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9:35-38 예수님의 마음으로 섬깁시다 /오덕호

제직헌신예배를 드리며 주님을 위해 헌신하기로 다짐하는 모든 성도님들 가정에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서로 축복해주실까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성도가 되십시오.”


사도 바울은 정말 훌륭한 성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과 사역은 우리에게 아주 귀한 모범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다른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하지 않으셨을 텐데”라고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바나바와 다툰 사건은 어떻습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아 첫 번째 세계선교여행을 갈 때는 마가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끝까지 함께하지 못하고 도중에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버렸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세계선교여행을 떠날 때는 바울이 마가를 데리고 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데리고 가려고 했습니다. 이 일로 두 사람은 크게 다투고 결국 갈라서고 말았지요. 사도행전 15:37-39a입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여러분 생각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 것 같습니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대제사장 집에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도 고기를 잡으려고 갈릴리로 갔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가서 다시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라면 마가를 용서하고 다시 데리고 가시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이점에서는 바울이 예수님과 똑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입니다. 바울은 정말 위대한 사도로서 훌륭한 신앙의 본을 보여줬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똑 같이 행동하지는 못한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자세도 예수님과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자세를 잘 보여주는 성경을 한 곳 봉독해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9:16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자세 속에는 피할 수 없는 사명감 때문에 전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특히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마음 한구석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바울이 복음을 전한 근본적인 이유가 화를 당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사랑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13-14a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바울은 정말 남들이 보기에 미친 사람처럼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마음 한구석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이라는 두려움도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마음이 있으셨을까요? 없으셨습니다. 여러분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요한일서 4:18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온전한 사랑을 나누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두려운 마음으로 사역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이점도 바울과 예수님의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까?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38입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그리고 예수님은 백성을 사랑하셔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36절입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그러니까 바울이 예수님처럼 사역하지 못한 모습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일한 것입니다. 그래서 벌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일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일한 것입니다. 바울은 동역자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가를 용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물론 바울도 나중에는 마가를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백성을 완전히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백성에 대한 온전한 사랑으로 일한 게 아니라 두려움과 사명감으로 일한 경우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바울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부족한 것은 예수님보다 부족한 것이지 우리보다 부족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울은 우리보다 월등히 뛰어납니다. 만일 우리가 바울의 1/10만 따라간다고 해도 얼마나 훌륭한 신앙인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바울을 비난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훌륭한 바울마저도 따라갈 수 없는 예수님의 온전하신 모습을 바라보며 올바른 믿음과 헌신의 자세를 배우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할 모습이 뭡니까? 사랑이지요. 바울이 예수님처럼 살지 못한 것은 예수님 같은 사랑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예수님보다 못했기 때문에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동역자를 사랑하는 모습이 예수님보다 못했습니다. 그리고 백성을 사랑하는 모습도 예수님보다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족한 모습이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야 합니다. 사실 바울도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1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바울은 철저히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자기를 본받으라고 하는 것도 자기처럼 예수님을 본받으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위대한 성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면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성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야 하는데 오늘 본문이 예수님의 사랑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먼저 본문은 예수님이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잘 보여줍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심장, 간, 허파 같은 사람의 내부기관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온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사람의 속 깊은 곳에서 겪는 진짜 슬픔과 아픔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애간장이 타는 슬픔 혹은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흔히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이라고 해서 단장지애라는 말을 사용하지요. 그런데 이 말이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아십니까? 중국 진(晋)나라 제후인 환공이 강길을 따라 유람에 나섰는데 유람 중에 하인 하나가 원숭이 새끼를 한 마리 잡아왔습니다. 그러자 어미가 구슬피 울면서 무려 100여 리를 따라 왔습니다. 그러다가 도저히 자기 새끼를 구할 길이 없으니까 뱃전에 머리를 들이받으며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왜 어미가 갑자기 죽었는지 궁금해서 어미의 배를 갈라보니까 창자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습니다. 어미는 새끼를 잃고 너무 괴로워서 창자가 다 끊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큰 슬픔을 단장지애(斷腸之哀)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리하는 백성을 보고 이런 아픔과 슬픔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잘 맞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사탄에게 사로잡혀 멸망의 길을 가는 것을 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자식 뺏긴 부모의 마음과 얼마나 비슷합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구원받지 못한 인생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백성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렇게 백성을 불쌍히 여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백성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어떤 일꾼을 원하신 걸까요? 예수님처럼 백성의 구원을 위해 헌신할 일꾼이지요. 예수님처럼 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의 마음으로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배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최선을 다해 백성을 돌봐야 합니다. 이게 바로 복음으로 세상을 섬기는 것이고 달란트와 은사로 세상을 섬기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백성을 향한 이런 사랑의 마음이 어디서 올까요? 하나님의 마음에서 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백성을 구하기 위해 독생자까지 내주신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백성을 예수님처럼 사랑하려면 하나님이 백성을 사랑하시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나도 하나님처럼 원하게 되어야 하나님처럼 백성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세상 사람들만 바라보면 그들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우리에게 못되게 굴었고 다른 사람에게도 못된 짓을 많이 했는데 그들만 바라보며 그들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사랑해야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정말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여러분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여러분은 죄책감에서 온전한 자유와 평안을 얻으셨습니까? 죄 때문에 벌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기쁨이 충만합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에게 항상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내가 어떤 일을 만나도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그 동안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을 떠날 때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세상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단장지애의 사랑을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제직헌신예배를 드립니다. 우리가 정말 이 시간 하나님께 우리의 몸과 마음을 바쳐 헌신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결단합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불쌍해서 견딜 수 없는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섬긴 참된 종들은 모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것입니다. 사도행전 21:13입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바울은 백성을 위해서도 자기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을 뻔했지만 얼마 후에 다시 루스드라에 가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이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백성들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백성들은 예레미야가 전하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레미야를 박해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음이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20:9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왜 예레미야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았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가 말씀 전하기를 싫어한 것은 인간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견딜 수 없어서 다시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도저히 가만히 있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는 게 참된 사역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이렇게 뜨거운 열정으로 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게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열심히 일한다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으로 일해야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해야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목사이며 찬송가 작가인 보너에게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하루는 보너가 꿈을 꿨는데 천사가 보너의 신앙의 열심을 저울로 달아보고 있었습니다. 천사는 보너에게 신앙의 열심히 아주 무게가 많이 나간다고 말해줬습니다. 보너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계속해서 뭔가 분석하며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계산이 끝난 후에 천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의 열심은 모두 100파운드가 나가는데 그 내용을 분석해보니까 이기심 때문에 나타난 열심이 14파운드, 파당적인 열심이 15파운드, 명예욕 때문에 나타한 열심이 22파운드, 사람을 위해서 일한 열심이 23파운드,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해서 나타난 열심은 단지 26파운드였다.” 보너는 놀라서 꿈에서 깼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다고 했지만 그 헌신의 74%는 인간적인 욕심과 감정 때문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깊이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든지, 어려운 이웃을 돕든지, 혹은 교회 안에서 여러 부서의 사역을 감당하든지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이 했는지를 보시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받은 달란트에 따라 업적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아니 모든 업적은 사실 하나님이 이루어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업적을 크게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억지로 일한다면 참 불행한 일입니다. 벌 받을까봐 두려워서 일해도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의 명예를 위해서 일해도 불행한 일입니다. 남보다 더 잘했다는 말을 들으려고 일해도 불행한 일입니다. 물론 그런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열매를 맺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일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얼마나 일을 잘하느냐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기쁨이 넘치는 마음, 두려움 없이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열정적인 마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의 수많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들이 죄악 속에서 비참하게 살다가 지옥으로 가는 것을 바라보며 안타까워 견디지 못하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의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복음과 달란트와 은사로 섬기는 것은 저절로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 좋은 열매를 맺고 우리 모두가 큰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일꾼이 오면 서로 경쟁하고 다투겠습니까? 서로 정죄하겠습니까? 아니지요. 서로 포용하고 협력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겠지요. 이점에서는 그 위대한 바울도 충분히 잘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서로 용납하고 사랑하며 함께 교회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가 행복해지고 좋은 열매도 풍성히 맺게 될 것입니다.

