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가대 찬양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우리 교회에 오셔서 말씀을 전하셨던 서양인의 외모지만 한국 국적을 가지신 인요한 의사를 기억하십니까? 연세대학에 계신 분인데 이분이 얼마 전에 북한에 다녀와서 강연을 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그중에 물과 관련된 부분을 인용하려고 합니다.
의사로서 환자들 질병을 고쳐주려고 차를 몰고 가다가 너무 오래 길을 달렸고 힘들어서 청진에 가서 관광여관에 투숙을 했습니다. 환경이 열악했지만 짐을 풀고 목욕을 하고 싶어서 호텔 책임자에게 따뜻한 목욕물 좀 데워달라고 했더니, 그렇게 하겠다며 10분 정도 틀어줄 테니까 목욕을 하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이분 말씀이 목욕탕에 갈 때는 양동이, 세숫대야, 바가지 하나씩을 준비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처음 물 나올 때는 찬물이 나오는데 양동이에 그걸 받아서 화장실 물 내릴 때 써야 하고, 두 번째는 따뜻한 물 나올 때 바로 나오지 않고 관이 녹슬어서 녹물이 나오니까 세숫대야에 그걸 받아서 버려야 하고, 세 번째 바가지로 따뜻한 물 나올 때 빨리 받아서 목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두 번째 물은 무사히 받아냈는데 마지막으로 따뜻한 물 나올 때쯤 전기가 나갔다고 합니다.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겨우 전기가 들어와서 목욕물을 조금 얻어서 목욕을 마쳤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동포들이 너무 안쓰럽고 도와주고 싶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 연희동에 있는 작은 공동 목욕탕을 갔다고 합니다. 목욕탕에 들어가 수도꼭지를 트니까 찬물이 콸콸, 따뜻한 물이 콸콸 나오는 걸 보고, 청진에 가서 목욕하던 생각이 나서 벽을 보고는 하나님, 이게 웬일입니까, 하면서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엉엉 울어버렸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사람에게 목욕이 필요하고 목욕을 하려면 물이 필요합니다. 물로 하는 목욕은 각자가 해결할 수 있지만, 혹시 경동교회에 오시면 성령의 목욕을 하는데 성령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제대로 나옵니까, 아니면 수도관이 막혀서 안 나옵니까, 물의 온도는 어떻습니까?
사람이 보통 물로만 목욕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영적 목욕도 한다고 오늘 성경에 쓰여 있습니다. 우리가 잘 가꾸고 정말 아끼는 이 교회에 와서 수도꼭지를 틀었더니 성령의 역사가 콸콸 쏟아집니다.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성경의 지식, 신학적 기초, 하나님의 높은 뜻, 이 모든 진실을 우리가 갖고 있는 냉철한 지성 속에 가득 차게 주셔서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올바로 깨닫는 은혜를 받으십니까?
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성령님, 오셔서 각자 이룬 모습대로, 공부하는 대로, 기도하는 대로, 냉철한 지성 속에 하나님의 진실이 들어앉아서 정말 차갑지만 냉철하고 깨끗하고 정직한 신학적, 신앙적 지식을 갖게 되기를 진실로 바랍니다.’ 사람이 찬물만 가지고 목욕할 수 없습니다. 따뜻한 물도 틀어야죠.
동시에 교회에 오시면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이 너무 뜨거워서, 차고 넘쳐서, 수도꼭지만 틀면 우리의 가슴 속에, 우리 심장에 하나님의 구구절절한 말씀과 그분의 진실된 사랑과 은혜가 넘쳐나서 모두가 가슴이 뜨거웠으면 좋겠습니다. 찬물과 따뜻한 물, 이 두 수도꼭지의 관이 썩으면 어느 것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의 가정에도 일상에서 살아가는 수도꼭지와 하늘과 함께 하는 수도꼭지가 두 개 있는데 꼭지를 돌려서 틀면 물이 잘 나옵니까? 여러분의 직장에도 수도가 있는데 관은 괜찮습니까? 시스템은 괜찮습니까?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울 정도로 기쁘십니까?
