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8:20-32 출애굽의 목적 /이장우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직 고난받는 애굽의 현실에서 탈출이 목적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미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대로 타국에서 객이 되어 400년 동안 그들을 섬기다가 그들을 징치하고 나서 그곳에서 나오리라고 창세기 15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언약을 따라 출애굽이 이루어지는데, 이 출애굽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20절에서도 “내 백성을 내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출애굽의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출애굽하여 나오는 백성들도 단지 자신의 구원이 목표이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최종의 목표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의 과정 속에서 어려움이 오면 당장 원망과 불평이 나오는 것은 자신의 구원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행복, 자신이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표로 설정이 되어 있기에 구원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이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제서야 인생이 제자리를 찾게 된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크고 절실한 문제는 섬길 자를 바르게 찾지 못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마땅히 섬겨야 할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서 피조물을 섬기고, 돈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모든 문제의 근원인 것입니다.

마땅히 섬겨야 할 분을 섬기고 그분의 지시를 따라 살아야 하는데 이것을 거부하고 자기 모두가 각자의 신으로 살아가고 있기에 모든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자기 배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자기 욕망을 따라 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허물과 죄로 죽은 자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의 노예로 사는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자기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김이 목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향이 바르게 설정이 되어 있지 않으면 자기 구원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김이 목표입니다. 그래서 출애굽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 12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에게 말할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출애굽을 하였어도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였을 때 이들은 멸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무엇을 위한 섬김이냐고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섬기면 이것저것을 주신다는 것 때문에 섬기게 되면 어떤 식이 되는가 하면 결국 하나님이 나의 구원을 주시는 종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애완용 동물이나 관상용 식물을 키우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까? 이들을 키우기 위하여 얼마나 정성을 다하여 돌봅니까? 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꾸미는데 애견 미용실이 있지 않습니까? 쓰다듬고 안고 함께 먹고 함께 자기까지 합니다. 동물이나 식물에게 하는 것의 절반이라고 자기 부모에게 하였다면 효자 났다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정성을 들이는 것은 동물이나 식물을 섬기기 위하여서 그렇게 합니까? 결코 아니지요. 결국은 나의 기쁨을 위하여서 하는 것입니다. 나의 기쁨을 위하여서 하기에 내 마음에 안 들면 그 대상을 바꾸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로서 마땅히 섬겨야 할 줄로 알고 섬기는 것입니까? 아니면 나의 기쁨을 위하여 섬기는 것입니까? 내가 이렇게 섬겨주어야 나에게 구원을 주고, 나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주기 때문에 섬기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도 주님을 제대로 섬긴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의 기쁨을 위하여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섬기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있을까 봐 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십일조 안 하고 주일성수 안 하면 그보다 더 큰 손해가 날까 봐 겁이 나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도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마치 호랑이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호랑이가 예뻐서 떡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이 살기 위하여 떡을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식의 제사들이 우리나라의 옛날이야기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어느 마을 뒷산의 동굴에 1년에 한 번씩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재앙이 임한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제물 중에서는 짐승만이 아니라 사람이 제물로 드려지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식의 섬김은 결국 자신의 작은 부분을 내어줌으로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지 참으로 섬기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의 하나님이 이러한 하나님으로 소개되어 버린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사람이 교회를 나간다, 예수를 믿는다, 그러면 항상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종교를 하나쯤 가지는 것은 괜찮지만 너무 깊이 빠지지는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종교를 하나쯤 가져도 된다는 말은 자기 위로나 어려울 때 의지할 힘이 되니 좋은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신에게 잘 보여서 재앙이 물러가면 그것도 괜찮은 장사라는 것이지요. 십일조 바치고 나의 재산이 보호된다는 확실한 보장만 된다면 십일조 정도야 못하겠습니까? 내 목숨이 보존된다는데 그래 떡 한 덩이 호랑이에게 못 던져주겠습니까? 이런 식의 하나님 섬김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시면 모세가 바로에게 네 번째 재앙을 내립니다. 우리 백성이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그러니 내보내라, 만약 거절하면 이번에는 파리 떼가 너와 네 신하와 네 집들에 가득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파리 떼는 단지 파리 정도가 아니라 세 번째 재앙의 이처럼 사람이나 짐승의 피까지 빨아먹는 그러한 곤충들로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곤충이 한두 마리가 아니라 떼를 지어서 몰려들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애굽과 하나님의 백성과 구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재앙까지는 구별시켰다는 말씀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함께 재앙이 닥친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네 번째 재앙부터 재앙을 받는 쪽과 받지 않는 쪽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여호와가 온 세상 중의 여호와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바로 왕이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것은 참으로 모세와 아론의 하나님이 참 능력의 하나님이시구나를 어느 정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 파리 재앙을 보고서 자신이 괴로울 뿐만 아니라 고센 지역에는 이 파리 재앙이 없으니 어느 정도 항복을 합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25절입니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단지 제사만 지내면 되지 않느냐, 그러니 3일 길을 가지 말고 이 땅에서 살면서 제사만 지내라는 것입니다. 삶의 원리, 방향, 가치관은 여전히 애굽 식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제사만 지내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의 주장입니다. 종교는 허용하지만 애굽을 떠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이 바로의 주장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주장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이 세상의 원리와 방법을 따라 살아가는데 일주일에 한 번 예배드리고, 헌금할 테니 그것으로 족한 줄 아시오, 하는 식이 된다면 바로의 제안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단지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도움이 되기 위하여, 또는 도움은 안 되더라도 손해만 오지 않게 된다면 하루 정도 예배 드려주겠다는 생각이 바로의 제안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왔습니까? 십일조 떼어 먹었더니 얼마나 손해가 났으며, 주일을 빼먹었다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 하고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배를 드림이 감사와 기쁨이 아니라 귀찮은 일을 치르는 것과 같은 것이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예비군 훈련 나가는 것처럼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예비군 지나면 민방위가 있는데 1년에 한두 번 나가는 것인데 얼마나 귀찮습니까? 우리의 예배가 이런 식이 되어 있다면 그냥 푹 쉬시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한 예배는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습니다. 단지 이 땅에서 발붙이고 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종교 하나 들여놓은 것이라면 그만두셔도 무방합니다.

