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22:1-2 언제까지 세상에 파묻혀 살 건가요? /야베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져요. 나는 세상에서 가장 예뻐요. 그대는 세상에서 가장 멋져요. 그대는 세상에서 가장 예뻐요. 아싸! 감동 충만, 아싸! 성령 충만, 아싸! 행복 충만. 축복의 주인공이 됩시다. 축복의 통로가 됩시다. 축복의 근원이 됩시다.

어느 시골 할아버지가 난생 처음 서울에 갔습니다. 서울에 가서 이것저것 구경하는데 너무 좋고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큰 백화점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저기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신기한 것이 있었습니다. 네모난 방이 있는데 등이 꼬부라진 할머니가 오셔서 뭔가 벽을 누르니까 문이 스스르 열렸습니다. 할머니가 들어가더니 숫자가 올라가다가 멈추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숫자가 내려오더니 문이 스스르 열리는 것입니다. 문이 스스르 열리더니 세상에 20대 예쁜 아가씨가 쏙 나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할아버지가 숨이 넘어가는 소리로 아들을 급하게 불렀습니다. “애야. 애야. 빨리 네 어머니 데려 온나. 빨리 데려 온나!” 하면서 다그치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들이 “왜 그래요?”라고 물었습니다. “넌, 모른다. 넌 모른다. 빨리 네 어머니 데려 온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할아버지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아십니까? 세상에는 이런 일은 없습니다.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에는 안 되는 일, 일어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천국에 소망을 두는 사람에게는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천국에 가면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20대 팔팔한 청년들로 변화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불가능한 일들로 가득 차 있지만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번 크게 웃으면서 시작합니다. 하하하하! 호호호호! 헤헤헤헤! 다시 한번 더 크게 웃어봅시다. 하하하하! 호호호호! 헤헤헤헤!

꿈을 가진 사람, 비전의 사람은 쉽게 자신의 비전과 꿈을 실현해 나갈 수 있을까요? 아니면 많은 시련과 역경을 견디면서 비전을 실현해 나갈까요? 이스라엘 나라를 위하여 비전을 가진 사람, 꿈을 가진 사람, 다윗은 어떻게 그 비전을 이루어갈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위하여 꿈과 비전을 가지고 있나요? 가지고 있다면 어떤 비전을 갖고 있나요? 그 비전을 이루어가기 위해서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요?

이스라엘의 사울 왕은 새롭게 나타난 정치적인 대적 다윗 때문에 골머리를 앓게 됩니다.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온 다윗을 향하여 이스라엘 여인들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면서 대대적으로 다윗을 추앙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울 왕은 이스라엘 왕으로서 왕권 유지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백성들이 다윗에게로 마음이 쏠리고 있음을 직감하게 됩니다. 다윗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의 왕권에 크나큰 위기가 몰려올 것이라고 예감합니다. 위기감을 절감하여 반드시 다윗을 죽여야 자신도 살고, 가문도 살리고, 나라도 구하겠구나 하는 사명감을 가지게 됩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자신이 악신에 걸렸을 때 다윗이 수금을 타면서 찬양하여 악신이 떠납니다. 자신을 위하여 찬양하는 다윗을 직접 죽이기 위하여 단창을 던지기도 합니다. 사울 왕이 단창을 던지자 다윗은 겨우 피하여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자기 딸과 결혼시키면서 블레셋 군사의 100명의 목숨을 거두어오라고 하면서 블레셋 군사를 이용하여 죽이려 합니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 100명이 아니라 200명의 목숨을 거두어다가 사울 왕의 사위가 됩니다.

사울 왕이 사위가 되었는데 계속 자신을 죽이려 하자 다윗은 사울 왕이 반드시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끼고 사울 왕을 떠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요나단과 미갈의 도움으로 라마 나욧으로 도망가서 사무엘 선지자를 만납니다. 다시 놉으로 가서 대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납니다. 다시 블레셋 땅 가드로 넘어갑니다. 가드에 가면 블레셋 땅이기 때문에 사울 왕이 자신을 더 이상 추격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블레셋 땅으로 갑니다.