여기 앉으신 여러분이나 저는 수도관을 갖고 있는 목욕탕입니다. 제 겉사람이 속사람을 찾아갔습니다. 제가 둘입니다. 거죽으로 보이는 제가 있고 목욕탕으로 표현할 수 있는 속사람 제가 있습니다. 겉사람이 속사람에게 가서 한쪽 수도꼭지를 틀었는데 맑은 지혜가 없습니다. 다른 한쪽을 틀었더니 저는 냉랭해서 도대체가 뜨거움을 고사하고 동정도 없고 인정도 없습니다.
아무리 틀어도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제 속사람을 찾아간 저는 실망하고 돌아왔습니다. 차가움은 고사하고 뜨거움도 없습니다. 찬 것도 뜨거운 것도 없이 맹맹하고, 그래서 볼품없고 필요성도 없는 그런 사람으로 제가 서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해봤습니다.
이 세상 어디든지 인간의 삶이 있는 곳엔 수도꼭지가 두 개 있습니다. 그 두 개로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목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은사도 뜨거운 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아주 냉철한 지혜의 은사도 있습니다. 그리고 따뜻한 사랑의 은사도 있습니다. 두 가지를 다 줄 테니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섞어서, 감사드릴 수 있는 만큼 잘 조화해서, 목욕하고 속사람도 깨끗해집시다. 울고 웃고 살아가면서 하나님과 마주하여 목욕합시다.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는 이 목욕하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 당시에 니고데모라는 성씨를 가진 사람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의 김씨, 이씨, 박씨처럼요. 니고데모는 산헤드린이라는 70명으로 구성된 국회의원입니다. 꽤 높습니다. 그리고 산헤드린의 여러 당 중에 니고데모가 속한 곳은 바리새파, 70명 국회 중에서 제일 큰 교수 단체, 장수 단체입니다.
산헤드린 위원이고, 바리새파라는 최대 집단의 지도자인 니고데모에게도 고민이 있었습니다. 도대체가 내 속에, 우리 속에 하늘의 양식이 어떤 모양으로 있는지, 물을 틀면, 수도꼭지를 틀면 하늘의 양식은 오는 건지, 하늘의 지혜는 있는 건지, 하늘의 사랑은 내가 맛볼 수 있는 건지, 의심이 났었습니다.
예수 이야기를 듣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예수는 기도하면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중풍병자가 낫고,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도대체 이런 능력을 어디서 예수는 받은 것일까? 나는 아무리 기도해도 안 되는데.’ 결국 니고데모는 체통 때문에 밤중에 예수를 찾아갑니다.
예수는 당대 상식으로 보면 혹세무민하는 사람이고, 기적을 행사하면서 자신을 메시야라고 하면서 세상을 웃기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니고데모 입장에서 보면 예수라는 사람은 정통이 아닌 비정통이고, 이상한 변두리 사람, 스스로 자신을 메시야라고 하는 이상한 선동가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봤더니 하늘의 은혜를 받은 것 같아서 밤에 와서 묻습니다.
니고데모가 묻습니다. ‘당신이 행하는 기적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죠? 땅에서는 안 되는 것이죠? 산헤드린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하늘에서 온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 말씀이 “당연한 이야기를 왜 하느냐? 기적은 위에서부터 온다.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이 관여할 수 없는 어떤 곳에서 오는데 사람이 관여할 수 없기 때문에 편의상 ‘위’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람이 관여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가장 깊은 곳에서 온다.”
인간이 아무리 눈을 뜨고 가도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은 가장 위에서 오고, 가장 깊은 곳에서 솟아나고, 가장 넓은 곳에서 노도처럼 밀려옵니다. 니고데모의 질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저도 기적 행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 말씀입니다. “다시 태어나라.”
니고데모는 사회지도층입니다. 바리새파 사람으로서 율법에 정통했습니다. 그리고 학식이 있고 지위도 높았습니다. 다시 태어나라고 하는 말을 니고데모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엄마 뱃속에 어떻게 들어가라는 말인가, 그것도 기적인가?’
예수님 말씀의 ‘다시 태어나라’는 말은 사람의 태어난 모습은 육신과 모든 인간의 옷을 그대로 두고 내가 자리하고 싶은, 하나님이 자리하고 싶은, 그대 가슴 속에 가장 깊은 곳, 가장 넓은 시야를 가진 곳, 속사람입니다. “가장 높은 곳, 그곳에 하나님이 오시게 하라, 성령이 임하게 하라.”
