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3:1-12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주승중

여러분은 신발을 몇 개나 가지고 있습니까? 저는 미국에서 공부를 할 때에 주로 Buy one, get one free할 때 신발을 샀는데, 두 켤레를 사면 두 번째 것은 공짜로 준다는 유혹에 넘어가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데 신발을 사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년 동안 한 번도 안 신는 신발도 있습니다. 20년 전에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의 부인이었던 이멜다라고 하는 여자가 권력에서 쫓겨나고, 민중들이 필리핀 대통령궁에 들어갔을 때, 이멜다가 모아놓은 신발이 천 켤레가 넘었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녀에게 신발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신발이 무슨 의미가 있길래 그녀는 그렇게도 많은 신발을 사서 모은 것일까요? 힘과 권력의 과시용이었을까요?

물론 신발은 때로 그 사람의 신분과 권력 혹은 힘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동화 신데렐라 이야기에도 보면, 유리 신발이야기가 나오지요. 마술로 공주로 변신한 신데렐라가 예쁜 공주의 옷을 입고, 유리 신발을 신고 왕궁에 들어가 왕자님하고 춤을 추다가, 그만 다시 변신하는 시간이 되어 정신없이 뛰어나오다 유리 신발을 하나 떨어뜨리게 되지요. 그리고 왕자님은 그 신발을 통해서 마침내 그 신발의 주인공인 신데렐라를 찾게 되지요. 그리고 두 사람이 행복하게 살았다하는 내용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데렐라가 신고 있던 그 유리 신발, 그것은 신데렐라를 찾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그녀의 신분을 나타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2. 본문의 배경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도 보면 이 신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출애굽 사건을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소명의 순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애굽의 왕궁에서 왕자로 성장했던 모세는, 그 나이 40이 되어 그 형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볼 생각에 왕궁을 나섰다가, 그만 자기 형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핍박받는 것을 보고, 의분에 못 이겨 애굽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결국 그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미디안 광야로 도피를 하게 되었고, 거기서 미디안 사람 이드로의 딸들을 위험에서 구해준 인연으로 그의 사위가 됩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로부터 40년간을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돌보는 목동이 되어 살게 됩니다.

그렇게 4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 모세는 민족을 향해 끓었던 의분도 사라지고, 이제는 그저 평범한 시골의 목자가 되어 지내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이지요. 그리고 모세는 여느 날처럼 양떼를 몰고 가는 중에 호렙 산에 이르게 되었고, 거기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을 보게 됩니다. 아마도 모세가 그런 광경을 보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뜨겁고 건조한 날씨로 인해 광야에서 나무가 불타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날은 달랐습니다. 모세가 보니까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나무가 타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 날 모세가 본 것은 타지 않는 나무가 아니라, 태우지 않는 불이었습니다. 이렇게 나무를 태우지 않는 불을 보고 이상히 여겨 모세가 다가서자,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모세야,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 그리고 모세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신을 벗어야 했습니다.