이러한 바로의 제안에 대하여 모세가 거절합니다. 어떻게 거절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시내산에 가서 제사를 지내라고 하였습니다, 라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모세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합니다. 우리가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는데 그러면 애굽인들이 그러한 제사를 가증히 여기기에 우리를 미워하여 돌로 칠 것입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제사를 지낼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애굽인들이 신을 섬기는데 짐승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황소는 아피스에게 구별되어 있고, 암소는 이시스에게, 수양은 아몬에게, 그리고 다른 것들도 다른 신들에게 구별되어 있기에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는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마치 모슬렘 사원에서 돼지를 잡는 것이나 힌두교 신전에서 소를 잡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기원전 5세기경에 애굽 지역에 살던 유대인들이 희생제사를 지내다가 애굽 사람들에 의하여 종족이 학살된 사건도 있었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페르시아가 애굽을 공격할 때 애굽인들이 섬기는 거룩한 짐승들을 페르시아 군대 앞에 두고서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애굽의 궁사들이 활을 쏘지 못하여 지게 된 경우도 있듯이 애굽인들 앞에서 짐승을 잡아 희생 제사를 드릴 수가 없다는 말을 하자 바로가 동의를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뭐라고 합니까?

28절입니다. “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그런즉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 모세가 3일 길을 가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합니다. 3일 길을 가야 시내산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모세를 보내시면서 하나님께서 출애굽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곳에까지 나아가야 하는데 바로가 뭐라고 합니까?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너무 깊이는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무 빠지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도 돌보지 않고 전 재산을 갖다 바치는 이런 짓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고자 하는 주변 사람들의 요청만이 아니라 문제는 우리 내부의 소리라는 것입니다. 바로의 소리가 우리 안에서 울리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주일 낮에만 한번 가도 되는데 뭘 저녁에도 가고 수요일도 가고 금요일도 가느냐? 헌금도 적당하게 하지, 지나치게 하면 되겠느냐? 그저 적당히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아 가면서 저 집사가 저 정도 헌금하고 봉사하니 나는 이 정도만 하면 되겠지, 너무 멀리는 가지 말자 하면서 다짐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안수 집사가 저 정도이니 나는 이 정도만 해도 잘하는 것이야! 목사가 저 정도인데 나는 이만큼만 하여도 많이 하는 것이지, 그러나 너무 깊이 빠지면 안 돼, 이렇게 우리가 스스로 조심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니 이 땅에서 제사를 드리라, 제사를 드리러 가기는 가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라는 소리가 바로의 소리가 아니라 바로 우리 안의 소리로 들리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모두가 적당히 거래하고 적당히 도장 찍고 가듯이, 액땜하듯이 하고 가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모든 행태를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사란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고발하고 있듯이 소를 잡는 것이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양으로 제사함이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고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함이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다고 이사야 66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제사, 어떤 예배여야 합니까?

신명기 6:4-5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멀리 가지 말라로 될 일이 아닙니다. 아주 멀리 가는데 어느 정도로 멀리 가야 하는 것입니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예로 말씀드린 자신의 기쁨이나, 자신의 불행을 방지하는 액땜식의 예배가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아시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바르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데 어떤 예배자를 찾으시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4:23-24절입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이것은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여인과의 대화 중에 하신 말씀입니다. 여인은 예배의 장소를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장소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전에 이미 살펴보았습니다만 신령과 진정으로, 라는 것은 ‘영과 진리로’입니다.

우리의 신령한 분위기와 정성을 다한다는 의미에서의 진정으로 드린다는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때와 아버지, 라는 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때란 지금까지 제대로 예배를 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참된 예배를 드리신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구약의 핵심을 십자가로 드린 것입니다. 그것이 영과 진리로 드린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예배하는 자란 사실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예배란 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상태에서 소와 양을 잡고, 십일조가 아니라 십의 십조를 드린다 한들 그것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란 바로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르신 그분과의 사귐이 우리에게도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온전한 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의 부르심을 입은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가다듬어가면서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이 바로의 말이 아니라 우리 안에 들려오는 예배를 방해하는 사단의 소리로 알고 물리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귐을 통하여 아버지와의 관계가 더욱 친밀하여지는 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그것이 참된 기쁨이고 사람의 최고 최상의 목표요 가치입니다. 이러한 예배의 사람이 되도록 오늘도 주님께서 참된 예배를 드리고 계심을 믿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너무 깊이 빠지지 말라고 말리는 데도 십자가에 죽기까지 멀리 가셔서 참된 예배를 이루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도 그러한 운명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사람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 구원의 최종 상태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https://cafe.daum.net/kmc4755/MDpo/118
출8:20-32 출애굽의 목적 /이장우 출8:20-32 출애굽의 목적 /이장우 Reviewed by □□□ on October 29, 2026 Rating: 5
Powered by Blog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