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6:6-8 진정한 예배 /전병금

세계적인 신학교인 프린스턴 신학교 학장이었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에게 한 청년이 찾아와 "따님을 사랑하니 저와 결혼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에드워즈 학장 딸의 성격이 워낙 괴팍해서 누구와 어울려 살 만하지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에드워즈 학장은 그것이 마음에 걸려 그 청혼을 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네가 내 딸을 아직 잘 몰라서 그러는데, 결혼은 생각지도 말게." "제가 따님을 사랑하는데도 안 됩니까?" "아니야, 자네와 내 딸은 서로 맞지가 않아." "맞지가 않다니요. 따님은 크리스천이 아닙니까? 저는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젊은이, 고집부리지 말게. 내 딸을 데리고 살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일세. 자네가 하나님은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 사이라 하더라도 결혼을 하고 나면 서로의 생각 차이로 인해 다투기도 하고 갈등을 빚기도 합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을 발견하고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낯선 사람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도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고 용납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 기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평가하기 때문에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비춰 주시고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 크신 사랑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만한 지혜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한낱 죄인일 뿐이며 지극히 작은 자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용납해 주셔서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며, 용서받은 죄인이 하나님과 나누는 친교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고백한 시편 기자처럼, 예배는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기에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가겠다고 하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찾는 자는 바로 '예배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4:23). 세상에서는 물질과 지식과 권세가 있는 자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러한 '예배드리는 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미 6:6). 본문에 나타난 미가 선지자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릴까 하는 것입니다. 죄로 물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은 제사에서도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외형적으로는 화려하고 거창한 제사를 드리고 있었지만, 그것이 과연 진정한 예배냐 하는 것이 미가를 비롯한 경건한 백성들의 고민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민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많은 이들은 한국 교회의 위기가 바로 예배의 위기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즉 예배가 바로 서야 교회가 바로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회복되지 않고서는 우리의 신앙이 회복될 수 없고 교회가 회복될 수 없습니다. 오늘 교회를 회복시키고 예배를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1.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예배는 기독교 신앙의 기본이요 기초입니다. 예배를 소홀히 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라고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영향으로 예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는 삶의 우선순위가 '예배'였습니다. 저희 집은 농촌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어머니는 농번기에도 주일을 지키기 위해 토요일에는 더욱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예배 준비에도 정성을 다하셨습니다. 목욕을 하시고 몸단장을 하시고, 헌금 준비하시고, 부모님이 교회에 입고 가실 옷을 꺼내 정성껏 손질하셨습니다.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제 마음속에는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철저히 각인되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일주일의 삶을 주일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토요일에는 주일 예배를 위해 최종 점검을 하며 혼신을 다해 준비합니다. 이는 제가 목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의 바른 모습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어떤 사람들은 "신령과 진정"(in spirit and in truth)이라는 말을 오해하여 신비스러운 예배나 지극 정성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으로"(in spirit), 그리고 "진리로"(in truth)라는 원문에서는 전혀 그런 뜻이 없습니다.

'영으로 드리는 예배'는 '영적인 예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물량주의적인 예배'를 염두에 둔 말입니다. 미가는 당시 "일 년 된 송아지", "천천의 숫양",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동원한 물량주의적 예배에서 진정한 예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최상의 제물은 자신의 신앙을 나타내는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러한 물질을 가지고 예배드려야 합니다. 문제는 드려진 제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끝난다는 것입니다. 제물은 드리지만 마음이 드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적인 예배'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이처럼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물질만이 아닌 나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또한 '진리로' 예배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는 인간의 자의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말씀에 근거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진리로' 예배드릴 때 우리는 참다운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맏아들을 제물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환심을 사기 위해 드릴 수 있는 최상의 희생제물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가나안에는 맏아들을 희생제사로 드리는 풍습이 있었으며 이스라엘도 이를 받아들여 종종 행하였습니다(왕하 3:27, 16:3, 사 57:5). 그러나 고든 맥도날드가 '예배는 우리의 지적 굶주림을 충족시킬 만큼 사리가 깊어야 한다'고 한 것처럼, 이 모든 정성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미신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요 14:6)의 말씀 안에서 예배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예배 안에 여러분 자신이 드려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습니까? 온전한 헌신이 없는 예배나 '예수' 없는 예배를 아무리 정성껏 드려도 그것은 헛된 예배입니다. 우리는 정성껏 드리는 예물과 함께 우리의 진실한 마음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마음, 깨끗한 마음,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와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삶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찾는(seek) 예배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라고 말씀하셨는데, 미가는 하나님께서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8)을 요구하신다(require)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행하고'(to act justly), '사랑하고'(to love mercy), '걷는'(to walk humbly with your God) 세 가지 동사가 나옵니다. 즉 진정한 예배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적극적인 행동은 우리를 '좁은 길'로 가게 합니다. 우리나라의 청백리 가운데 고건 전 총리가 있습니다. 그분은 임명직 서울시장으로 있을 때 상부의 지시로 수서 개발을 허락하는 압력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그 명령을 단호히 거절하고 그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훌훌 털고 나갔습니다. 세계 투명성 기구에서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투명한 지도자로 선정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교단 창현교회의 권사인 그는 오랜 공직 생활에 몸담았으면서도 다른 정치인들과는 달리 깨끗하고 훌륭하게 생활함으로써 모든 국민의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올 때 공의로운 생활과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가 자문하면서 나와야 합니다. 공의와 사랑이 예배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의를 추구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사랑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편 사랑이 많은 사람은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없다는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그래서 공의와 사랑을 겸비하기가 어렵습니다.