3. 왜 신을 벗으라고 하셨나?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것은 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셨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사실 서양 사람들은 이 신을 벗는 행위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문화는 집안에서도 신발을 벗지 않고 사는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집안에 들어갈 때 신을 벗습니다. 집안은 더러운 바깥 세상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온갖 더러운 먼지와 심지어는 오물로 덮여 있는데, 그런 더러운 땅을 밝고 돌아다니던 신을 그대로 신고 들어오는 것은 우리 한국문화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제가 어릴 때 다녔던 예배당은 신을 벗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어릴 때의 기억이지만 저는 그 때 예배당에 들어갈 때마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들어가면서, 성전이 무엇인가 다른 곳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어린 마음이었는데도 예배당 안은 무엇인가 신비하고 거룩한 곳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교인들은 예배당 안에 들어가도 그곳이 무엇인가 다르다고 하는 느낌을 별로 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오늘 우리들이 신발을 신고 예배당에 들어오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릴 때, 신을 벗고 들어간 예배당은 쉽게 나오게 되지 않았습니다. 일단 신을 벗으니까 내가 성전에 붙잡힌 느낌이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내가 하나님의 품 안에 안겨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오늘 신자들이 성전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지 못하고, 하나님 품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지 못하고 세상으로 자주 들락거리는 것도 성전에서 신을 신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상식적으로 신을 벗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바깥에서 상황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상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즉 신을 신고 있다는 것은 바깥에서 상황을 살피는 자세이지만, 신을 벗는다는 것은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까? 결국 이 말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비추어 말하자면, 신을 벗으라는 것은 신을 신고 바깥에서 하나님을 살필 것이 아니라, 신을 벗고 당신 안에 들어와서 당신의 임재를 느끼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하나님의 거룩한 장소라고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예배당 안에서도 이런 저런 세상의 신을 신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리고 그 신을 신고 계속해서 교회와 바깥 세상을 너무나도 쉽게 드나들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왜 모세의 신을 벗기셨을까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모세의 신을 벗기신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는 거룩한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모세를 부르사 새로운 사명을 주고자 하십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 9-12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에서 종살이 하면서 고통 받고 있던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해낼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하나님께서는 그 대업을 모세에게 맡기시면서, 더 튼튼하고, 더 좋은 신을 신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가 신고 있는 신마저 벗기셨습니다. 그가 그 동안 미디안 광야를 다니면서 신고 있던 신을 벗기셨습니다. 모세는 지금까지 그 신만 있으면 광야 어디든지 갈 수 있었습니다. 그 신을 신고 사막 한 가운데도 갈 수 있었고, 험한 산도 양 떼들을 이끌고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신은 모세로 하여금 그가 어디를 가든지 그의 발이 아프지 않게 발을 감싸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고, 그로 하여금 세상의 이곳 저곳을 다시면서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고, 그가 험하고 높은 산을 올라갈 때 넘어지지 않게 그의 발을 지탱해 주는 것이었고, 그가 사막을 걸어갈 때 뜨거운 사막의 열기로부터 그의 발을 보호해주는 것으로서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중요한 삶의 도구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신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자기 의지이며, 자기 경험이고, 자기 지식이고, 자기 철학을 의미합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모세는 지금까지 그 신만 있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신을 신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전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모세는 세상에 돌아다니던 더러운 신을 신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는 그런 신으로는 안 되겠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문안교회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는 이런 저런 신을 신었다는 이유로 너무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았습니까? 그동안 신이 좋으면 못 갈대가 없다고 장담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신고 있는 신은 경험의 신이요, 지식의 신이요, 부의 신이요, 권력의 신이요, 힘의 신이기 때문에 내가 못 갈 데가 없다고 자만해 하며, 그 신을 신고 가서는 안 될 곳을 가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오늘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장소인 교회 안에서는 그런 세상의 신을, 그런 오만의 신을 벗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신을 벗기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교회에서는 우리 모두 신을 벗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우리는 모두 신을 벗고 맨발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신을 벗기는 곳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모두가 다 자기 신발, 즉 자기 주장을, 자신의 권리를, 자기의 논리를 벗어야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자기 신을 그대로 신은 채로 교회에 들어온다면, 바로 그것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한국교회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은 성도들뿐만 아니라, 목회자들도 계속해서 이런 저런 신을 신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목회의 현장에서 목회에 성공해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계속해서 이런 저런 목회적인 기술의 신발과 프로그램의 신발을 신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제 친구 목사가 저에게 이런 경험을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그가 섬기는 교회에 두 분이 책을 팔려고 왔는데, 한 분은 가지고 온 책을 번역하는데 동참했던 목사님이었고, 또 한 분은 장로님이었는데, 그 번역된 책을 출판하는 책임을 맡은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 친구 목사는 그분들이 소개한 책을 보고는 “죄송하지만 사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답니다. 그가 왜 그 책을 사지 못하겠다고 했느냐 하면, “그 책이 너무 좋아서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보니까, 그 책이 설교준비를 하면서 거쳐야 할 과정을 다 만들어 놓은 아주 좋은 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친구목사가 그 책을 보면, 설교 준비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시간이 줄어들 것 같아서, 즉 자신이 먼저 맨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분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줄어들 것 같아서, 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설교를 준비하는데 시간도 줄일 수 있고, 좋은 메시지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참 좋은 책인데” 하는 생각에 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 친구 목사로 하여금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지 못하게 하는 좋은 신발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책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하기를 목회 현장에서 보니까 맨발로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도록 하는 좋은 신발과 같은 목회 프로그램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오늘 한국교회에는 목회자들을 위한 무슨 세미나, 무슨 세미나 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21세기 부흥의 폭풍을 몰고 올 목양 컨퍼런스” “두 날개로 날아오르는 교회” “성령 치유 컨퍼런스” “위대한 설교 컨퍼런스” 등 많은 세미나들이 열립니다. 그리고 그런 세미나에는 수천 명의 목회자들이 구름 떼같이 몰려듭니다. 맨발이 되어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보다는 남들이 만들어 놓은 좋은 목회 프로그램이라는 신을 찾는 수 많은 목회자들의 모습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런 프로그램도 좋지만, 그것보다 정말 목회자들이 소명을 받은 자들로서 목회사역을 온전히 감당하려면, 내가 먼저 맨발이 되어 주님 앞에 나아가 그 분의 임재 속에 들어가야 하는데 말입니다.