이 말을 다시 태어나라고 한 것인데 니고데모는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아니, 니고데모 방식대로 알아들었습니다. 제가 다시 엄마 뱃속에 들어갔다 나와야 하는데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것을 니고데모는 성령 받는 일로 생각했고 다시 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다릅니다. “나 예수는, 하나님은 적어도 인간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사람의 생김새, 사람이 지은 집을 관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관여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어떻게 생겼든, 피부 색깔이 뭐든, 처한 위치가 어떻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어린이든 노인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임하고 싶은 곳은 가장 깊은 곳, 그뿐이다.”
가장 넓은 곳, 그리고 가장 높은 곳, 제 속에 우리 사회에 그런 곳에 가서 하나님은 은혜를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곳을 타고, 공간을 타고 새로 나는 것입니다. 새로 난다는 말은 하나님이 있고 싶어 하는 장소를 달라는 말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들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에 있었던 소통의 문제였습니다.
새사람이 뭐냐고 물으면, 거듭나는 것이 뭐냐고 물으면 다 압니다. 그런데 예수가 말하는 거듭남과 니고데모가 말하는 거듭남은 전혀 의식이 달랐습니다. 소통이 막혔습니다. 소통할 수는 있으나 전혀 상식과 지식을 달리합니다. 가슴도 달리합니다.
예수님 말씀은 “성령을 보내마. 찬물 더운 물 알아서 섞어서 써라. 성령에도 찬 성령이 있고, 따뜻한 성령이 있을 건데 찬 성령은 말씀을 제대로 배우게 한다. 그러나 따뜻한 성령은 가슴이 사랑으로 뛰어 넘치게 한다. 둘을 잘 섞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거라.” 성령의 역사는 그렇습니다.
니고데모에게 부탁합니다. “아마 그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슴이 차가운 정도가 아니라 사랑이 하나도 없어서 메마른 것 같다. 따뜻한 성령을 받아라.” 그랬을 것 같습니다. 따뜻함을 받으면 냉기가 사라지고 제대로 볼 것 아닙니까? 혹시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그런 제안 하시면 여러분이 무슨 은혜를 받고 싶은지 진실하게 하나님께 구하면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것은 “성령의 세례를 받고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가장 깊은 것만 하나님께 드리면 됩니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드린 게 있습니까? 하나님은 가장 깊은 곳에서 이런 제안을 하십니다. “나하고 마주 서서 마주 보고 이야기하자.” 이유는 하나님은 깊은 데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깊으심과 저의 깊음이 마주 서 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주고받는 여러분, 서로 마주 보고 사랑하면 진실됩니다. 사랑을 멀리 두고 등지고 있거나 사랑의 위치를 바꾸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부부간에, 부모와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면서 자유를 원하십니까? 내가 내 이웃 앞에서 자유하고, 상대방이 그 자유를 인정해 주어야 자유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구속한 일도 없고 당신이 없어도 난 자유합니다. 당신을 존중합니다. 당신이 보기에 내 자유를 존중하고 그래서 나는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나는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정말로 거리낌이 없이 자유합니다. 제 속에 있는 진실이, 깊은 곳의 진실이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은 “내 있는 모습대로 그대 앞에 마주 보고 서마.”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주 보고 섰을 때 그 대화는 은혜의 대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입을 열어서 우리에게, 마주 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 “내가 하는 말은 다 은혜니라. 살리는 은혜니라.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그대를 복되게 하는 은혜니라. 마주 서자.”
여러분은 대화할 때 마주 보고 하십니까? 이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의 일하는 곳에서 같이 눈을 똑바로 보고 마주 보고 있으면 그때는 숨길 수가 없습니다. 진실만이 통할 겁니다. 그런 경우에 진정한 소통이라고 하지, 보지도 않고 눈감은 채 무슨 소통이, 대화가 가능합니까?
하나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나한테 와서 눈뜨고 봐라. 내가 보이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보이게 하는 방법 두 가지를 가르쳐 주마.” 오늘 봉독한 구약의 민수기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인데,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를 인도해 주심을 기도하면 하나님이 두 가지로 복을 주십니다. 이것이 민수기 말씀이자 축도의 말씀입니다.
전 세계 교회는 두 가지의 축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축도할 때 들으시고, 많은 분이 들으시는 대로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으로 하는 축도가 있고, 또 한 축도는 민수기 오늘의 말씀대로 여호와께서 우리를 고이 보시어서 평화 주시고 우리를 밝은 얼굴로 대하여서 은혜 주시고 이끌어 주시고 지켜주십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복 주십니다.