오래 전에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농촌교회에 가서 목회를 했습니다. 이분은 서울에서도 지식인들과 함께 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농촌교회에 갔더니 교인들이 예배시간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늘 지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목사님은 몹시 마음이 상했습니다. 아무리 가르쳐도 교인들은 지각했습니다. 정말 목사님은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고 싶었지만 교인들의 지각 때문에 잘 되지 않아서 몹시 마음이 상했습니다. 교인들을 원망하는 마음까지 생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인들이 변명을 했습니다. 주일날 밭에 나가 일하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서 자꾸 지각한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그 말을 들으니 조금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물론 성도들이 주일날 밭일을 하지 않으면 더 좋겠지만 아직 그 정도로 믿음이 자라지 않았으니 어떻게 합니까. 목사님은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종을 칠 테니까 종소리를 듣고 오면 어떻겠느냐고 했습니다. 교인들은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종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모이기를 기다려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예배 지각자가 훨씬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아마 우리에게도 이와 비슷하게 각자 습관이 되어 고치지 못하는 부족한 모습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할 수 있는 대로 부족한 모습을 고쳐가야겠지만 부족한 모습이 남아있는 동안에는 어떻게 합니까?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받아줘야지요. 기준을 낮추고 용납하며 함께 협력해야지요. 그렇다고 부족한 모습을 마냥 그대로 둘 수도 없습니다. 잘못된 모습은 고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못된 모습을 정죄하지 않고 용납하면서도 부단히 그것을 고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모두가 서로 용납하면서도 함께 발전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금년 한 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면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사랑하며 진심으로 세상의 구원을 위해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부족한 모습이 있고 다른 성도에게 잘못된 모습이 있어도 그게 바로 내가 져야 할 십자가라고 생각하며 사랑으로 참고 포용하며 서로 협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금년 한 해 우리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고 우리와 우리 이웃이 함께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게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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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9:35-38 예수님의 마음으로 섬깁시다 /오덕호 마9:35-38 예수님의 마음으로 섬깁시다 /오덕호 Reviewed by □□□ on January 05, 2026 Rating: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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