미국의 전 대통령인 지미 카터는 사랑과 공의를 잘 겸비한 사람으로 손꼽힙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재직 때보다 퇴임 후 오히려 더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해비타트 운동'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일을 전개하고, 인권 운동과 질병 퇴치 운동에 적극 앞장서고 있습니다. 또한 세계 분쟁 지역의 중재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는 등 사랑을 실천하는 운동을 그치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1977년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할 때 오늘 본문 말씀인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은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는 말씀을 암송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평생 이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살아갔던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켰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누가 자랑스럽게 자신은 정의롭게 행동하고 공의를 행하며 긍휼함으로 사랑하고 하나님과 겸손히 걷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 가운데는 자신이 남들보다 높은 윤리적인 기준을 가지고 산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해진 제사만 잘 드리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던 구약 시대와는 달리, 오늘날 우리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 항상 겸손하게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과 겸손하게 동행하여야 합니다

미가는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예배는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8절)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 원어로 이는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중학교에 다닐 때 저는 중학교까지 30리를 걸어서 다녔습니다. 기차를 타고 다니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집에서 역전까지, 역전에서 학교까지 거리도 10리나 되기 때문에 20리만 걸으면 되니까 걸어 다녔던 것입니다.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매일 가자면 무시무시한 고개가 둘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불량 소년들이 있었는데 저 혼자 가다가 몇 번이나 봉변을 당했기 때문에 매일 마음을 졸이면서 다녀야 했습니다. 기차 정기권을 내주지 않았던 어머니가 야속하기도 했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 고등학교에 다니는 형이 있었는데, 그 형과 함께 다니면 괜찮았습니다. 그 형과 함께 오려면 대학 입시 공부를 하는 형이 오기를 오래도록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래도 그 형을 기다렸다가 같이 오면 안전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어렵고 험한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면 얼마나 위로가 되고 안전하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면 세상 그 누가 두렵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제가 그 형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함께 올 수 있는 것처럼, 삶의 중심을 '내'가 아닌 하나님께 두는 자만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찬송가 작시자인 샬럿 엘리엇(Charlotte Elliott, 1789-1871) 여사는 32세 때 중병을 앓아 지체 부자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매사에 불평과 짜증만 늘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복음 전도자인 말란 목사가 그녀를 방문했습니다. 엘리엇은 "나에게 종교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십시오"라고 쏘아붙였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에 생각해 보니 목사님께 미안해 목사님을 찾아가서 "저의 성격이 못돼 잘못했으니 용서해 주세요"라고 사과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오라"(Come just as you are)고 그녀를 권면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엘리엇 여사는 깊은 감명을 받아 이렇게 시를 썼습니다.

"큰 죄에 빠진 날 주 보혈 흘려 주시고 또 나를 오라 하신 주께로 거저 갑니다 주 예수 베푼 사랑이 한없이 크고 넓으니 내 뜻을 모두 버리고 주께로 거저 갑니다"

이것이 바로 찬송가 339장('내 모습 이대로')이 쓰여진 배경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받아 주시는 주님께 나가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해 주시고 주님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게 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예배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가 바로 서야 우리 삶이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예배가 회복되어야 우리의 삶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교회만 드나드는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진실된 마음을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교회에서의 예배뿐만이 아니라 '일상의 예배'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러한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올 한 해 여러분 모두가 이런 진실된 예배로 하나님과 만나 복된 생활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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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6:6-8 진정한 예배 /전병금 미6:6-8 진정한 예배 /전병금 Reviewed by □□□ on January 12, 2026 Rating: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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