민수기 말씀을 축도로 택하는 교회가 절반쯤 되고, 성부·성자·성령의 축도를 택하는 교회가 절반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두 개 다 씁니다. 저는 신약성경의 성부·성자·성령의 축도를 드리고, 1, 2부 성가대가 받아서 민수기 6:22-27 말씀을 송영으로 부릅니다. 우리는 성가대의 송영, 노래로 하는 축도와 제가 말로 선포하는 축도, 구약 축도와 신약 축도를 함께 받고 가십니다. 그렇게 생각하시고 성가대 송영이 끝나면 아멘하고 가십시오. 축복의 말씀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론과 모든 백성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는데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첫째, 하나님, 당신의 얼굴은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얼굴 보여달라고 했지만 하나님 얼굴 안 보여주시고 등만 보이셨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얼굴 보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얼굴이 보고 싶으면 하나님의 얼굴은 광채가 나므로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해라. 하나님, 얼굴은 보지 않겠습니다. 당신 얼굴에서 나는 광채라도 좀 보여 주십시오.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는 빛을 우리한테 발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는 빛은 은혜라는 총괄적 은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밝은 빛으로 비춰주십시오. 눈이 부셔서 하나님의 얼굴은 볼 수 없으나 은혜는 받겠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고이 보시어서 여러분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원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고이 보셔서가 아니고, 하나님은 내렸던 얼굴을 드셔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얼굴 좀 들어주세요. 하나님이 이 땅의 아픔과 좌절에 대해서 고개를 숙이고 계시지 마시고 얼굴 들고 제 인간의 실존과 이 나라의 모습과 우리 사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봐주시고 얼굴 좀 들어주세요.
하나님이 얼굴을 드시면 이 땅에 평화가 있습니다. 전쟁의 위협, 갈등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은 고개 숙이지 마시고 얼굴 좀 드십시오. 마주 보고 서주십시오. 우리 현실 그대로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얼굴 드시면 평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빛을 발하시면 은혜가 충만합니다. 이것이 축복 기도의 내용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은 얼굴을 드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은 빛을 발하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가장 깊은 곳을 찾는 하나님, 가장 넓은 개방된 곳을 찾는 하나님, 가장 높은 곳을 찾는 하나님이 우리한테 오셔서 우리가 어떻게 생겼든지 간에 우리 생김새 속에 하나님이 자기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거죽이나 디자인에는 관심 없으십니다. 어떤 모습이든지 그 속에 가장 깊은 곳만 우리가 마련하면 됩니다. 그러면 가장 깊은 곳을 찾으시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명품다운 인간, 명인이 되어라.”
물건 살 때 비싸지만 명품을 찾게 됩니다. 우리도 명품 됩시다. 저는 경동교회도 너무 과대하게 크진 않지만 그래도 모두가 찾는, 사고 싶은 명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그만큼 겉도 명품이지만 속도 명품이어야 합니다.
우리 깊은 곳, 넓은 곳, 개방성, 높은 곳을 하나님께 드리는데 하나님이 부탁이 있습니다. 나는 명품을 원한다. 명품의 핵심은 내용이다. 내가 명품의 핵을 이루어주마. 그대들의 모습은 빛날 것이다. 부탁이 있다. 나 없이 명품이라고 떠드는 것은 짝퉁이니라. 짝퉁 물건 원하세요? 짝퉁 신앙 필요 없습니다. 체하는 것 별로 필요 없습니다.
해방도 자유도 기쁨도 복도 없는 이상한 모습의 짝퉁이 예수님 보시기에 니고데모가 사는 율법의 세상이 짝퉁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행복이 없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가 깊은 곳에 있고 그대들이 나를 감싸고 나를 닮고 우리 둘이 합해서 하나님이 만드신 명품이 되자. 나는 짝퉁 속에는 임하지 않는다.
결단하십시다. 저는 이 땅이 그런 땅이 되기를 바라고, 예수님도 그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하늘은 깊은 곳을 찾습니다. 진실을 찾습니다. 위대한 것을 찾고 높은 것을 찾습니다. 명품 세상을 만들려고, 명품 사람을 만들려고 말입니다. 성령의 축복 풍성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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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 교회에 오셔서 말씀을 전하셨던 서양인의 외모지만 한국 국적을 가지신 인요한 의사를 기억하십니까? 연세대학에 계신 분인데 이분이 얼마 전에 북한에 다녀와서 강연을 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그중에 물과 관련된 부분을 인용하려고 합니다.