그러자 블레셋 군사들이 다윗에게 “저 사람은 우리의 영웅 골리앗을 죽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하면서 추앙하는 바로 그 왕이 아닙니까? 어찌 그가 여기 블레셋에 왔는가” 하면서 다윗을 알아봅니다. 그 말을 들은 다윗은 침을 질질 흘리면서 미치광이로 변장합니다. 미치광이로 변장한 다윗을 가드 왕 아기스는 크게 분노하면서 다윗을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가드 땅에서 미치광이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가드 땅에서 미치광이로 살다가 가드 땅을 떠나서 다시 유대 땅 아둘람 동굴로 피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떠나 아둘람의 어느 동굴까지 오는 여정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길입니다. 자신이 거주하던 곳을 떠나야만 아둘람까지 올 수 있습니다. 1절에 보면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드 땅을 떠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① 이스라엘에는 사울 왕이 자신을 죽이려 혈안이 되어 있고, 사울 왕이 보낸 첩자들이 쫙 깔려 있는 상황입니다. 언제 발각되어 붙잡혀서 죽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② 힘들어도 미치광이로 살면 생명이 안전합니다. 정치인들은 미치광이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의 아버지는 흥선대원군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왕족으로서 모든 면에 뛰어난 문필가, 지략가, 전략가입니다. 그래서 그를 경계하는 정치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미치광이처럼 사는 방법을 택합니다. 한량이요 미치광이처럼 삽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흥선대원군은 어리석은 미천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아들을 왕으로 옹립해도 대원군이라는 자리에서 권세를 부리지 못할 것이라고 착각하여 흥선대원군의 작은 아들을 왕으로 옹립합니다. 하지만 어린 아들이 왕으로 옹립되자마자 흥선대원군은 권세를 휘두르기 시작하여 수많은 정적들을 죽이게 됩니다. 이처럼 정치인들은 미치광이에게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니 가드 땅에서 미치광이처럼 사는 것이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는 데 안전합니다. 그래서 가드 땅을 떠날 수 없습니다.

③ 아둘람 동굴도 안전한 처소가 될 수 없습니다. 이미 아둘람에도 사울의 첩자들이 있습니다. 아둘람 지역은 밀림 지역이 아니라 민둥산과 광야 지역입니다. 그러니 전국에 쫙 깔려 있는 사울의 군사들에게 금방 발각되어 죽을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 아둘람입니다. 그러니 가드 땅을 떠나서 아둘람으로 가는 것도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④ 미치광이 노릇하면서 사는 편이 훨씬 편하고 즐겁고 재미있습니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대로 살 수 있어서 좋습니다. 간혹 정신 나간 사람들을 보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그들은 걱정이 없습니다. 염려도 없습니다. 세상이 자기들 세상입니다. 얼마나 편하고 좋고 행복한지 모릅니다. 있으면 먹고 아무 데서라도 자고 싸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대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드 땅에서 미치광이처럼 살면 만사가 좋습니다. 이 좋은 것을 그냥 놔두고 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유대 땅으로 가겠습니까? 갈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현실의 삶 자체도 결코 평안하지도 않은데도 거기에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현실의 삶에서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땅에는 사울 왕이 보낸 첩자들로 가득 차 있고, 가드 땅의 아기스 왕은 자신을 미치광이로 취급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신경 쓰지 않아서 자신을 은폐시키기에는 안성맞춤입니다. 사울 왕의 손에서 잠시나마 피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길은 블레셋 땅에 미치광이로 머무는 것이 유대 땅으로 들어가서 두려움 속에 사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사울 왕이 죽을 때까지 가드 땅에 머물고 싶습니다. 사울 왕이 죽은 다음에 돌아와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사무엘 선지자에게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비록 몸은 블레셋 땅에서 은신하고 있어도 언젠가는 이스라엘로 돌아가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백성들을 통치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가드를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 조금만 더 가드 땅에서 은신하고 있다가 사울 왕이 죽은 다음에 이스라엘로 돌아가도록 허락해 주시면 안 되나요?” 사명자도 때로는 하나님의 생각, 계획보다는 자기 생각, 계획을 앞세울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안위를 우선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이고, 기름 부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명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이루어가기 위해서 안전한 땅, 가드 땅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생명의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 유대 땅, 사울 왕의 살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땅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합니다. 가드 땅을 떠나는 것은 많은 위험이 뒤따르는 일입니다. 많은 위험이 뒤따르더라도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백성들을 통치하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기로 결심합니다. 사울 왕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백성들과 함께 고난당하기로 결심합니다.

