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인물 중에 이름에 ‘발’ 자가 들어간 인물치고 훌륭한 인물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애굽에 요셉을 가두었던 시위대장 보디발, 욥의 친구 중 나아마 사람 소발, 또한 다윗이 방랑할 때에 다윗의 부하들을 위한 음식 요청을 거절하고 다윗의 무리를 폄하했다가 놀라서 죽은 마온 사람 나발 등 모두 별로 훌륭한 인물들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도 ‘발’ 자가 들어간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하나는 발락이요, 또 하나는 발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발락은 십볼의 아들이요, 모압의 왕이었습니다. 모압과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이 모압이라는 나라는 원래 이스라엘과 친척 지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압과 싸우지 말고 그들의 땅을 뺏으려 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게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신 2:9).’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과 싸울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땅을 통과하려고 할 때, 모압 사람들이 겁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이 자기 땅을 지나가려고 할 때에 겁을 먹고 미디안 장로들과 동맹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을까요? 생명의 위협을 받아서가 아니라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민수기 22장 4절 말씀을 보면 ‘미디안 장로들에게 이르되 이제 이 무리가 소가 밭의 풀을 뜯어먹음 같이 우리 사면에 있는 것을 다 뜯어먹으리로다 하니 때에 십볼의 아들 발락이 모압 왕이었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발락은 모압 땅에 경제적인 손해가 올까 봐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한 것입니다. 발락은 모압과 미디안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의 손에 복술의 예물을 들려 강변에 있는 발람이라는 사람을 불러오라고 명합니다. ‘그가 사자를 브올의 아들 발람의 본향 강변 브돌에 보내어 발람을 부르게 하여 가로되 보라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편에 거하였고(민 22:5).’ 강변 브돌은 유프라테스 강 주변의 브돌이라는 지역을 뜻하는데, 이곳은 메소포타미아에 속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발람은 메소포타미아의 선지자입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아주 먼 곳인데, 왜 먼 곳에 사는 발람을 불러왔을까요? 아마 발람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장 3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실 때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민수기 22장 6절 말씀을 보면 발락이 “우리보다 강하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쳐서 이기어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통해 발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스스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모르는 발람을 불러다가 저주하게 한 겁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발람을 상대하시고 그의 입술에 말씀을 주시기도 했지만, 발람은 여전히 거짓 선지자입니다. 남자 무당이었기 때문에 발람은 박수였을 뿐만 아니라 미친 짓을 했던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16절에 보면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유다서 1장 11절에도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거짓 선지자 발람에게도 능력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능력이 아니라 흑암의 세계에서 온 능력입니다. 만약 발람의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막으시고 바꾸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큰 모순이 되기 때문입니다.
발람은 당시 마술사의 최고봉이요, 박수 가운데는 가장 이름난 박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난 박수 무당이 누구에게 망신을 당했습니까? 바로 자기가 부려먹는 당나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대 최고의 거짓 선지자 발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삶 가운데 중요한 네 가지 교훈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1. 처음 마음
첫째로 처음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교훈입니다. 설교자들이 설교 가운데 많이 쓰는 말씀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오는 처음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이요, 두 번째 오는 마음은 인간의 마음이요, 세 번째 오는 마음은 마귀의 마음이라.’ 모압의 장로와 미디안의 장로들이 돈을 가지고 와서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할 때에, 발람은 그들에게 하루 유할 것을 청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12절의 말씀과 같이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 이 말씀은 명명백백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발락도 처음에는 함께 동행하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모압 왕 발락이 한 번 거절을 당하니까 더 큰 귀족들과 더 좋은 예물을 보내어 발람을 다시 한 번 유혹합니다. 15절 말씀을 보니 ‘발락이 다시 그들보다 더 높은 귀족들을 더 많이 보내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신들이 17절 말씀처럼 제안합니다.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케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하시더이다.” 이에 대한 발람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말로 거절하는 것 같습니다. 18절을 보면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발락이 그 집에 은, 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고 대답합니다. 겉으로 보면 참 신앙 좋은 대답입니다.
그러나 발람의 반응은 아주 교묘했습니다. 발람은 19절에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 겉으로는 안 간다고 대답했지만 속마음은 벌써 잿밥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내가 이번 한 건만 잘 하면 다음에는 이 짓 안 해도 되겠다”는 탐심이 발람의 마음속에 깊이 박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발락의 사신들을 하루 더 유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언지하에 거절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20절의 말씀처럼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고 대답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바뀐 게 아니라 발람의 욕심을 소극적으로 허용하신 것에 불과합니다. 마치 우리가 자녀를 기를 때, 자녀들의 간청을 조건과 함께 소극적으로 허락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소극적으로 허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바꾸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처음이나 마지막이나 항상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변치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무슨 마음이든지 처음 마음을 귀중하게 여겨야겠습니다.