의사로서 환자들 질병을 고쳐주려고 차를 몰고 가다가 너무 오래 길을 달렸고 힘들어서 청진에 가서 관광여관에 투숙을 했습니다. 환경이 열악했지만 짐을 풀고 목욕을 하고 싶어서 호텔 책임자에게 따뜻한 목욕물 좀 데워달라고 했더니, 그렇게 하겠다며 10분 정도 틀어줄 테니까 목욕을 하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이분 말씀이 목욕탕에 갈 때는 양동이, 세숫대야, 바가지 하나씩을 준비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처음 물 나올 때는 찬물이 나오는데 양동이에 그걸 받아서 화장실 물 내릴 때 써야 하고, 두 번째는 따뜻한 물 나올 때 바로 나오지 않고 관이 녹슬어서 녹물이 나오니까 세숫대야에 그걸 받아서 버려야 하고, 세 번째 바가지로 따뜻한 물 나올 때 빨리 받아서 목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두 번째 물은 무사히 받아냈는데 마지막으로 따뜻한 물 나올 때쯤 전기가 나갔다고 합니다.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겨우 전기가 들어와서 목욕물을 조금 얻어서 목욕을 마쳤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동포들이 너무 안쓰럽고 도와주고 싶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 연희동에 있는 작은 공동 목욕탕을 갔다고 합니다. 목욕탕에 들어가 수도꼭지를 트니까 찬물이 콸콸, 따뜻한 물이 콸콸 나오는 걸 보고, 청진에 가서 목욕하던 생각이 나서 벽을 보고는 하나님, 이게 웬일입니까, 하면서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엉엉 울어버렸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사람에게 목욕이 필요하고 목욕을 하려면 물이 필요합니다. 물로 하는 목욕은 각자가 해결할 수 있지만, 혹시 경동교회에 오시면 성령의 목욕을 하는데 성령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제대로 나옵니까, 아니면 수도관이 막혀서 안 나옵니까, 물의 온도는 어떻습니까?
사람이 보통 물로만 목욕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영적 목욕도 한다고 오늘 성경에 쓰여 있습니다. 우리가 잘 가꾸고 정말 아끼는 이 교회에 와서 수도꼭지를 틀었더니 성령의 역사가 콸콸 쏟아집니다.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성경의 지식, 신학적 기초, 하나님의 높은 뜻, 이 모든 진실을 우리가 갖고 있는 냉철한 지성 속에 가득 차게 주셔서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올바로 깨닫는 은혜를 받으십니까?
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성령님, 오셔서 각자 이룬 모습대로, 공부하는 대로, 기도하는 대로, 냉철한 지성 속에 하나님의 진실이 들어앉아서 정말 차갑지만 냉철하고 깨끗하고 정직한 신학적, 신앙적 지식을 갖게 되기를 진실로 바랍니다.’ 사람이 찬물만 가지고 목욕할 수 없습니다. 따뜻한 물도 틀어야죠.
동시에 교회에 오시면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이 너무 뜨거워서, 차고 넘쳐서, 수도꼭지만 틀면 우리의 가슴 속에, 우리 심장에 하나님의 구구절절한 말씀과 그분의 진실된 사랑과 은혜가 넘쳐나서 모두가 가슴이 뜨거웠으면 좋겠습니다. 찬물과 따뜻한 물, 이 두 수도꼭지의 관이 썩으면 어느 것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의 가정에도 일상에서 살아가는 수도꼭지와 하늘과 함께 하는 수도꼭지가 두 개 있는데 꼭지를 돌려서 틀면 물이 잘 나옵니까? 여러분의 직장에도 수도가 있는데 관은 괜찮습니까? 시스템은 괜찮습니까?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울 정도로 기쁘십니까?
여기 앉으신 여러분이나 저는 수도관을 갖고 있는 목욕탕입니다. 제 겉사람이 속사람을 찾아갔습니다. 제가 둘입니다. 거죽으로 보이는 제가 있고 목욕탕으로 표현할 수 있는 속사람 제가 있습니다. 겉사람이 속사람에게 가서 한쪽 수도꼭지를 틀었는데 맑은 지혜가 없습니다. 다른 한쪽을 틀었더니 저는 냉랭해서 도대체가 뜨거움을 고사하고 동정도 없고 인정도 없습니다.