비전은 떠나는 것입니다. 사명은 떠나는 것입니다. 비전의 사람, 사명의 사람은 안주의 세상을 떠나 위험과 고난이 있는 장소로 떠나는 사람입니다. 비전의 사람은 이 세상에 안주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비전의 사람은 죄악 된 세상, 안주할 수 있는 세상을 떠나서 비전의 세계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가드 땅에 머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가드 땅은 죄악 된 세상이고, 이스라엘의 원수의 땅입니다. 가드 땅은 육신의 안주는 가능한 곳이지만 영적으로 안주할 수 없는 곳입니다. 비록 육신의 고난과 위험을 당할지라도 영이 안주할 수 있는 곳은 이스라엘 지역입니다. 육신의 위험을 당하는 지역이지만 영적으로 안식할 수 있는 곳은 이스라엘 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가드 땅에서 미치광이처럼 살면서 육신의 안전은 찾을 수 있지만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비전을 가진 사람으로 합당치 않은 곳으로 깨닫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아둘람 동굴도 결코 안전한 처소는 될 수 없는 곳이지만 아둘람 동굴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이스라엘의 영적인 회복을 위해서 꿈을 꿀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주십니다.

비전의 사람은 육신의 안정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비전의 사람은 영적인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비전의 사람은 죄악 된 세상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 아니라 기꺼이 고난의 길, 위험의 길을 선택하여 떠나는 사람입니다.

가드 땅에서 생명의 안전을 버리고 언제 어디서나 항상 사울 왕의 살기등등한 살인 위험과 고난을 받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유대 땅으로 돌아오려고 하는 다윗에게 하나님은 축복으로 인도하십니다. 어떤 축복을 받을까요?

① 아둘람 동굴을 예비해 주십니다. 아둘람은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꿈을 꾸게 하는 장소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아둘람이 없었다면 하나님을 위해서, 이스라엘 나라를 위해서 새로운 꿈을 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앞으로 이스라엘 나라의 왕으로서의 비전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하여 아둘람을 예비해 주신 것입니다.

② 사울 왕에게 위협을 당하고 있는 부모 형제들, 일가들이 모여들게 됩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여야 된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이미 베들레헴에는 사울의 군사들이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다윗의 형들조차도 죽음의 위협을 당하게 됩니다. 다윗의 일가 사람들도 똑같은 위협을 당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미 베들레헴을 떠나 떠돌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떠돌이하던 이들이 다윗과 연락이 되어 아둘람 동굴로 모여들게 됩니다.

③ 환난 당하는 사람들, 빚에 억눌린 사람들, 사울 왕으로 인하여 마음에 원통함을 품은 모든 사람들이 아둘람 동굴로 모여들어 400여 명의 무리들이 모여들게 됩니다. 400여 명의 사람들은 칼을 쓰고, 활을 사용할 줄 아는 군사들입니다. 식구들까지 합치면 전체적으로는 약 2000-3000여 명의 무리들입니다.