어떤 농부가 입만 열면 자기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랑을 하였습니다. 이 농부는 소를 기르고 있었는데, 하루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요번에 송아지 쌍태를 주시면 한 마리는 꼭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기도대로 이란성 송아지가 쌍태가 나왔는데 한 마리는 누런 송아지고, 다른 한 마리는 얼룩 송아지였습니다. 이란성 쌍태를 보자 농부의 마음에 그만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송아지 한 마리를 드리겠다는 약속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만 누런 송아지가 죽었습니다. 그러자 이 농부가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하필이면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다니.” 우리 성도들은 마음을 바르게 써야 합니다. 이 농부처럼 처음 마음을 접어서는 안 됩니다. 처음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처음 마음을 유지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의 장애물
발람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뜻이 아닌 길에는 하나님께서 장애물을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소극적 허용을 하셨지만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길에 장애물을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지금 발람은 모압의 귀족들이 앞에 가고, 두 명의 종들이 따르니까 자신이 왕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고 거들먹거리면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들고 발람의 길을 막았습니다. 당나귀가 영안이 열려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밭으로 빠집니다. 밭으로 빠지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또 쫓아옵니다. 그러니까 더 좁은 곳으로 가고, 좁은 곳으로 가다가 자기 주인의 발을 벽에다가 비비기도 합니다. 나중에는 이 당나귀가 더는 못 가겠다고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영안이 닫힌 발람의 눈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대의 최고 선지자가 나귀만도 못한 영적 수준으로 떨어져 버리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거역하고 명예와 물욕에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면, 인생에 많은 장애물이 놓이게 됩니다. 호세아서 2장 6절에 보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장애물을 많이 만나는 사람은 혹시라도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에는 하나님께서 길을 여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아닌 길에는 하나님께서 장애물을 놓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애물을 만났을 때, 장애물을 치워달라고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내 뜻을 꺾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3. 책임전가
발람의 이야기에서 배울 수 있는 세 번째 교훈은 인생에 장애물이 있을 때, 장애물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발람의 행동을 주목해 보세요. 나귀는 영안이 열려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을 살리려고 길 가다가 밭으로 가고, 결국 주저앉아버렸는데, 발람은 나귀를 두 번 채찍으로 때리고 그래도 안 되니까 지팡이를 들어서 때렸습니다. 자신의 불순종으로 여호와의 칼 든 사자를 만났고 당나귀는 오직 주인의 생명을 보호해주려고 주저앉았을 뿐인데 이 무지한 발람은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책임을 당나귀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위조지폐를 만들었는데 그만 실수로 이만원권을 찍었습니다. 이 지폐를 서울에서 쓸 수가 없으니까 돈을 잘 알지 못하는 시골 중에서도 깡촌으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에서 국수 한 그릇을 사 먹자 주인장이 국수 값으로 사천원을 내라고 합니다. 국수 값으로 이만원권 위폐를 주었더니 이 주인장이 칠천원권 두 장과 이천원권 한 장을 거스름돈으로 남겨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여보시오! 대한민국에 칠천원권과 이천원권이 어디 있소? 이거 위조지폐 아니요?”라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그 주인장이 이만원권을 가만히 보더니 “이 돈은 제대로 된 돈이요?”라고 대답했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적반하장이라고 합니다. 발람이 책임전가하는 것은 바로 적반하장입니다. 발람의 태도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당나귀의 입을 여셨습니다. 당나귀가 히브리어를 하는 경이적인 일이 생겨났습니다. 28절을 보니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아마 발람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래도 태연한 척 “이는 네가 나를 거역한 연고가 아니냐?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너를 죽였으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30절 말씀에서 이 나귀는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고 대답하였습니다. 나귀의 말이 굉장히 논리적입니다. 나귀가 이렇게 논리적으로 말하니까 발람이 꼼짝도 못하고 “없었느니라”고 대답합니다. 옆에서 지켜본 모압의 귀족들이 얼마나 우스웠겠습니까?