아무리 틀어도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제 속사람을 찾아간 저는 실망하고 돌아왔습니다. 차가움은 고사하고 뜨거움도 없습니다. 찬 것도 뜨거운 것도 없이 맹맹하고, 그래서 볼품없고 필요성도 없는 그런 사람으로 제가 서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해봤습니다.
이 세상 어디든지 인간의 삶이 있는 곳엔 수도꼭지가 두 개 있습니다. 그 두 개로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목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은사도 뜨거운 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아주 냉철한 지혜의 은사도 있습니다. 그리고 따뜻한 사랑의 은사도 있습니다. 두 가지를 다 줄 테니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섞어서, 감사드릴 수 있는 만큼 잘 조화해서, 목욕하고 속사람도 깨끗해집시다. 울고 웃고 살아가면서 하나님과 마주하여 목욕합시다.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는 이 목욕하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 당시에 니고데모라는 성씨를 가진 사람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의 김씨, 이씨, 박씨처럼요. 니고데모는 산헤드린이라는 70명으로 구성된 국회의원입니다. 꽤 높습니다. 그리고 산헤드린의 여러 당 중에 니고데모가 속한 곳은 바리새파, 70명 국회 중에서 제일 큰 교수 단체, 장수 단체입니다.
산헤드린 위원이고, 바리새파라는 최대 집단의 지도자인 니고데모에게도 고민이 있었습니다. 도대체가 내 속에, 우리 속에 하늘의 양식이 어떤 모양으로 있는지, 물을 틀면, 수도꼭지를 틀면 하늘의 양식은 오는 건지, 하늘의 지혜는 있는 건지, 하늘의 사랑은 내가 맛볼 수 있는 건지, 의심이 났었습니다.
예수 이야기를 듣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예수는 기도하면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중풍병자가 낫고,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도대체 이런 능력을 어디서 예수는 받은 것일까? 나는 아무리 기도해도 안 되는데.’ 결국 니고데모는 체통 때문에 밤중에 예수를 찾아갑니다.
예수는 당대 상식으로 보면 혹세무민하는 사람이고, 기적을 행사하면서 자신을 메시야라고 하면서 세상을 웃기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니고데모 입장에서 보면 예수라는 사람은 정통이 아닌 비정통이고, 이상한 변두리 사람, 스스로 자신을 메시야라고 하는 이상한 선동가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봤더니 하늘의 은혜를 받은 것 같아서 밤에 와서 묻습니다.
니고데모가 묻습니다. ‘당신이 행하는 기적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죠? 땅에서는 안 되는 것이죠? 산헤드린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하늘에서 온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 말씀이 “당연한 이야기를 왜 하느냐? 기적은 위에서부터 온다.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이 관여할 수 없는 어떤 곳에서 오는데 사람이 관여할 수 없기 때문에 편의상 ‘위’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람이 관여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가장 깊은 곳에서 온다.”
인간이 아무리 눈을 뜨고 가도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은 가장 위에서 오고, 가장 깊은 곳에서 솟아나고, 가장 넓은 곳에서 노도처럼 밀려옵니다. 니고데모의 질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저도 기적 행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 말씀입니다. “다시 태어나라.”
니고데모는 사회지도층입니다. 바리새파 사람으로서 율법에 정통했습니다. 그리고 학식이 있고 지위도 높았습니다. 다시 태어나라고 하는 말을 니고데모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엄마 뱃속에 어떻게 들어가라는 말인가, 그것도 기적인가?’
예수님 말씀의 ‘다시 태어나라’는 말은 사람의 태어난 모습은 육신과 모든 인간의 옷을 그대로 두고 내가 자리하고 싶은, 하나님이 자리하고 싶은, 그대 가슴 속에 가장 깊은 곳, 가장 넓은 시야를 가진 곳, 속사람입니다. “가장 높은 곳, 그곳에 하나님이 오시게 하라, 성령이 임하게 하라.”