④ 비로소 다윗의 군대가 탄생하게 되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는 기본적인 초석이 마련됩니다. 이들은 사회에서 버림당한 자, 외면당하는 자, 별 볼 일 없는 사람입니다. 사회적으로 문제아입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비전의 사람 다윗을 만나서 이스라엘의 중요한 사람들로 변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서 삶이 달라집니다. 이들이 다윗을 만나기 전에는 부랑자입니다. 노숙자들입니다. 깡패들입니다. 산적들입니다. 노략꾼들입니다. 그런데 비전의 사람, 사명의 사람 다윗을 만나서 개과천선하게 됩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다윗 왕국이 형성되어 갑니다. 이들 중에서 요압, 아비새, 아마사, 33인, 대제사장, 선지자와 같은 다윗의 충신들이 나옵니다. 이들이 다윗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군사들이 됩니다. 다윗은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시작합니다. 비전의 사람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7)” 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축복입니다. 그 고난이 전화위복이 되어 찾아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고난을 당하지 않았다면 더욱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믿음의 왕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사울 왕이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서 자신을 쫓아다님으로써 더욱더 하나님만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의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윗에게는 고난이 축복입니다. 고난을 당함으로써 더욱더 하나님 앞에서 오뚝이처럼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오뚝이는 발로 뻥하고 차면 때굴때굴 굴러가서 그대로 온전하게 서 있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발로 뻥하고 차면 다윗은 이리저리로 때굴때굴 굴러다니다가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비전의 사람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비전을 성취하기 위하여 안주할 수 있는 세상에서 떠나 고난의 길, 위험의 길로 떠납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디에서 떠나야 할까요? 우리들에게 있어서 죄악 된 세상은 어디일까요? 지금 안주할 수 있는 세상, 죄악에 빠질 수 있는 세상은 어디일까요? 거기를 떠나야 합니다. 거기를 떠나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아둘람으로 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곳을 떠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특히 경제적인 이유가 너무 강하여 거기에서 살아야 합니다. 거기를 떠나버리면 살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거기에 내 삶의 모든 것이 걸려 있습니다. 삶의 행복과 재미가 거기에 있습니다. 거기를 떠나버리면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오늘날처럼 온 산이 울긋불긋 단풍으로 바다 물결을 이루고 있는데 거기에 있어서 단풍 구경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를 떠나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곳으로 가야 합니다. 바로 주님의 몸 된 교회로 가야 합니다. 예배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기도의 아둘람 동굴로 가야 합니다.

가드에서 육신의 안주를 원하는 다윗에게 감동을 주셔서 떠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찾아오셔서 떠날 수 있도록 감동을 주십니다. 결코 다윗에게 가드 땅이 육신의 안주할 수 있는 곳이 될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들이 안주하려고 하는 그곳이 결코 안주할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진정으로 안주할 수 있는 곳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떠나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 품에 안길 때라는 믿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주하려고 하던 그곳이 결코 안주할 수 없는 곳이라는 깨달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품 안으로 돌아오는 길만이 진정으로 안주할 수 있는 곳이라는 확신을 주십니다. 세상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비전을 갖고 살려고 하는 사람은 세상에 파묻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고난과 위험의 길이라 해도 하나님의 품 안이 가장 안식할 수 있는 안주의 처소가 되게 하십니다. 비전의 사람, 사명의 사람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서 영적으로 안식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비전의 사람이며 사명의 사람입니다.

다윗이 여전히 자신의 생각과 판단대로 가드 땅에서 미치광이로 머물러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미치광이로 변장하여 살다 보면 진짜 미치광이가 될 수 있습니다. 드라마에 이혼하는 역을 많이 하는 배우는 이혼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술주정뱅이 역을 많이 하는 배우는 술주정뱅이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살하는 역을 많이 하는 배우는 자살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다윗이 가드 땅에서 미치광이 역할을 많이 하면 진짜로 미치광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미치광이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울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미치광이를 자신들의 왕으로 세울 수는 없습니다.