발람은 당나귀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어려운 장애물을 만날 때, 내 인생이 장애물 때문에 망했다고 책임전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도 책임전가하는 분위기가 많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고 책임전가하기 십상이지만 사실은 우리의 책임이 큽니다. 요나가 불순종하니까 그 배가 풍랑을 만났던 것처럼, 신앙인들이 바로 살지 못하니까 이 사회에 어려움이 초래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에 어려움이 와도 스스로의 책임을 통감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4. 겸손과 회개
넷째로 인생을 살다가 장애물을 만나는 것은 우리가 겸손하게 낮아져서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민수기 22장 31절을 보면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발람이 이제 영안이 열려서 앞을 보니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당장 그 자리에 엎드려서 34절의 말씀처럼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장애물이 있을 때, 우리는 이처럼 몸의 자세를 낮추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장애물을 치워주십니다. 여호와의 사자 앞에 엎드린 발람의 자세는 옳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발람의 마음은 자세와 달랐습니다. 발람의 회개는 진실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발람이 진심으로 회개했다면 회개의 고백을 한 후에 돌아서 자신의 고향으로 갔어야 합니다. 그러나 발람의 마음에는 아직도 욕심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발람은 입으로만 회개하고 다시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저주코자 하는 계획을 축복의 언어로 바꾸시어 하나님의 계획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자 한 발람은 어떻게 됐을까요? 발람이 그 입술로 이스라엘을 축복했으니 복을 받았을까요? 아닙니다. 발람은 재물과 명예에 마음이 매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고 죽었습니다. 민수기 31장 8절에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발람은 결국 명예와 재물을 누리지 못하고 칼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만약 발람의 회개가 겸손하고 진실했더라면 발람은 자신의 길을 돌이켰을 것이고, 생명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탐심을 따라서 살다가 결국 망하는 인생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결 론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성도들은 두 가지를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그 뜻에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말씀을 통하여 ‘기도하라. 전도하라. 충성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분명히 핑계입니다. 불순종은 뭔가 거기에 달콤한 것이 있는 것 같아도 위험한 죽음의 길입니다. 그러나 순종은 황량한 길 같아도 승리가 있는 부요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저와 여러분은 늘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우리 성도들은 축복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직업은 축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에서 저주의 말이 나오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를 향해서도 축복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약 그 사람이 복을 받을 만하면 그 사람이 복을 받음과 동시에 나도 축복했으니까 복을 받고, 만약 그 사람이 복을 받지 못할 것 같으면 그 복이 반사되어서 내가 두 배의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축복하는 것은 이처럼 수지맞는 일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미운 사람, 싫은 사람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명은 축복의 사명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축복의 언어를 베푸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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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락은 십볼의 아들이요, 모압의 왕이었습니다. 모압과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이 모압이라는 나라는 원래 이스라엘과 친척 지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압과 싸우지 말고 그들의 땅을 뺏으려 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게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신 2:9).’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과 싸울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땅을 통과하려고 할 때, 모압 사람들이 겁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이 자기 땅을 지나가려고 할 때에 겁을 먹고 미디안 장로들과 동맹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을까요? 생명의 위협을 받아서가 아니라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민수기 22장 4절 말씀을 보면 ‘미디안 장로들에게 이르되 이제 이 무리가 소가 밭의 풀을 뜯어먹음 같이 우리 사면에 있는 것을 다 뜯어먹으리로다 하니 때에 십볼의 아들 발락이 모압 왕이었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발락은 모압 땅에 경제적인 손해가 올까 봐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한 것입니다. 발락은 모압과 미디안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의 손에 복술의 예물을 들려 강변에 있는 발람이라는 사람을 불러오라고 명합니다. ‘그가 사자를 브올의 아들 발람의 본향 강변 브돌에 보내어 발람을 부르게 하여 가로되 보라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편에 거하였고(민 22:5).’ 강변 브돌은 유프라테스 강 주변의 브돌이라는 지역을 뜻하는데, 이곳은 메소포타미아에 속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발람은 메소포타미아의 선지자입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아주 먼 곳인데, 왜 먼 곳에 사는 발람을 불러왔을까요? 아마 발람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장 3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실 때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민수기 22장 6절 말씀을 보면 발락이 “우리보다 강하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쳐서 이기어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통해 발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스스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모르는 발람을 불러다가 저주하게 한 겁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발람을 상대하시고 그의 입술에 말씀을 주시기도 했지만, 발람은 여전히 거짓 선지자입니다. 남자 무당이었기 때문에 발람은 박수였을 뿐만 아니라 미친 짓을 했던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16절에 보면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유다서 1장 11절에도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거짓 선지자 발람에게도 능력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능력이 아니라 흑암의 세계에서 온 능력입니다. 만약 발람의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막으시고 바꾸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큰 모순이 되기 때문입니다.