이 말을 다시 태어나라고 한 것인데 니고데모는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아니, 니고데모 방식대로 알아들었습니다. 제가 다시 엄마 뱃속에 들어갔다 나와야 하는데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것을 니고데모는 성령 받는 일로 생각했고 다시 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다릅니다. “나 예수는, 하나님은 적어도 인간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사람의 생김새, 사람이 지은 집을 관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관여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어떻게 생겼든, 피부 색깔이 뭐든, 처한 위치가 어떻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어린이든 노인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임하고 싶은 곳은 가장 깊은 곳, 그뿐이다.”
가장 넓은 곳, 그리고 가장 높은 곳, 제 속에 우리 사회에 그런 곳에 가서 하나님은 은혜를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곳을 타고, 공간을 타고 새로 나는 것입니다. 새로 난다는 말은 하나님이 있고 싶어 하는 장소를 달라는 말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들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에 있었던 소통의 문제였습니다.
새사람이 뭐냐고 물으면, 거듭나는 것이 뭐냐고 물으면 다 압니다. 그런데 예수가 말하는 거듭남과 니고데모가 말하는 거듭남은 전혀 의식이 달랐습니다. 소통이 막혔습니다. 소통할 수는 있으나 전혀 상식과 지식을 달리합니다. 가슴도 달리합니다.
예수님 말씀은 “성령을 보내마. 찬물 더운 물 알아서 섞어서 써라. 성령에도 찬 성령이 있고, 따뜻한 성령이 있을 건데 찬 성령은 말씀을 제대로 배우게 한다. 그러나 따뜻한 성령은 가슴이 사랑으로 뛰어 넘치게 한다. 둘을 잘 섞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거라.” 성령의 역사는 그렇습니다.
니고데모에게 부탁합니다. “아마 그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슴이 차가운 정도가 아니라 사랑이 하나도 없어서 메마른 것 같다. 따뜻한 성령을 받아라.” 그랬을 것 같습니다. 따뜻함을 받으면 냉기가 사라지고 제대로 볼 것 아닙니까? 혹시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그런 제안 하시면 여러분이 무슨 은혜를 받고 싶은지 진실하게 하나님께 구하면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것은 “성령의 세례를 받고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가장 깊은 것만 하나님께 드리면 됩니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드린 게 있습니까? 하나님은 가장 깊은 곳에서 이런 제안을 하십니다. “나하고 마주 서서 마주 보고 이야기하자.” 이유는 하나님은 깊은 데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깊으심과 저의 깊음이 마주 서 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주고받는 여러분, 서로 마주 보고 사랑하면 진실됩니다. 사랑을 멀리 두고 등지고 있거나 사랑의 위치를 바꾸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부부간에, 부모와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면서 자유를 원하십니까? 내가 내 이웃 앞에서 자유하고, 상대방이 그 자유를 인정해 주어야 자유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구속한 일도 없고 당신이 없어도 난 자유합니다. 당신을 존중합니다. 당신이 보기에 내 자유를 존중하고 그래서 나는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나는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정말로 거리낌이 없이 자유합니다. 제 속에 있는 진실이, 깊은 곳의 진실이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은 “내 있는 모습대로 그대 앞에 마주 보고 서마.”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주 보고 섰을 때 그 대화는 은혜의 대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입을 열어서 우리에게, 마주 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 “내가 하는 말은 다 은혜니라. 살리는 은혜니라.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그대를 복되게 하는 은혜니라. 마주 서자.”
여러분은 대화할 때 마주 보고 하십니까? 이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의 일하는 곳에서 같이 눈을 똑바로 보고 마주 보고 있으면 그때는 숨길 수가 없습니다. 진실만이 통할 겁니다. 그런 경우에 진정한 소통이라고 하지, 보지도 않고 눈감은 채 무슨 소통이, 대화가 가능합니까?
하나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나한테 와서 눈뜨고 봐라. 내가 보이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보이게 하는 방법 두 가지를 가르쳐 주마.” 오늘 봉독한 구약의 민수기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인데,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를 인도해 주심을 기도하면 하나님이 두 가지로 복을 주십니다. 이것이 민수기 말씀이자 축도의 말씀입니다.
전 세계 교회는 두 가지의 축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축도할 때 들으시고, 많은 분이 들으시는 대로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으로 하는 축도가 있고, 또 한 축도는 민수기 오늘의 말씀대로 여호와께서 우리를 고이 보시어서 평화 주시고 우리를 밝은 얼굴로 대하여서 은혜 주시고 이끌어 주시고 지켜주십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복 주십니다.