요즘 정부의 장관이나 총리 등 대통령이 임명하려고 해도 국회에서 인사청문회를 통해서 그 사람의 과거를 낱낱이 파헤치지 않습니까? 과거 행적을 파헤쳐서 장관이나 총리가 될 수 없도록 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젊었을 때, 군대 생활 할 때, 초임 직장 생활 할 때, 심지어는 중고등학교 생활 기록까지 들추어내지 않습니까? 몇십 년 전 진료 카드에서부터 밝혀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것처럼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고 할 때 모든 사람들이 다윗의 편에 서 있는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분명히 다윗을 싫어하는 반대파도 있게 마련입니다.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다윗의 과거 행적을 파헤쳐서 블레셋 땅에서의 삶을 드러낸다면 어떻게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적잖은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윗이 유대 땅으로 돌아오지 않고 여전히 블레셋 땅에서 미치광이 노릇하면서 살았다면 다윗은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은 사명자, 비전의 사람으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항상 생명의 위험이 뒤따른다 해도 가드 땅을 떠나서 유대 땅으로 건너와야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은 사명을, 비전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세움을 받는 것입니다. 비전의 사람이 떠나야 할 곳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 머물러 있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올바로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비전의 사람, 사명의 사람은 안주의 자리에서 떠날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비전을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감당하기 위하여 육신이 안주할 수 있는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곳, 예배의 자리로 나아갈 때 축복하십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아둘람 동굴, 새로운 꿈과 비전을 가질 수 있는 아둘람 동굴로 피할 때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① 자신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비전의 사람이라는 확신을 주십니다.

② 자신은 세상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될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십니다.

③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붙여주십니다. 다윗에게 다윗 왕국의 기초를 쌓을 수 있는 사람들을 붙여주신 것처럼 하나님을 위해서 동역할 수 있는 사람들을 붙여주십니다.

④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사람들과 함께 필요한 물질과 건강도 겸하여 허락해 주십니다. 사람에게 권력도 있고, 물질도 있고, 명예도 있습니다. 사람을 얻으면 이 모든 것들을 겸하여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 비전을 가지고 도전하는 사람에게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받는 사람은 두려움, 무서움, 염려와 걱정을 당당하게 이겨낼 수 있습니다. 비전은 모든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강력한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비전은 칠전팔기의 원동력을 주십니다. 칠전팔기(七顷八起)가 무엇이죠? 일곱 번 쓰러져도 다시 여덟 번째 일어선다는 뜻입니다. 싸움에도 일곱 번 져도 여덟 번째 승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 힘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전의 사람은 전도에 매진하는 사람입니다. 전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을 발견하고 그 계획과 비전을 성취해 나가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비전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바라보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일을 즐겨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일은 바로 귀한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그 일이 바로 전도입니다.

시편 57편은 다윗이 아둘람 동굴에 숨어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쓴 시입니다. 장차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 나라를 위하여 어떻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설 것인가를 그리면서 쓴 시입니다. 6-11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중에 빠졌도다 (셀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비전의 사람은 하나님을 향하여 뜻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비전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성취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찬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비전의 사람은 고요한 새벽 시간을 깨우는 사람입니다. 비전의 사람은 새롭게 진행될 새벽을 기대하는 사람입니다. 비전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비전의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을 헌신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비전의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이 안주할 수 있는 삶을 떠나 고난과 역경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비전의 사람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찾아오시고 만나주시고 역사해 주시고 감동을 주십니다. 비전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세계, 개척되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원대한 꿈과 야망을 심어주십니다. 비전의 사람은 결코 주눅 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 산성교회 성도들은 비전의 사람입니다. 비록 작은 개척 교회 성도들이지만 하나님을 향한 비전을 가진 사람, 꿈을 가진 사람, 사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이루어가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비전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주시는 축복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축복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축복을 넘치게 받는 우리 산성교회 성도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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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22:1-2 언제까지 세상에 파묻혀 살 건가요? /야베스 삼상22:1-2 언제까지 세상에 파묻혀 살 건가요? /야베스 Reviewed by □□□ on October 21, 2026 Rating: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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