 주고 사는데, 그들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죽은 자를 위해 슬퍼해주고 심지어는 죽은 자의 미덕을 찬양하고 행동을 재연하고 장송곡을 부르는 가수들을 데려다가 장례가 끝날 때까지 슬픈 노래를 부르게 한다. 예수님이 회당장의 집에 갔을 때 이미 이러한 처참한 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의 두 번째 말씀은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막 5:39)
마태는 아주 노골적으로 기록했다.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마 9:24)
물러가라(Give place)는 다들 비켜라는 뜻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미 회당장의 집에는 곡하는 자들과 악기 연주하는 자들, 온 가족들이 모여서 곡을 하며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사람이 발 디딜 틈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켜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때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사람들의 반응은 “그들이 비웃더라”였다. 요즈음 말로 하면 “죽은 사람더러 잔단다, 웃기고 앉았네”라고 했고, 깔깔대고 웃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묵살해버렸을 것이다. 비웃더라(laugh down)는 웃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묵살하거나 방해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을까?
죽은 것은 삶이 끝난 것이고, 잔다는 의미는 쉬고 있다는 뜻이다. 잠들어 있는 자는 깨어나면 된다. 예수님은 소녀가 살아날 것을 암시하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소녀의 아버지인 회당장은 사람들의 비웃음보다 예수님의 말씀만 믿고 따랐던 것이다. 회당장은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일에 전혀 아무것도 토를 달든지 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이 하시도록 곡을 멈추게 하고 길을 비켜드리라고 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비켜나자 곧 죽은 소녀에게로 들어가서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 쿰” 소리치셨다. 달리다 쿰(ταλιθα κουμι)은 아람어로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이다. 아람어는 예수님이 즐겨 쓰셨던 언어이다. 시리아어와 갈대아어를 섞은 사투리이다. 예수님의 삶의 주 무대였던 나사렛과 가버나움 지역에서는 아람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을 자유롭게 인용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이 히브리어에 대해 일가견이 있으셨던 것이 아닌가 싶다. 많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애곡하고 통곡하는 자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달리다 쿰”이라고 말씀하셨다.
말씀이 생명이 되다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소녀는 마치 자다가 일어난 것처럼 일어나 걷게 되었다. 누가는 영이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녀의 영혼이 다시 왔다(her spirit came again). 에디오피아역에서는 re-entered, 즉 다시 들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죽는다는 것은 몸속에 있는 영혼이 떠나가는 것이다. 영혼이 몸 안으로 다시 돌아옴으로 육체가 살아나는 것이다. 누가는 의사로서 정확하게 생명의 원리를 기록하고 있다. 영혼이 죽으면 육신이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영혼이 살아 있으면 육체가 죽어도 영원히 살게 된다. 육체 속에 있는 영혼은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살아나게 되고, 영혼이 생명을 얻게 되면 영생을 누린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 5:28-29)
주님은 죽은 소녀의 회생을 통해 영혼과 육체의 관계, 영혼과 주님의 말씀과의 관계를 영적으로 보여주시고 있다.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소녀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살아난 자가 유령이 아니라 실제 몸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시기 위해 주님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에서 고기 잡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먹을 것이 있느냐”고 물으시고 구운 생선을 나누어 드셨다. 주님의 부활이 영혼이 아니라 실제 몸의 부활임을 증명해보이신 것이다. 주님은 실제로 부활하셔서 음식을 드셨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야이로와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기적을 보고 놀랐다. 놀랐다(ἐξέστησαν, put stand out of wits, astound)는 것은 정신이 나갔다,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놀랐다는 뜻이다. 야이로는 예수님을 통해 한 가닥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즉시 그 자리에서 죽은 딸이 살아나서 음식까지 먹을 것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야이로는 딸이 그저 이렇게 완전히 정상으로 회복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상태가 좋아지기를 원했을 것이다. 조금씩 천천히 회복되어지기라도 한다면 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빨리 신속히 이루어지는 주님의 치유에 그저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모든 것이 새롭게 회복되어진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마치 수련하듯 기술을 익히듯 천천히 회복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모든 삶이 새롭게 회복되어진다. 단, 야이로처럼 오직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의 생명의 현장에 함께 가기만 한다면 말이다. 우리가 주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방법은 오직 주님의 말씀만 듣고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말씀의 현장에 함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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