민수기 말씀을 축도로 택하는 교회가 절반쯤 되고, 성부·성자·성령의 축도를 택하는 교회가 절반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두 개 다 씁니다. 저는 신약성경의 성부·성자·성령의 축도를 드리고, 1, 2부 성가대가 받아서 민수기 6:22-27 말씀을 송영으로 부릅니다. 우리는 성가대의 송영, 노래로 하는 축도와 제가 말로 선포하는 축도, 구약 축도와 신약 축도를 함께 받고 가십니다. 그렇게 생각하시고 성가대 송영이 끝나면 아멘하고 가십시오. 축복의 말씀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론과 모든 백성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는데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첫째, 하나님, 당신의 얼굴은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얼굴 보여달라고 했지만 하나님 얼굴 안 보여주시고 등만 보이셨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얼굴 보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얼굴이 보고 싶으면 하나님의 얼굴은 광채가 나므로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해라. 하나님, 얼굴은 보지 않겠습니다. 당신 얼굴에서 나는 광채라도 좀 보여 주십시오.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는 빛을 우리한테 발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는 빛은 은혜라는 총괄적 은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밝은 빛으로 비춰주십시오. 눈이 부셔서 하나님의 얼굴은 볼 수 없으나 은혜는 받겠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고이 보시어서 여러분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원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고이 보셔서가 아니고, 하나님은 내렸던 얼굴을 드셔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얼굴 좀 들어주세요. 하나님이 이 땅의 아픔과 좌절에 대해서 고개를 숙이고 계시지 마시고 얼굴 들고 제 인간의 실존과 이 나라의 모습과 우리 사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봐주시고 얼굴 좀 들어주세요.
하나님이 얼굴을 드시면 이 땅에 평화가 있습니다. 전쟁의 위협, 갈등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은 고개 숙이지 마시고 얼굴 좀 드십시오. 마주 보고 서주십시오. 우리 현실 그대로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얼굴 드시면 평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빛을 발하시면 은혜가 충만합니다. 이것이 축복 기도의 내용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은 얼굴을 드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은 빛을 발하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가장 깊은 곳을 찾는 하나님, 가장 넓은 개방된 곳을 찾는 하나님, 가장 높은 곳을 찾는 하나님이 우리한테 오셔서 우리가 어떻게 생겼든지 간에 우리 생김새 속에 하나님이 자기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거죽이나 디자인에는 관심 없으십니다. 어떤 모습이든지 그 속에 가장 깊은 곳만 우리가 마련하면 됩니다. 그러면 가장 깊은 곳을 찾으시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명품다운 인간, 명인이 되어라.”
물건 살 때 비싸지만 명품을 찾게 됩니다. 우리도 명품 됩시다. 저는 경동교회도 너무 과대하게 크진 않지만 그래도 모두가 찾는, 사고 싶은 명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그만큼 겉도 명품이지만 속도 명품이어야 합니다.
우리 깊은 곳, 넓은 곳, 개방성, 높은 곳을 하나님께 드리는데 하나님이 부탁이 있습니다. 나는 명품을 원한다. 명품의 핵심은 내용이다. 내가 명품의 핵을 이루어주마. 그대들의 모습은 빛날 것이다. 부탁이 있다. 나 없이 명품이라고 떠드는 것은 짝퉁이니라. 짝퉁 물건 원하세요? 짝퉁 신앙 필요 없습니다. 체하는 것 별로 필요 없습니다.
해방도 자유도 기쁨도 복도 없는 이상한 모습의 짝퉁이 예수님 보시기에 니고데모가 사는 율법의 세상이 짝퉁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행복이 없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가 깊은 곳에 있고 그대들이 나를 감싸고 나를 닮고 우리 둘이 합해서 하나님이 만드신 명품이 되자. 나는 짝퉁 속에는 임하지 않는다.
결단하십시다. 저는 이 땅이 그런 땅이 되기를 바라고, 예수님도 그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하늘은 깊은 곳을 찾습니다. 진실을 찾습니다. 위대한 것을 찾고 높은 것을 찾습니다. 명품 세상을 만들려고, 명품 사람을 만들려고 말입니다. 성령의 축복 풍성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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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6:22-27,롬11:33-36,요3:1-8 거듭나는 삶 /박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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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05,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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