발람은 당시 마술사의 최고봉이요, 박수 가운데는 가장 이름난 박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난 박수 무당이 누구에게 망신을 당했습니까? 바로 자기가 부려먹는 당나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대 최고의 거짓 선지자 발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삶 가운데 중요한 네 가지 교훈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1. 처음 마음
첫째로 처음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교훈입니다. 설교자들이 설교 가운데 많이 쓰는 말씀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오는 처음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이요, 두 번째 오는 마음은 인간의 마음이요, 세 번째 오는 마음은 마귀의 마음이라.’ 모압의 장로와 미디안의 장로들이 돈을 가지고 와서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할 때에, 발람은 그들에게 하루 유할 것을 청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12절의 말씀과 같이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 이 말씀은 명명백백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발락도 처음에는 함께 동행하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모압 왕 발락이 한 번 거절을 당하니까 더 큰 귀족들과 더 좋은 예물을 보내어 발람을 다시 한 번 유혹합니다. 15절 말씀을 보니 ‘발락이 다시 그들보다 더 높은 귀족들을 더 많이 보내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신들이 17절 말씀처럼 제안합니다.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케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하시더이다.” 이에 대한 발람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말로 거절하는 것 같습니다. 18절을 보면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발락이 그 집에 은, 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고 대답합니다. 겉으로 보면 참 신앙 좋은 대답입니다.
그러나 발람의 반응은 아주 교묘했습니다. 발람은 19절에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 겉으로는 안 간다고 대답했지만 속마음은 벌써 잿밥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내가 이번 한 건만 잘 하면 다음에는 이 짓 안 해도 되겠다”는 탐심이 발람의 마음속에 깊이 박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발락의 사신들을 하루 더 유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언지하에 거절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20절의 말씀처럼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고 대답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바뀐 게 아니라 발람의 욕심을 소극적으로 허용하신 것에 불과합니다. 마치 우리가 자녀를 기를 때, 자녀들의 간청을 조건과 함께 소극적으로 허락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소극적으로 허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바꾸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처음이나 마지막이나 항상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변치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무슨 마음이든지 처음 마음을 귀중하게 여겨야겠습니다.
어떤 농부가 입만 열면 자기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랑을 하였습니다. 이 농부는 소를 기르고 있었는데, 하루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요번에 송아지 쌍태를 주시면 한 마리는 꼭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기도대로 이란성 송아지가 쌍태가 나왔는데 한 마리는 누런 송아지고, 다른 한 마리는 얼룩 송아지였습니다. 이란성 쌍태를 보자 농부의 마음에 그만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송아지 한 마리를 드리겠다는 약속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만 누런 송아지가 죽었습니다. 그러자 이 농부가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하필이면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다니.” 우리 성도들은 마음을 바르게 써야 합니다. 이 농부처럼 처음 마음을 접어서는 안 됩니다. 처음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처음 마음을 유지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의 장애물
발람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뜻이 아닌 길에는 하나님께서 장애물을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소극적 허용을 하셨지만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길에 장애물을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지금 발람은 모압의 귀족들이 앞에 가고, 두 명의 종들이 따르니까 자신이 왕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고 거들먹거리면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들고 발람의 길을 막았습니다. 당나귀가 영안이 열려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밭으로 빠집니다. 밭으로 빠지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또 쫓아옵니다. 그러니까 더 좁은 곳으로 가고, 좁은 곳으로 가다가 자기 주인의 발을 벽에다가 비비기도 합니다. 나중에는 이 당나귀가 더는 못 가겠다고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영안이 닫힌 발람의 눈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대의 최고 선지자가 나귀만도 못한 영적 수준으로 떨어져 버리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거역하고 명예와 물욕에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면, 인생에 많은 장애물이 놓이게 됩니다. 호세아서 2장 6절에 보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장애물을 많이 만나는 사람은 혹시라도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에는 하나님께서 길을 여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아닌 길에는 하나님께서 장애물을 놓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애물을 만났을 때, 장애물을 치워달라고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내 뜻을 꺾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3. 책임전가