아무튼 사랑하는 새문안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한국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을 벗어야 합니다. 한국교회 성도들과 저를 포함한 모든 목회자들도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어야 합니다.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신을 벗어야 합니다. 나를 자랑하고자하는 신을 벗어야 합니다. 교만의 신, 자기 자랑의 신, 권력의 신, 명예의 신, 욕망의 신 등을 벗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와는 정 반대의 신도 벗어야 합니다. 사실 모세는 40년 전의 실패로 말미암아 그 동안 40년을 그 실패의 쓰라림을 안고 살았습니다. 모세의 미디안 광야 40년간의 생활은 사실 절망과 좌절의 기간이었습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절망의 신, 좌절의 신, 열등감의 신, 그리고 광야에서의 고독의 신을 신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나친 자기비하의 신, 절망의 신, 고독의 신, 원망의 신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서는 다 벗어야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거룩한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때 아직도 이런 신을 신고 있지는 않습니까?

4.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우리가 그 신을 벗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신을 벗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사명을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신을 벗어 맨발이 된 모세에게 비로소 당신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11절에서 “내가 누구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사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자의 대답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모를 때에는 “나는 누구다” “나는 아무개다” “내가 누군데 감히...”라고 말하지만, 정말로 자신을 알게 되면 “내가 누구기에?”라고 말하게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모세는 40년 전에 자신이 힘 있는 자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힘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낼 줄로 알았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이 점에 대해서 분명히 성령의 감동으로 이렇게 설교한 바가 있습니다.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행 7:25). 그는 자신의 손으로,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낼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살인을 하고 광야로 도망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40년을 보냈습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12절에 보면 이렇게 “내가 누구이기에”라고 말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대답은 언뜻 보면 동문서답 같은데, 사실은 얼마나 의미 있는 대답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누구이기에?”라고 질문하는 모세에게, 그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 모세야, 너는 아무개다” “너는 나의 위대한 나의 종이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누굽니까?” 라는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얼마나 힘 있고, 똑똑한 사람인지를 확인시켜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모세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존재를 확인했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확인할 때입니다. 즉 사명자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새문안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교회에 나올 때마다 나를 확인할 것이 아니라, 날마다 순간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부족을 채워주시려고 임재하신 것이 아니라, 모세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임재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세를 묶어놓기 위해서 신을 벗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함께하심을 알게 하기 위해서 신고 있는 신, 세상의 신발을 벗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후에 모세가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40년을 광야 길을 행할 때, 그들의 신발이 해어지지 않은 경험(“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으며,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신 29:5)을 하게 된 것도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이후에 계속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새문안교회 성도 여러분,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심각한 문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가 교인들을 혼자 세상으로 내 보내고 있으니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제가 잘 아는 한 목사님께서 언젠가 제게 이런 경험을 이야기 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어떤 교회에 설교초청을 받아 갔는데, 그 교회 본당으로 올라가는 전면에 “오늘도 혼자 오셨습니까?”라는 글이 써진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답니다. 그 목사님은 그 플래카드를 보면서 “참 잔인하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오늘도 혼자 오셨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왜 전도해서 한 사람을 더 데리고 오지 못하고 너 혼자 왔느냐는 질문이지요. 가령 남편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여집사님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주일에 그 여집사님도 혼자 오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도 남편과 함께 와서 예배를 드리고 싶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주일 내내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정성을 들이고, 때로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그와 함께 교회에 가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그런데도 무슨 유세나 하듯이 그 인간이 주일이 되자 안가겠다고 버팁니다. 어떻게 합니까? 할 수 없이 그 여집사님은 눈물을 머금으면서 주일에 혼자 교회에 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녀가 교회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것이 “오늘도 혼자 오셨습니까?”라는 질문이라면, 이 얼마나 잔인한 내용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그 플래카드를 보면서 “나라면 저런 말은 써 붙이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그리고 꼭 써 붙여야 한다면 그는 이런 말을 써 붙이고 싶다고 했습니다.