발람의 이야기에서 배울 수 있는 세 번째 교훈은 인생에 장애물이 있을 때, 장애물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발람의 행동을 주목해 보세요. 나귀는 영안이 열려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을 살리려고 길 가다가 밭으로 가고, 결국 주저앉아버렸는데, 발람은 나귀를 두 번 채찍으로 때리고 그래도 안 되니까 지팡이를 들어서 때렸습니다. 자신의 불순종으로 여호와의 칼 든 사자를 만났고 당나귀는 오직 주인의 생명을 보호해주려고 주저앉았을 뿐인데 이 무지한 발람은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책임을 당나귀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위조지폐를 만들었는데 그만 실수로 이만원권을 찍었습니다. 이 지폐를 서울에서 쓸 수가 없으니까 돈을 잘 알지 못하는 시골 중에서도 깡촌으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에서 국수 한 그릇을 사 먹자 주인장이 국수 값으로 사천원을 내라고 합니다. 국수 값으로 이만원권 위폐를 주었더니 이 주인장이 칠천원권 두 장과 이천원권 한 장을 거스름돈으로 남겨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여보시오! 대한민국에 칠천원권과 이천원권이 어디 있소? 이거 위조지폐 아니요?”라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그 주인장이 이만원권을 가만히 보더니 “이 돈은 제대로 된 돈이요?”라고 대답했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적반하장이라고 합니다. 발람이 책임전가하는 것은 바로 적반하장입니다. 발람의 태도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당나귀의 입을 여셨습니다. 당나귀가 히브리어를 하는 경이적인 일이 생겨났습니다. 28절을 보니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아마 발람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래도 태연한 척 “이는 네가 나를 거역한 연고가 아니냐?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너를 죽였으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30절 말씀에서 이 나귀는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고 대답하였습니다. 나귀의 말이 굉장히 논리적입니다. 나귀가 이렇게 논리적으로 말하니까 발람이 꼼짝도 못하고 “없었느니라”고 대답합니다. 옆에서 지켜본 모압의 귀족들이 얼마나 우스웠겠습니까?
발람은 당나귀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어려운 장애물을 만날 때, 내 인생이 장애물 때문에 망했다고 책임전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도 책임전가하는 분위기가 많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고 책임전가하기 십상이지만 사실은 우리의 책임이 큽니다. 요나가 불순종하니까 그 배가 풍랑을 만났던 것처럼, 신앙인들이 바로 살지 못하니까 이 사회에 어려움이 초래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에 어려움이 와도 스스로의 책임을 통감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4. 겸손과 회개
넷째로 인생을 살다가 장애물을 만나는 것은 우리가 겸손하게 낮아져서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민수기 22장 31절을 보면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발람이 이제 영안이 열려서 앞을 보니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당장 그 자리에 엎드려서 34절의 말씀처럼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장애물이 있을 때, 우리는 이처럼 몸의 자세를 낮추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장애물을 치워주십니다. 여호와의 사자 앞에 엎드린 발람의 자세는 옳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발람의 마음은 자세와 달랐습니다. 발람의 회개는 진실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발람이 진심으로 회개했다면 회개의 고백을 한 후에 돌아서 자신의 고향으로 갔어야 합니다. 그러나 발람의 마음에는 아직도 욕심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발람은 입으로만 회개하고 다시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저주코자 하는 계획을 축복의 언어로 바꾸시어 하나님의 계획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자 한 발람은 어떻게 됐을까요? 발람이 그 입술로 이스라엘을 축복했으니 복을 받았을까요? 아닙니다. 발람은 재물과 명예에 마음이 매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고 죽었습니다. 민수기 31장 8절에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발람은 결국 명예와 재물을 누리지 못하고 칼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만약 발람의 회개가 겸손하고 진실했더라면 발람은 자신의 길을 돌이켰을 것이고, 생명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탐심을 따라서 살다가 결국 망하는 인생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결 론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성도들은 두 가지를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그 뜻에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말씀을 통하여 ‘기도하라. 전도하라. 충성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분명히 핑계입니다. 불순종은 뭔가 거기에 달콤한 것이 있는 것 같아도 위험한 죽음의 길입니다. 그러나 순종은 황량한 길 같아도 승리가 있는 부요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저와 여러분은 늘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우리 성도들은 축복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직업은 축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에서 저주의 말이 나오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를 향해서도 축복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약 그 사람이 복을 받을 만하면 그 사람이 복을 받음과 동시에 나도 축복했으니까 복을 받고, 만약 그 사람이 복을 받지 못할 것 같으면 그 복이 반사되어서 내가 두 배의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축복하는 것은 이처럼 수지맞는 일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미운 사람, 싫은 사람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명은 축복의 사명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축복의 언어를 베푸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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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22:21-30 발람과 당나귀 /피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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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0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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