“오늘도 혼자 가시렵니까?”

저는 그 말을 듣고 감탄을 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혼자 오는 것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 목사님 말대로 혼자 가는 것은 절대로 안 됩니다. 저는 목회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많은 주일에 이 교회, 저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예배를 마치면, 성전 입구에 서서 교인들과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그 때 마다 다시 성전으로 데리고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도저히 그 얼굴로는 가정과 세상으로 보낼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목사님과 인사하는 것도 피하여 도망가듯이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여러분, 예배드리러 혼자 오는 것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예배를 마치고 갈 때는 절대로 혼자 가서는 안 됩니다. 꼭 주님과 함께 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주일에 교인들이 혼자 오는 것이 싫으면 혼자 보내지 않으면 됩니다. 그들로 하여금 주님과 함께 성전을 나가게 한다면, 다음 주일에는 결코 혼자 오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은 교회가 교인들을 혼자 보냈기 때문에 그들은 늘 혼자 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목회는 “혼자 오지 말라”는 목회가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교인들로 하여금 혼자 오지 못하도록 온갖 스트레스를 주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 한국교회의 목회의 방향은 “혼자 가면 안 된다”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인구의 사분의 일이 넘는 수가 기독교인들인데, 세상은 이렇게 변화가 안 됩니까?

작년 10월에 우리는 모두 고 최진실 씨의 자살로 인하여 큰 충격을 받았는데, 왜 이렇게 수많은 교인들조차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런 비극적인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한국교회가 예배를 마치고 교인들을 혼자 보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이제 한국교회는 혼자 오는 교인들에 대해서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고 최진실 씨와 같이 혼자 쓸쓸히 돌아가는 교인들에 대해서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것이 한국교회가 진정 해야 할 일입니다. 주일에 교회는 왔는데, 예배는 드렸는데, 기도회에 참석을 하였는데, 목사님과 상담도 했는데, 그 예배에서, 그 기도회에서, 그 만남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경험하지 못하고 나간다면,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나간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손을 잡고 세상으로 나가지 못한다면, 그래서 그들이 고독과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최진실 씨처럼 더 이상 숨을 쉴 수가 없어,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그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입니까?

사랑하는 새문안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혹시 예배 후에 혼자 돌아가는 사람들의 행렬 속에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이 예배를 마쳤을 때, 여러분들의 얼굴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얼굴이라면, 오늘 아침 우리의 예배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어떻게 순서적인 의미로서의 예배가 끝났다고 그렇게 바로 나갈 수가 있습니까?

5. 나가는 말

그러므로 이제 우리들 가운데 더 이상 예배가 끝났다는 이유만으로 저 문을 곧바로 나가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이곳,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피 묻은 손으로 우리의 상하고 지칠 대로 지친 심령을 어루만져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이 예배의 자리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당신의 손을 내밀고 계시는 주님의 손을 다 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우리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나아올 때마다, 우리의 신을 하나씩 하나씩 벗으십시다. 우리의 교만의 신, 위선의 신, 불순종의 신, 자기 자랑의 신, 욕망의 신을 벗으십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신고 있는 절망의 신, 두려움의 신, 외로움의 신, 고독의 신이 있다면, 그것들도 주님 앞에 다 벗어 내려놓으십시다. 그리고 우리의 거룩한 성전에서 맨발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십시다. 이 소중한 예배의 현장에서 "내가 너와 함께 한다"고 내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주님의 음성이 들리십니까?

그러므로 이제 예배를 마치고 떠날 때에는 우리 모두, 주님의 이 약속의 말씀을 품고 주님과 함께 나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예배를 마치고 세상을 향해 나갈 때에는, 죽음이 우리를 공격하는 저 광야 같은 세상을 향해 나갈 때에는, 세상의 신들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예비해 주신 영원히 해어지지 않는 신을 신고 나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광야 같은 세상을 아무리 걸어도 해어지지 않는 신(신 29:5), 즉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친히 마련해 주신 평안의 복음의 신(엡 6:15)을 신고, 주님과 함께 걷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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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3:1-12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주승중 출3:1-12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주승중 Reviewed by □□□ on October 29, 2026 Rating: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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